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四章 초감(初感) (5)
쉬이잇! 쉬잇!
어디선가 파공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등여산은 파공음을 듣지 않았다. 예민하게 감정의 변화를 주시했다.
‘응?’
이상하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편안해진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집이 보인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신을 반겨주는 포근한 공간이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푹 쉴 수 있다.
파공음은 등여산에게 아늑한 느낌을 불러왔다.
쉬이잇! 쉬이잇!
거센 파공음을 일으키며 홀리와 해자수가 나타났다.
‘그렇군.’
등여산은 피식 웃었다.
생기는 공격하는 사람과 평안한 사람을 구분한다. 사람을 구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상대방이 일으키는 기운을 감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뭐야? 왜 이래?”
홀리와 해자수는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등여산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사마야! 공격 중!”
‘공격 중’이라는 말에 두 사람에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등여산의 등 뒤로 바싹 붙었다.
“계집애, 몸조심하라니까!”
홀리가 화를 냈다.
“이런 놈들이 나타날지 어떻게 알았나.”
등여산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빨리 지혈부터 해. 상처가 심해.”
“아니, 괜찮아.”
“아무리 사마라고 해도 한두 수 정도 막지 못할까. 우리가 막아볼 테니까 지혈부터 시켜.”
“사마는 검으로 못 막는 거 알지?”
“검격(劍擊) 소리가 몇 차례 울렸는데, 어떻게 막은 거야?”
홀리가 재빨리 물었다.
등여산의 상처가 매우 급해 보이지만, 사마를 상대할 방법을 듣는 것도 급하다.
등여산 말대로 사마는 검으로 막지 못한다. 무공으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대로 사마와 맞서면 십중팔구 죽기 십상이니, 티끌만 한 대책이라도 있으면 들어야 한다.
“생기로.”
등여산이 뜻밖의 말을 했다.
“생기?”
“아까 느낀 것 있지? 다들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난 감정으로 느꼈어. 감정의 변화에만 집중했거든. 그러니까 사마가 보이는 거야.”
“아까 그거?”
“응.”
“난 당초 무슨 소린지.”
해자수가 모르겠다는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았어. 빨리 지혈부터 해.”
홀리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아직은……’
등여산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이후에도 감정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아직 생기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니, 자신이 손을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분 나쁘다는 느낌이 들면 즉각 반격한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을 감시하면서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넓게 뿌렸다. 그리고 지혈을 건성건성 했다.
두 사람이 곁을 지켜주고 있지만, 상대는 사마다. 그때,
“온다!”
등여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곧바로 홀리와 해자수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움직였다.
등여산도 바로 움직였다.
슉! 슉! 까앙! 깡!
세 사람은 낯선 검을 받아냈다.
무척 빠르고, 강렬하다. 눈앞에서 검광을 확 피워낸 후에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슈웃!
등여산과 홀리는 앞쪽에서 다가온 검과 부딪쳤다.
홀리가 상대방의 검을 막았고, 등여산이 허리로 생각되는 부분을 격타했다.
물론 등여산의 검은 허공만 훑었다.
사마는 공격과 동시에 물러나는 것 같다.
눈앞에서 번쩍! 검광을 쏟아내고는 사라져버린다. 홀리가 검을 부딪치는 것과 등여산이 상대방을 친 것이 거의 동시인데도 몸을 치지 못했다.
퍼억! 퍽퍽퍽!
등 뒤에서 요란한 격타음이 터졌다.
검이 살을 찍는 소리다.
해자수가 사마를 찍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해자수가 당하는 소리다.
“해자수!”
홀리가 와락 신형을 비틀어서 뒤로 날아갔다.
생각했던 대로 해자수는 손해를 상당히 봤다. 검을 막아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이어지는 변초는 모조리 허용하고 말았다. 속도에서 밀렸다.
“크윽!”
해자수가 신음을 흘리면서 비틀비틀 물러섰다.
해자수의 가슴은 피투성이다.
사마의 검이 가슴을 헤집어놨다. 언뜻 보기에도 뼈가 환히 드러나 보인다.
“손해 많이 봤네?”
해자수를 부축한 홀리가 앞을 노려보며 물었다.
“방심하다가 조금. 아! 이거 창피해서.”
해자수가 민망한 듯 웃었다.
“사마에게 당한 것은 전혀 창피하지 않아요. 오히려 절명하지 않은 게 자랑이죠. 그럼 저도 창피하게요?”
“어휴! 그런 뜻이 아니라……”
타타탁! 타탁!
홀리가 빠르게 손을 놀려서 가슴에 있는 혈을 짚었다.
줄줄 쏟아지던 핏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가씨, 그런데 그놈들 얼굴은 봤습니까?”
“아니. 못 봤어.”
“아! 난 또 나만 못 본 줄 알고. 가슴살이 헤집어지는 데도 누가 이 짓을 했는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니까요. 이거 참, 이거 뭐 하는 놈들인지. 저놈들 유령인가?”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일단 여기서 물러나야겠어.”
등여산이 말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둘이나 있다. 홀리와 해자수도 생기를 느낀 듯하니 사마와 싸울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상이 깊어질 것이다.
득보다 실이 많다.
“물러가게 내버려 둘까?”
“물러가는 것은 괜찮을 거야. 사마는 혈마를 지켜봐야 하거든. 자리를 못 비워.”
세 사람은 등을 맞댄 채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사마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이 뒤로 물러서자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사마가 공격한 것은 혈마에게 다가서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스읏! 스으읏!
세 사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크윽!”
해자수가 더는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
홀리가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면서 등여산을 쳐다봤다.
“뭐해, 빨리 치료하지 않고.”
그때, 등여산이 기묘한 소리를 했다.
“치료하지 마.”
“뭐? 왜?”
홀리는 등여산을 전적으로 믿는다.
치료하지 말라는 말은 뜬금없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의 손은 우뚝 멈췄다.
등여산이 해자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리 다르게 치료해요.”
“하아! 난 뭐 책사님이 시키는 대로…… 크윽! 한데 나 더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아까 호발귀를 찾으러 갈 때 어떤 걸 느꼈어요? 기운? 감정 변화? 감각?”
“뭔가 끌어당기는 느낌.”
해자수가 힘들게 말했다.
“사마와 싸울 때는요?”
해자수는 치료가 급하다. 하지만 등여산은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묻기만 한다. 상처 치료에는 전혀 상관없는…… 나중에 치료를 끝낸 후에 물어도 될 법한 말들이다.
‘그런 건 나중에 물으면 안 될까?’
홀리는 막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등여산은 분명히 다르게 치료하자고 했다. 치료! 이것도 치료의 일환이 분명하다.
“사마와 싸울 때는…… 창으로 위협해서 밀어내는 느낌? 아니, 밀어냈어. 확실해. 무슨 바람 같은 것이 훅! 밀어내는 느낌이었거든. 한번 밖에 겪어보지 않아서……”
해자수가 말끝을 흐렸다.
등여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대로다. 확실히 사람마다 생기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다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큰 차이를 보인다.
자신은 감정 변화, 해자수는 추기(推氣)와 납기(拉氣)로 알아챘다.
“납기. 납기를 주시해요.”
“아!”
해자수는 등여산이 하는 말을 당장 알아들었다.
무인은 상처 치료에 세 가지를 사용한다. 약, 점혈, 운기다.
등여산은 익숙한 치료 방법을 버리고 생기를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필요는 없다.
사마의 공격을 추기로 알려준 것처럼 진기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납기가 알려줄 것이다. 진기는 그저 있는 대로 놓아두면 된다.
“이거…… 책사님이 써본 거예요?”
해자수가 물었다.
등여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우 위중한 상태였다. 호발귀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처는 깊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운신도 하지 못할 정도다. 적어도 반년, 혹은 일 년 이상 요양을 해야 할 상처였다.
그런데 등여산은 거짓말처럼 털고 일어섰다.
홀리, 해자수에게 전혀 뒤지지 않게 따라붙었다. 날이 갈수록 힘이 더 붙는다는 느낌이었다.
등여산은 확실히 호발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그런데 막상 상처를 치료해야 할 순간이 되자, 혹시 등여산이 이런 방식으로 상처를 치료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여산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뇨. 써본 적 없어요. 이거, 지금 생각나서 말한 거예요.”
“그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네. 그렇지만 해보려고요. 저는 이제 확실히 믿거든요. 생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진기 외에 다른 게 있다는 사실을 믿어요. 한 번 해보려고요.”
등여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생기의 존재는 해자수도 믿는다. 이미 몸 전체로 절절히 실감하고 있다.
생기는 그를 단숨에 절정 무인으로 만들어 준 도구다. 그를 일으켜 세운 기운이다.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나.
“까짓거 해보죠, 뭐.”
해자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등여산도 해자수 옆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쏴아아아아!
가슴 밑바닥에서 희열이 솟구친다.
한 번만 반짝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희열이 아니다. 끝없이 피어난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이 기쁘다.
사람이 미친 것도 아니고…… 아니, 감정 기복이 이 정도로 심하다면 미쳤다고 봐야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기분이 나빴는데, 지금은 무척 기쁘다. 온 세상이 전부 내 것 같다.
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도,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흙 위로 기어가는 벌레마저도 자신을 축복해 준다.
나뭇잎이 하늘거리면서 속삭인다. 사랑해. 아아!
기쁨이 차고 넘친다. 왜 이렇게 기쁜가? 너무 많은 기쁨이 밀려와서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다.
입술이 실없이 삐죽대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웃음을 터트려야겠는데 입술을 움직일 줄 몰라서 웃음을 흘리지 못한다.
온몸에 희열이 충만하다. 몸 안으로 가득 밀려둔 희열이 옆구리에 있는 상처조차 밀어낸다.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등여산은 끝없는 희열 속에 자신을 파묻었다.
이런 상태라면, 이렇게 기쁘다면 몇 날 며칠이고 있고 싶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해서 이런 상태를 만든다. 이런 상태가 되고 싶어서 술을 마신다.
어떤 사람은 마약까지 먹는다. 양귀비에 중독되어 깊은 희열을 느낀다.
등여산에게 밀어닥친 희열은 마약으로 일어난 희열보다 더 진할 것 같다.
마약이 어떤 희열을 주는지 모르지만, 지금 등여산은 평생을 살면서 느낄 기쁨은 한꺼번에 받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 약물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천지자연 속에 온몸을 내맡기고 단지 느끼기만 하면 끝없는 희열이 가슴을 가득 메운다.
‘아아……!’
등여산은 희열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빠져나가도 괜찮잖아. 운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어때. 지금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잖아. 괜찮아. 기쁨을 즐겨.
쏴아아아아!
기쁨이 벅차게 피어났다.
큭! 큭큭! 큭!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호발귀는 혈마가 되면 킥킥 괴소를 흘렸다. 아마도 호발귀 내면에서 괴소를 흘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감정 변화가 일어난 것일 거다.
등여산도 실소를 흘렸다.
큭! 큭큭!
기쁨이 넘쳐서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웃음을 흘려야겠다.
주위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 기쁨을 어떻게 가슴 안에만 간직하나.
큭! 큭큭큭!
등여산은 희열에 몸을 푹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