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四章 초감(初感) (2)
등여산은 매우 은밀하게 신형을 움직였다.
천살단 무인들을 뒤쫓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저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고수다.
천살단 무인이라면 소속을 가리지 않고 제각기 자기 몫은 할 줄 안다.
등여산의 무공이 높아졌지만, 충분히 조심해야 한다.
저도 모르게 뒤쫓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달려야 해?”
해자수가 장난 섞인 짜증을 부렸다.
천살단 무인을 쫓아서 치달린 지 열흘이다.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열흘 동안이나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잠은 잠깐씩 쪽잠을 잤고, 음식은 서서 건포나 벽곡단(辟穀丹)을 씹어먹었다.
“다행이잖아요.”
등여산은 오히려 이것이 훨씬 좋다는 듯 활짝 웃었다.
“호발귀가 살인하지 않는다, 뭐 또 그 말이우? 어휴! 차라리 좀 하라고 해. 이놈의 다리 좀 쉬게.”
해자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마가 혈겁을 유도하지 않고 계속 끌고 다닌다. 벌써 몇 번은 마을을 뒤집어야 했는데, 계속 산길만 치달린다. 마을 인근으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혈마의 행동은 완전히 사마가 쥐고 있다. 아니, 형옥주가…… 천살단주가 쥐고 있다.
지금 혈마는 천살단주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혈마를 이토록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되나?
등여산도 겨우 일부분만 추측한다.
호발귀를 유도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인할 수 있는 먹잇감을 제공해야 한다.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해야만 잡아둘 수 있다.
호발귀를 안다면, 아니 혈마를 안다면 지금처럼 치달리기만 하는 일이 어떤 의미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혈마는 눈에 보이는 족족 죽인다. 생기를 잡아채서 죽인다. 혈마는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다.
짐승도 죽인다. 맹수나 약한 짐승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토끼나 닭도 죽인다.
혈마의 살수에는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혈마가 훑고 지나간 마을에는 살아있는 생명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치가 떨릴 정도로 모든 생명이 말살되어 버린다.
사람과 짐승은 모여서 살고, 흩어져서 산다는 차이점이 있다.
짐승은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갈가리 찢어 죽여도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사람은 모여서 산다.
일가족 전체 혹은 마을 전체를 소멸해야 한다. 당장 눈치챈다.
혈마는 지금도 혈겁을 저지르고 있다.
비록 짐승들을 상대로 쳐죽이고 있지만, 여전히 생명을 끊는다.
천살단 무인들의 뒤를 쫓아보면 짐승들의 사체를 보게 된다. 잔인하게 짓이겨진 모습이다.
두 동강은 기본이고, 어떤 경우에는 여섯 토막에서 일곱, 여덟 토막으로 잘려져 있다.
혈마가 한 일이다.
혈마가 잡은 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어도 같은 방식으로 죽였다. 틀림없다.
지금 사마는 혈마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다.
혈마가 다른 곳으로 움직일 것 같으면 즉시 사마를 보내서 유인한다. 한적한 곳에 이르면 잠시 떼어놓는다. 혹은 곰이나 멧돼지 같은 선물을 주기도 한다. 역시 시간을 조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을 소멸시키면 혈마는 다시 움직인다.
정말 조금밖에 쉬지 못한다.
지금 사마는 두 명이다. 두 명이기 때문에 교대로 혈마를 유인할 수가 있다. 만약 사마가 한 명이었다면 벌써 혈마에게 잡혀서 죽었을 것이다.
지금 사마는 매우 위태로운 곡예를 하고 있다.
이 곡예가 끝나면 어쩌라고 그러나. 만약에 혈마가 점점 발전해서 사마 중 한 명이라도 잡아 죽이면, 그다음 한 명은 너무 손쉽게 나가떨어진다.
사마 두 명이 다 죽은 다음에는 무엇으로 혈마를 유인할까?
그때는 혈마를 유인할 도구가 없어진다. 혈마가 자유롭게 움직인다. 세상을 휘젓는다.
혈마를 계속 유인하는 일은 혈마가 이런 일에 대해서 자가 발전하게 만든다.
이런 행동에 곧 익숙해질 것이고, 사마를 따라잡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낼 것이다.
쉬이이익!
등여산은 계속 천살단 무인을 추격했다.
스읏! 슷!
천살단 무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저들도 인간인 이상 쉬어야 한다. 언제까지 치달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이 사마와 천살단 무인들의 한계다.
반면에 혈마는 움직이면서도 생기를 보충한다. 생기를 다룰 줄 알기 때문에 천지자연의 생기를 자연스럽게 흡입하고 배출한다.
혈마는 지치지 않는다.
신체적인 면에서, 무공에서, 진기 측면에서 혈마는 사마를 압도한다.
사마는 두 명 혹은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겨우 평수를 이룬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혈마가 사마를 놓쳤다는 걸 의미한다.
추격할 것이 없으니 걸음을 멈춘다. 혈마가 멈추니 천살단 무인도 쫓아가지 않는다.
지금 혈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짐승을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곰이라도 만났다면 당분간 대척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다. 결국을 곰의 생기를 조정해서 검 앞으로 끌어낼 터이지만.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오직 혈마만 안다.
산에서 내려갈 수도 있고, 마을로 갈 수도 있다. 또 다른 생명체를 죽일 수도 있다.
“우리 이렇게 쫓아가는 거 맞아? 우리가 한발 앞서서 가야 하지 않아?”
홀리가 말했다.
“아직.”
“아직이라니 무슨 뜻이야?”
“부지런히 찾고 있는데 아직은 무엇을 보고 쫓아가는지 모르겠어.”
등여산이 고개를 내둘렀다.
“천살단 밀마는 정말 복잡해. 그렇죠?”
해자수가 등여산을 거들었다.
천살단 밀마는 추격 단서다. 지금 천살단 무인들은 어떤 흔적을 찾아서 쫓아가고 있다.
저들은 혈마를 보고 쫓아가는 게 아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생기가 드러나서 공격당한다.
천살단 무인들은 형옥주가 남긴 밀마를 쫓아가고 있다.
- 직진(直進)! 일(一)-십(十).
이런 내용의 밀마다.
맨 앞에는 방향, 뒤에는 속도를 표시한다.
앞에 표시된 숫자는 다경(茶經)을 뜻한다. 숫자 일은 일다경, 이는 이다경이다.
뒤에 있는 숫자를 거리를 나타낸다.
앞에 특별한 표식이 붙지 않으면 대체로 리(里)를 의미한다. 십이라고 표시했으면 십 리다.
밀마를 해석하면, ‘곧바로 와라. 일다경에 십 리를 갈 수 있는 속도로 달려와라.’라는 뜻이 된다.
형옥주가 이런 밀마를 남겼다.
천살단 무인들은 지정한 속도에 맞춰서 달린다. 또 멈추라는 밀마를 받은 후에야 멈춘다.
형옥주는 멈추는 시간까지 정해놨다.
한 시진을 쉬어라. 반각 동안 숨을 돌려라. 세 시진 정도 여유를 가져도 좋다.
천살단은 딱 그 시간만 쉬고 움직여야 한다.
형옥주가 그 시간만 쉬고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더 시간을 늦추면 자칫 뒤처리가 늦어질 수도 있다.
지금처럼 민가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산으로만 치달린다면 천살단 무인이 할 일은 없다. 하지만 혈마가 언제 민가를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면서 쫓아간다.
쉬이잇! 쉬잇!
천살단 부인들이 다시 신형을 날렸다.
천살단 무인들은 이번에는 좀 오래 쉬웠다. 거의 세 시진 가까이 쉬었다.
이것은 잠을 자라는 얘기다.
등여산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저들이 한 시즌 이상을 쉬면 그제야 ‘아! 장기 휴식이구나.’하고 잠시 눈을 붙인다.
피곤함이 온몸을 적셔 온다. 하지만 추격을 미룰 수는 없다. 남은 피로는 운공으로 해소하고, 계속 뒤를 추격한다.
“자! 또 가보자고.”
해자수가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쫓아가지 않았다. 등여산은 추격 대신 저들이 머문 자리로 걸어갔다.
“어? 안 쫓을 거요?”
“네. 이 근처에 특이한 밀마가 남겨져 있을 거예요. 밀마를 찾아주세요.”
“그걸 찾으려고? 쉽지 않을 텐데.”
“천살단 밀마는 아니까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홀리 말대로 무작정 쫓아가는 건 의미 없는 것 같으니까.”
“정말 찾을 거요?”
해자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우리 왜 이 생각을 진작 못 했지?”
홀리가 말했다.
“아유! 아가씨, 이게 말이 쉬어서 그렇지. 밀마 찾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보물찾기나 마찬가지예요. 모르는 사람은 눈앞에 밀마가 있어도 못 찾아요.”
해자수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래도 책사는 천살단 밀마를 잘 아니까.”
홀리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홀리라고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른 문파의 밀마를 찾아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찾아보면 안다. 거의 불가능하다.
등여산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찾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천살단 밀마는 오래전 것이다.
밀마는 거의 매일 변한다. 등여산처럼 밀마를 잘 아는 자가 내쳐지면 당장 밀마부터 바꾼다.
등여산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몇 날 며칠이고 천살단 부인을 뒤쫓았다. 밀마를 찾는 데 자신이 없었다. 사실 살짝 찾아보기도 했고.
하지만 문득 호발귀에게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살단 무인들은 두 시진 이상 쉰 적이 없다. 쪽잠도 두 시진 안에 해결했다.
이번에 세 시진을 쉬었다면…… 그 시간 동안 혈마를 묶어놨다는 말이 된다.
혈마의 신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천살단 무인들은 혈마가 일을 저지른 다음에야 달려나갈 것이다. 그러니 혈마 상태를 알지 못한다. 좋게 변하든, 나쁘게 변하든 저들과는 상관없다.
아무래도 저들보다 앞서 나가는 길을 택해야겠다.
여기서 쫓아갈 단서를 찾아봐야 한다. 만약 밀마를 찾지 못하면 지금 당장 저들을 뒤쫓아가는 것만도 못하다.
어쩌면 뒤늦게 쫓으면 저들조차도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혈마를 찾기는 정말 힘들어질 수 있다.
밀마를 찾겠다는 것은 아주 큰 결단이다.
사사! 사사! 사사삭!
등여산은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정신을 집중해서 나무 밑, 바위 밑, 옹이진 곳, 풀숲까지 모든 부분을 다 훑었다.
밀마는 나오지 않았다.
숲에서 어떤 단서를 찾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찾는 것이 밀마라면 더 힘들다.
그래서 등여산도 감히 자신하지 못하고 천살단 무인들을 뒤쫓았던 것인데.
형옥주는 상당히 자세한 밀매를 남겨놨다.
얼마 동안 쉬어라. 세 시진 동안 쉬고 쫓아와라. 쫓아오는 방향은 직진 후, 좌측으로 비틀어라. 산등성이로 올라가라.
천살단 무인들은 밀마를 쫓아서 움직였다.
그 정도의 밀마을 남겨놨다면, 밀마 흔적도 상당히 뚜렷할 것이다.
쉬는 동안에 불현듯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건 뒤져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거 이러다가 괜히 천살단만 놓치는 거 아니야?”
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씨!”
해자수가 눈짓으로 핀잔을 주었다.
그러잖아도 지금 등여산의 마음은 바싹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이라도 침착하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해자수가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등여산은 해자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홀리의 말도 귓가로 흘려들었다.
그녀는 오직 나무와 바위와 풀만 쳐다봤다. 사방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휴우! 다시 한번 뒤져봅시다.”
해자수가 홀리에게 말했다.
일다경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앉아서 쉴 때는 운공을 두어 차례 할 정도로 긴 시간이지만, 무엇인가를 찾을 때는 이토록 짧을 수가 없다.
숨 몇 번 몰아쉰 것 같은데 벌써 일다경이 지나갔다.
“저기 이거 못 찾으면 지금이라도 쫓아가는 게……”
해자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등여산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의욕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인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아, 괜찮아요. 괜찮아. 내가 쫓아갈 수 있다니까. 보아하니 저놈들도 흔적을 수북이 남기고 다니더만. 내가 찾아볼 게 아무 걱정 마셔. 뭐 그까짓 것 못 찾았다고 기운까지 빠져 있으셔.”
해자수가 등여산을 위로했다.
그때, 등여산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해자수와 홀리는 등여산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아! 있다! 하늘에 매가 떠 있다. 매가 높은 하늘에서 유유히 비행하고 있다.
“저건 매 아뇨?”
“참응(站鷹)이라는 거예요. 천살단이 사람을 쫓을 때 쓰는 매인 데, 내가 저걸 깜빡했네요. 저건 비보전 십육비자가 사용하는 매라서, 비보전 사람밖에 다루지 못하는데.”
“그럼 형옥주 곁에 비보전 사람이?”
“형옥주를 내보낼 때 단주님이 바로 붙인 것 같아요. 비보전이 붙어 있을 거라고는 전혀 몰랐네요.”
“단주님은 무슨…… 단주 놈이면 모를까.”
“풋! 가요.”
등여산이 매를 쫓아서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