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四章 초감(初感) (4)
진기는 항상 일정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크게 일으킬 수도 있고, 아주 약간만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 진기는 강약 조절이 가능하다.
감정은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다.
육체의 전반에 걸쳐서 총체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부딪히는 상황에 따라서 감정 변화가 달라진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고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 좋다고 웃을 수는 없다.
그러면 생기(生氣)는? 등여산은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생기라는 것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기(氣)라고 말하니 기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또 어떻게 보면 기운도 아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 바탕? 맞는 것도 같고 틀린 것도 같다. 생기에 대해서는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다.
생기를 말하라는 것은 우주 만물의 기운에 대해서 말하라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말할 수 있다. 흙의 기운, 하늘의 기운 등등 세부적으로 나눠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운이 사람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말하라고 하면 너무 난감해진다. 그때는 음식, 공기, 옆에 있는 나무 등등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생기를 느낄 수 있나?
없다. 하지만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 모든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생기는 선승(禪僧)이 잘 감지한다. 생기를 느끼면 우주와 통하는 느낌, 몸에 매우 거대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등여산은 그 정도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발귀가 앞에 있다는 느낌, 그 느낌만은 확실히 잡고 있다.
등여산은 이 느낌 또한 자기 머리가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정작 호발귀는 앞에 없는데 자신이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은 일종의 착각 현상이 아닌가 하는 거다. 아니면 맹목적인 맹신이거나.
호발귀가 생기를 감지한다고 할 때는 ‘특별한 진기’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경험해보니 이건 전혀 다르다. 결코 진기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진기처럼 작용한다.
그게 무엇이든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확신, 안도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기분 나빠.’
퍼뜩 떠오르는 느낌이다.
주위는 변한 게 없다. 전혀 변한 게 없다. 그런데 갑자기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와락 치민다.
“으윽!”
등여산은 손을 올려서 가슴을 짚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리다. 은은하지만 너무도 선명하게 쥐어짜는 느낌이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감정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육신의 고통을 불러왔다. 순간.
쒜엑!
갑자기 앞쪽에서 칼바람이 일어났다.
등여산은 깜짝 놀라서 급히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는 행동만으로는 이미 늦었다 싶어서 상반신을 뒤로 훅 젖혔다.
쒜에엑!
검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반응이 조금만 느렸다면 당장 머리가 베였을 것이다. 아니, 단순한 반응 문제가 아니다.
기분 나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부터 전신 감각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주위에 있는 풀도 나무도 모두가 기분 나쁘다. 그러니 당연히 솜털까지 곤두설 수밖에 없다.
그런 마당에 칼이 날아왔다.
검은 보이지 않았지만,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당연히 피하지 누가 피하지 않을까.
‘어떤 놈!’
등여산은 상대방을 보지 못했다. 검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는데도 상대방의 모습은커녕 형체조차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어떤 옷을 입었는지, 키가 큰지 작은지도 모른다.
슈웃!
또 기분 나쁘다. 굉장히 기분 나쁘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싸아악!
불현듯 등 뒤에서 파공음이 일어났다.
등여산도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꽉 쥐었다.
안 된다. 이럴 때는 오히려 검을 느슨하게 잡아야 한다. 검을 쥐여 짜듯이 꽉 잡아버리면 오히려 검속이 느려진다. 힘으로만 검을 쳐내는 것은 검초를 죽이는 행위가 된다.
손목의 탄력을 유지해야 한다. 힘을 풀어야 한다.
등여산은 검을 꽉 쥐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풀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휘릭!
몸 앞에서 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동시에 검을 거꾸로 잡았다.
또 앞에서 휘도는 탄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검만 등 뒤로 쳐냈다. ‘파르릉!’ 울리는 떨림을 공격했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히며 파란 불똥을 튀겼다.
등여산은 그제야 비로소 몸을 돌렸다. 검이 먼저 나간 후 몸을 돌린 것이다.
쉬잇!
눈앞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빠르다!
등여산은 깜짝 놀라서 훌쩍 물러섰다.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면서도 몸이 먼저 물러섰다.
세상에 이토록 빠른 사람도 있었나? 빨라도 너무 빠르다.
그녀는 현재까지 두 번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상대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어떤 놈인데 이렇게 빠르지?’
등여산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인지 기분 나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지 상대가 너무 빨라서 놀랄 뿐이다. 어떻게 두 번이나 공격을 당하고도 상대방조차 보지 못했나.
“후우우!”
등여산은 진기를 조절하며 사방을 쏠아봤다.
기습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있다. 한데 전혀 알지 못하겠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나.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런 식으로 공격하지? 이 신법은 도대체 뭐야?
‘누구냐? 나와봐.’
진기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검공은 설화팔극검을 준비했다. 기수식을 취하고 어디서 공격해 오든 반격할 준비를 끝냈다.
‘기분 나빠!’
그녀가 막 기수식을 취했을 때, 불현듯 기분 나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공격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나쁘다. 순간,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파공음이 일어났다.
쒜엑!
등여산은 재빨리 설화비천을 펼쳤다.
검이 복부를 치는 듯하더니 위로 쑥 솟구쳤다. 상대방이 내리친 검을 강력하게 쳐올렸다.
등여산은 이어서 설풍검자를 펼칠 생각이었다.
휘돌면서 검을 쳐낸다. 검의 회전을 크게 해서 타격력을 높인다.
속도는 물론 지금보다 배는 빨라진다.
하지만 설풍검자를 쳐내지 못했다.
쒜에엑!
왼쪽에서 또 다른 검풍이 일어났다.
등여산은 주저앉듯이 오른쪽 무릎을 툭 꺾었다.
머리도 무릎에 닿을 정도로 낮게 숙였다. 동시에 왼발 끝으로 땅을 박찼다. 오른발을 살짝 들어서 빙글 돌았다.
쒜에엑!
검이 땅에 바짝 붙어서 상대방의 다리를 쳐갔다.
슉! 슉!
상대방이 쳐낸 검은 머리 위로 흘러갔다. 간발의 차이다.
그녀가 쳐낸 검은 땅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상대방의 발밑을 휩쓸었다.
상대방이 순간적으로 도약해서 검을 피했다. 등여산의 검초를 미리 알고 피한 듯 정확한 시점에 피해냈다.
좌우에서 합격했던 두 검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등여산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대가 두 명이라는 것보다 유령 같은 신법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검벽 무인들이 도살당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꼼짝하지 못했던 상황이 재현된다.
그때와 똑같은 공격이다. 치고 사라지는데, 전혀 보지 못한다.
등여산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았다.
‘사마! 너희들이었어?’
“하아아!”
등여산은 다시 진기를 조율했다.
상대가 사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용케 공격을 피했지만, 상대가 여전히 승기를 쥐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사마를 상대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현재, 사마는 적이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츄릿!
등여산은 검을 고쳐잡았다.
상대가 사마인 것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에는 싸움 방식이 달라진다. 예전처럼 싸우면 필패(必敗)다.
진기를 믿으면 낭패한다. 진기를 버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등여산은 감정 변화에 신경을 썼다.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서 같은 감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기분이 나빠지면 반드시 검이 날아왔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다면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성질나는 일을 보고 화가 들끓었을 때처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감정이 훅! 치솟았다.
어렵지 않다. 기분 나쁘다는 느낌은 당장 알아챌 수 있다.
그러면 어느 것이 선후일까?
상대방이 공격을 시작하면, 검기를 읽고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 후에 검풍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 않다. 생기는 생기를 읽는다. 자신의 생기가 사마의 생기를 읽는다.
사마가 공격할 준비를 하면 즉시 기분이 나빠진다. 그 후에 검초가 터진다.
검초 전개보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먼저다.
진기에 의존하면 검기나 검풍을 들은 후에야 공격을 눈치챈다. 하지만 생기는 상대방이 공격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즉시 눈치챈다. 적어도 두 단계 이상 빠르다.
이토록 빠른 직관이 있었기에 사마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게 생기야!’
등여산은 생기의 존재를 믿는다.
호발귀와 그만큼 같이 다녔으면서도 믿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 호발귀와 함께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생기의 존재를 믿는다. 생기 덕분에 진기가 한층 강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등여산이나 홀리, 해자수에게 생기는 그저 무형의 기운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존재는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생기의 존재를 감지했다.
홀리와 해자수는 절반쯤 감지했고, 이런 일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도천패와 당홍은 아직도 생기를 무형의 기운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도천패와 당홍도 언제든 등여산처럼 생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단지 기회의 문제일 뿐이다. 기회만 주면 언제든지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생기를 알고 있으니, 이런 느낌에 접촉하는 순간이 곧 올 것이다.
‘사마. 예전에는 너희를 전혀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느낄 수 있어. 형옥에서도 난 너희들을 전혀 보지 못했어. 조금도 느끼지 못했어. 하지만 어쩌나. 이제는 느껴지는데.’
등여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공격 기미를 감지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스읏!
차분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사마는 당황한 듯 공격해 오지 않았다.
현재 사마의 움직임은 형옥주가 주도한다. 그러니 정작 당황한 사람은 사마가 아니라 형옥주다. 그가 사마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형옥주는 등여산이 사마의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아낼 줄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읏!
등여산은 조금씩, 조금씩 혈마를 향해 움직였다.
사마가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원래 예정했던 대로 혈마를 향해서 나아간다. 순간!
‘기분 나빠!’
또 기분이 나쁘다. 눈이 숲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는 순간, 갑자기 불쾌한 감정이 울컥 일어난다. 한낱 나무가 이토록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나?
‘머리!’
이번에는 하늘이다.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아주 맑고 신선한데,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낼 듯 우중충하게 보인다.
쒜에엑!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검광이 터졌다. 수천, 수만 개의 검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일시 온 세상에 검우(劍雨)가 퍼붓는 것 같다.
쒜엑!
등여산은 검우를 막는 대신 앞으로 치달렸다.
설화팔보가 현란하게 펼쳐졌다. 동시에 검을 두 손으로 잡고 하늘을 향해 번쩍! 내리쳤다.
그녀가 전개할 수 있는 검공 중 가장 잔혹한 검초, 촌음명이다.
쒜엑! 까앙! 깡!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등여산은 검이 부딪친 후에도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기분 나쁜 감정이 계속 이어진다.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마구 화를 내고 싶다.
푸욱!
갑자기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어느새 다가온 검이 옆구리를 치고 빠져나갔다.
“우욱!”
등여산은 즉시 검을 휘돌렸다. 설화팔극검의 여덟 초식을 모두 쏟아냈다.
스슷!
그녀를 공격했던 두 검은 동시에 사라졌다.
등여산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생기를 눈치챘다고 하지만 아직은 활용도에서 매우 미숙하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것이 지나지 않는다.
기분이 나빠서 공격이 지속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 올지를 몰랐다.
첫 번째 공격은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을 막는 사이, 은밀히 다가온 또 하나의 검은 놓쳤다.
“정말 빠른데! 도대체 어떤 무공이지? 아무리 사마라고 해도 무공을 수련했을 텐데. 무림에 이런 무공이 있었나?”
등여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검을 고쳐 잡았다.
이들은 자신의 숨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공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