第六十五章 대적(對敵) (1)
“하아!”
등여산은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크게 토해내며 눈을 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운공이 비로소 끝났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운공이 아니다.
그녀는 진기를 움직인 적이 없으니, 결코 운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설화공의 진결에 맞춰서 진기를 이끌지 않았다.
운공의 주(主)는 의념(意念)이다. 굳은 생각이 진기와 합일하여 이끌어야 한다. 의념으로 경맥을 주시고, 원하는 곳으로 진기를 통과시켜야 한다.
등여산은 그러지 못했다.
희열이 벅차게 피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진기를 움직인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기쁨 속에 온몸을 온전히 묻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의 옆구리 상처는 놀라울 정도로 회복되었다.
피는 깔끔히 멎었고, 상처도 아직 딱지는 붙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도 없었다.
아픔이 대부분 사라졌다.
단숨에 적어도 여드레 이상 요양한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났다.
스윽!
등여산은 옆구리를 만지면서 일어섰다.
“놀랍네.”
홀리가 말했다.
“이게 생기 치료야?”
“너도 할 줄 알면서 뭘.”
등여산이 홀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계집애, 조심하라니까 항상 맞고 다니고 있어. 상처는 치료된 거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응. 괜찮아.”
등여산은 말하면서 해자수를 쳐다보았다.
자신도 희열 속에 빠져서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는데, 해자수도 그런 것 같다. 아직도 운공 중이다. 아니, 생기 치료 중이다.
운기를 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넌 뭐가 달랐어?”
등여산이 궁금한 듯 홀리에게 물었다.
“생기?”
“응.”
“나는…… 이거 뭐라고 하지? 나는 땅이 발바닥을 끌어당겼어.”
“발바닥을?”
“용천혈(湧泉穴)이 땅에 찰싹 달라붙은 것 같은 느낌?”
“용천혈이 땅에 붙으면…… 굉장히 안정감은 느꼈겠다.”
“맞아. 이상한 것은 발이 땅에 붙어 있는 데도 몸은 매우 자유롭다는 거야. 어떤 상태로 움직여도 될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 하지만 다른 느낌도 있었어. 이 땅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하는.”
홀리는 굉장히 안정되었다.
편안함을 느낄 때는 땅이 그녀를 끌어당긴다. 차분한 안정이다. 위험이 감지되면 그냥 놓아준다. 지금까지 얻은 힘을 바탕으로 마음껏 움직이라고 한다.
굉장히 안정된 느낌이다.
“사마와 싸울 때는 다른 느낌이었지?”
“갑자기 땅이 용천혈을 탁 놔주더라고. 뭐라고 할까? 몸이 분해되는 느낌? 유리 깨지듯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어지는 느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이야.”
“몸이 매우 가벼워지면서 산산이 조각난다. 이거 잘못하면 진기 폭주로 이어지는데.”
등여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꽉 붙잡아 놨던 진기를 일시에 풀어내면…… 진기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간다. 경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진기가 터져나간다. 진기 폭주다.
진기 폭주는 주화입마를 불러온다.
“나도 그 생각을 하기는 했어.”
홀리도 말했다.
“나도 위험한 부분이 있어.”
등여산은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말했다.
희열…… 이건 상당히 위험하다.
희열은 주체하지 못할 감정이다. 운공 중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 싫어한다.
자칫하면 운공 속에 파묻혀서 나오기 싫을 수도 있다.
현실을 버리고 몸 안으로 침잠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진기를 운용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진기를 정심하게 운공하면 끝없는 희열이 치솟는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세상이 조용해지고 그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러면 진기 속에서 헤어 나오기 싫어진다.
사부는 늘 제자가 이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런데 등여산은 생각만 하면 곧바로 그런 상태로 이른다. 굉장히 위험하다.
“조절할 수 있지?”
홀리가 물었다.
등여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묻는 홀리도, 대답하는 등여산도 십분 자신하지 못한다.
등여산은 희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을, 홀리는 진기 폭주를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지금은 조절할 수 있다.
호발귀도 과거에는 혈기를 조절했다.
호발귀는 그녀들이 지금 느끼는 이런 상태를 혈기라고 말했다. 살심이 치솟기 때문에 혈기라고 한 것인데, 그녀들의 상태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결국 호발귀는 혈기 조절에 실패했다. 과거에는 조절했지만, 점차 생기가 힘을 얻어가면서 실패한 것이다. 생기에 호발귀가 먹혔다고 할까?
등여산과 홀리도 다르지 않다.
지금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운용되지만, 어느 순간에는 호발귀처럼 생기가 오염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녀들 역시 혈마가 될 수 있다.
두 여인은 자신에게 부딪친 일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안다.
“하아아!”
해자수가 큰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상처는 물어볼 것도 없다. 걸레처럼 헤집어졌던 가슴에 살이 돋아났다. 피는 당연히 멈췄고, 몇 달 동안 정성스럽게 금창약을 발랐을 때처럼 많이 아물었다.
“우와! 이거 죽이네요.”
해자수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느낌이었어?”
홀리가 물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뭔가가 날 막 끌어당기는 느낌이죠, 뭐. 너무 거세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이리저리 정신없이 떠밀려 다녔다니까. 난 이거 하면 정신이 너무 없어. 뭔가가 막 끌어당기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
‘중심이 없다!’
등여산과 홀리는 동시에 느꼈다.
등여산은 감정이 중심이다. 홀리는 땅이 중심이다. 그런데 해자수는 중심이 없다.
등여산은 해자수의 말을 잘못 이해했었다. 뭔가가 막 끌어당긴다고 할 때, 몸이 무엇인가를 끌어당긴다는 말로 잘못 알아들었다.
몸이 중심인 채로 빛을 끌어당기고, 빛을 밀어낸다. 이런 상태라면 분명히 추납이다.
그런데 지금 해자수 말을 들어보니 중심이 천지자연이다.
밖에서 무엇인가가 해자수의 몸을 끌어당긴다. 이리저리 휘몰아친다. 당연히 해자수는 거부하지 못한다.
엄청난 거력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무조건 끌려가야만 한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내친다. 밀어낸다.
해자수는 그제야 마음껏 무공을 펼칠 수 있다.
무엇인가가 그를 끌어당길 때, 해자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물 한 방울과 바다가 만난 격이다.
어쩌면 해자수는 셋 중에 가장 위험한 생기와 만났다.
아직은 어떤 것이 위험한지 알지 못한다. 천천히 진행하다 보면 장단점이 나올 것이다.
홀리가 말했다.
“이거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다른 것 같아. 호발귀는 빛이 보인다고 했어. 푸른 빛. 나는 그때 빛이 보이는 게 생기를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거잖아?”
“그러네. 이렇게 되면 궁금해지네. 보위님과 당홍 언니는 어떤 걸 느낄까?”
“그것보다…… 어때? 갚아줘야지?”
홀리가 싱긋 웃었다.
상처가 거의 치료되었다. 참응은 하직도 하늘을 맴돈다.
거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혈마가 아직도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마도 아직 그곳에 있다.
“한 번 더 해봐?”
등여산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자신 있게 웃었다.
* * *
“도대체 뭘 하고 있지?”
형옥주가 중얼거렸다.
산 밑 숲속에 혈마가 있다. 참응이 여전히 한 자리에서 빙빙 맴돌고 있다.
혈마를 볼 수는 없지만, 숲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혈마가 꿈쩍하지 않는다.
“저 숲에는 짐승도 없나?”
형옥주가 곤혹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혈마는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다. 짐승도 죽인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인다. 동물도 살아서 움직이는 이상, 생기를 발산한다. 혈마는 그 생기를 끌어당겨서 죽인다.
당연히 동물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른다.
이번에는 그런 비명도 울리지 않았다. 짐승의 울부짖음을 전혀 듣지 못했다.
작은 동물들이 흘리는 찍! 소리는 형옥주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런 자잘한 비명까지 듣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다람쥐가 죽고, 토끼가 죽고, 새들이 죽었을 수 있다.
하지만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더기로 끌어당겨서 죽였다면 큰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숲이 아주 고요하다. 설혹 혈마가 죽였다고 해도 겨우 십여 마리에 불과하다.
절대로 많은 수는 죽이지 않았다고 장담한다.
그러면 혈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혈마가 꿈쩍하지 않고 있으니, 형옥주도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다.
혈마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한편으로는 곤혹스러우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 정공대명(停工待命).
본단 명령이다.
지금 하는 작업을 중지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말인데…… 작업이라는 것이 뭔가? 혈겁이지 않나. 당분간 혈겁을 중지하라는 긴급 명령이 내렸다.
세상인심이 뜻밖에도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르자, 그쪽을 먼저 수습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했다.
당분간 혈겁 중단, 실험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다.
세상인심은 이토록 무섭다.
천살단은 혈천방과는 다르게 세상 눈치를 봐야 한다.
혈천방이야 세상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천살단은 정도 문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이상 나쁜 일을 행하면 안 된다는 고정된 틀에 묶여 있다.
단주는 지금도 그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끝까지 정도 문파의 틀을 유지한 채로 이 연구를 마치려고 한다. 사마를 끝까지 숨기는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한데.
단주는 정도인의 지지를 받는 게 혈천방과 크게 나뉘는 가장 큰 힘이라고 여긴다.
천살단의 강력한 대응이 유효했는지, 세상에 떠돌던 소문이 방향을 틀었다.
세상은 천살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혈마는 계속 살겁을 저지른다. 그것을 막고자 천살단 무인이 혈마를 추격하고 있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하면 혈겁을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뜻이다.
한동안은 살행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봐야 했었는데, 마침 혈마가 거기에 딱 맞게 행동해 주었다.
저렇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동안 계속 사마를 쫓아오는 통에 얼마나 피곤했나. 하지만 너무 조용하니 또 마음에 걸린다.
혈마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혈마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의하면 혈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아주 사나운 맹수다.
사마를 쫓는 것도 본능이 시킨 일이다. 아니, 사마에게서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생기를 느끼고 쫓는 것일 뿐, 사마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쫓는 것은 아니다.
“제길! 이거 어떻게 가까이 다가갈 수나 있어야지.”
형옥주가 툴툴 웃었다.
혈마가 어떤 이유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목숨을 걸고 내려갈 생각은 없다.
호발귀와 마주치면 여지없이 죽는다.
혈마가 검을 쳐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빨려간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주춤주춤 딸려간다.
그 모습은…… 공포에 질려서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너무 처절해서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은 공포를 말할 수 없다.
형옥주는 참응을 쳐다봤다.
참응이 쉬기 위해서 나무로 내려간다. 하지만 내려앉은 나무에서도 여전히 혈마를 지켜본다.
사실 나무에서 지켜봐도 충분하다. 사실, 매는 허공에서 지켜보지 않는다. 벼랑이나 나무에서 목표를 찾아낸 후에야 날갯짓한다. 체력을 최대한 비축하는 것이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허공에 띄웠다. 그래야 뒤를 쫓는 사람이 참응을 보고 따라붙는다.
참응이 하늘에서 맴도는 것, 저것도 비보전이 몇 년에 걸쳐서 훈련한 성과다.
참응은 잠시 앉았다가 숨을 고른 후에는 다시 날아오를 것이다.
“네가 혈마를 지켜보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겠지.‘
혈마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해도 참응의 눈에서까지 벗어날 수는 없다.
궁금하다고 괜히 목숨 걸고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냥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좋다.
형옥주는 결코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