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三章 풍문(風聞) (1)
불은 모든 흔적을 지운다. 산불이 지나간 곳에서 어떤 흔적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이거 완전히 재만 남았네. 이거 뭐 건질 건더기라도 있어야 뒤져보고 말고 하지.”
산불이 훑고 간 자리는 검은 재만 남는다.
산불이 만들어 낸 영향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시간을 죽인다는 데 있다.
산불이 어느 정도 꺼져야만 땅을 밟을 수 있다.
아직 잔불이 살아있더라도 어떻게든 땅을 밟을 수 있는 데만 하루는 족히 걸린다.
한시라고 급하게 뒤를 추적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다.
호발귀는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일행은 멍하니 산불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
“들어가 볼까?”
“어휴! 어림없어요. 저 연기 피는 것 좀 봐. 땅이 펄펄 끓고 있는데 어딜 들어가요.”
해자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해자수 말처럼 땅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여기저기 위험이 산재해 있어서 걸어 들어갈 수가 없다.
“천살단이 어디로 움직일 것 같아?”
“글쎄.”
등여산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등여산은 일행 중에서 그나마 천살단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등여산조차도 이번에는 속수무책이다.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이번 움직임의 주축은 사마다.
등여산도 사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사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형옥에서 사마를 봤을 때였다. 그전에는 천살단에 그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사마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이동한다’하는 것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혈마의 움직임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혈마는 사마에게 유인되고 있다.
하지만 우습게도 혈마가 사마를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사마가 혈마를 지켜본다.
엄밀히 말하면 사마를 조종하는 자가 혈마를 지켜본다.
평상시에는 혈마를 내버려 두고, 무엇인가 하고자 할 때만 사마를 사용한다.
등여산은 밀운을 통해서 사마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았다.
밀운이 알고 있는 것은 천원주가 알려준 것이다. 밀운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도 있다. 어쨌든 현재 밀운은 사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등여산에게 말해주었다.
“그럼 할 수 없네. 찾아봐.”
탁!
홀리가 해자수의 등을 때렸다.
“내가? 아니, 제가요?”
“찾을 수 있잖아.”
“노력은 해보겠는데, 이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 그리고 이런 걸 부탁하면서 뭐 당연하다는 듯이……”
홀리가 손을 들어서 귀를 후볐다.
“계속 말할 거야? 귀 따갑게?”
“끄응!”
해자수가 앓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눈빛에서 맑은 광채가 솟구쳤다.
이미 사방을 살펴보고 있다. 이미 모두 둘러봤지만, 다시 한번 정확하게 살핀다.
해자수는 이런 방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음문촌에서 해자수를 중원 간자로 선택했을 때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음문촌은 무공이 강한 자가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간자 선택의 기준도 무공이 아니다.
음문촌의 목적에 맞춰서 움직여 줄 자가 필요했고, 그 사람이 해자수였다.
“보자, 보자, 보자. 혈마는 미쳤단 말이지. 그러니까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막 움직인다는 말이야. 그러니 미친놈을 잡아끌려면 사마를 자유롭게……”
“해자수, 자꾸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릴 거야?”
“아, 그럼 미친놈을 미친놈이라고 하지 미친 분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내가 미치라고 한 것도…… 끄응! 아, 실수. 사과.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어휴! 이놈의 주둥이!”
해자수가 손을 들어서 자기 입을 탁 때렸다.
홀리가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입술을 꽉 깨물고 참는다.
홀리의 이런 모습, 처음이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절망 상태다.
살이 찢기면서도 웃던 여인인데…… 옆에서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아씨, 즐거운 소식.”
해자수가 홀리를 달래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뭔데?”
“호발귀가 움직인 방향, 찾았다면 웃으시려나?”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해자수의 말에 등여산과 홀리가 동시에 물어왔다.
해자수가 산불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기 뭐?”
홀리와 등여산은 해자수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그러나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해자수가 가리키는 곳에는 산불이 피어나고 있다. 계속 산불이 번져가는 곳이다. 계속 산불을 쫓아가자는 말인가? 어디로 번질지도 모르는데?
“아씨 말대로 우리 산불 속으로 걸어가게 생겼네요.”
“저기는 불이 꺼진 곳도 아니잖아? 저길 들어갈 수 있어?”
홀리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아이고, 아가씨도 참! 그럼 산불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아가씨 서방님 놓쳐요.”
“가는 길이 이곳밖에 없다면 가야지.”
홀리는 해자수가 가볍게 던진 농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직 지금 해야 할 일만 생각했다.
홀리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한지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호발귀가 여기로 갔다고 확신해요?”
등여산이 물었다.
“그러니까…… 호발귀가 지금 여기서 사람들을 죽인 게 이게 천살단 짓이란 말이죠. 이게 그러면은 왜 여기 있는 사람을 죽였을까? 이걸 생각해야지 되는데. 이건 아무래도 혈마를 시험하는 단계다.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단 말이죠.”
“본론만.”
홀리가 신발을 단단히 여미며 말했다.
“거 성미 한 번…… 말이란 게 앞뒤가 있는 법인데.”
“알았어. 말해봐. 들을게.”
“쩝! 일단 그렇게 가정을 하면 시험이라는 게 한 번으로 끝나면 안 되는 거고, 계속 이어가야 하는 건데, 그럼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살인할 것이다.”
“산불이 닿는 곳?”
“역시 책사님. 그렇죠. 이왕 산불을 일으켰으니까, 산불이 닿는 곳으로 혈마만 유인하면, 혈마는 죽이고 뒤따라온 산불이 흔적을 지워주고.”
“그런데 저긴 산불이 일어난 곳이잖아요?”
“아뇨. 자세히 보세요.”
해자수가 다시 손을 들어서 먼 산을 가리켜다.
산불이 진행하고 있는 방향이다. 먼 산 쪽에서도 희뿌연 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분명히 산불 연기다.
이 연기는 해자수가 처음 손짓을 할 때부터 봤다. 하지만 산불이 진행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무심이 흘려버렸다.
지금 다시 보라고 해서 보고 있지만, 여전히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그것을 해자수만 흘려보지 않았다.
“여기서 일어난 산불, 아직 저기까지 가지 않았어요. 그런 저기서 연기가 피어난다면……”
“산불을 또 일으킨 거야?”
“산불이 마냥 번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마중불 형태로 놓은 거죠. 마중불이라면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고. 제가 장담하는데, 저 마중불과 산불 사이에서 혈겁이 일어났을 겁니다. 빨리 가면 혈겁 현장을 볼 수가……”
“그럼 뭐해! 가야지!”
쒜에엑!
홀리가 대뜸 신형을 쏘아냈다.
홀리는 자신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직 산불이 꺼지지 않아 산속으로 뛰어들었다.
“나 참! 난 정말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사람이 어떻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쒜에엑!
해자수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금방 홀리의 뒤를 쫓아서 신형을 쏘아냈다.
쒜엑! 쒜에엑!
홀리는 전력을 다해서 질주했다.
“잠깐만!”
뒤에서 등여산이 불렀지만 홀리는 듣지 못한 듯 앞만 보고 치달렸다. 평소의 그녀라면 분명히 들었을 텐데…… 달리면서 딴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다.
등여산은 앞서서 달리는 홀리를 쫓아서 진력을 한층 강하게 끌어올렸다.
쒜엑! 쒜엑! 쒜에엑!
등여산은 곧 홀리를 따라잡았다. 그녀가 앞서 달리는 홀리의 어깨를 잡았다.
홀리가 힐끗 쳐다봤다.
등여산은 원래 홀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무공만큼은 홀리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새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확실히 형옥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사실, 이 정도의 혜택이라면 기연(奇緣)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녀만이 아니다. 형옥에 있던 일행 모두가 평생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기연을 만났다.
“좀 천천히 가.”
“왜?”
“호발귀가 이미…… 일이 이미 끝났다면, 지금쯤 천살단이 작업하고 있을 거야.”
“그럼 모두 죽여버릴 거야. 나, 말릴 생각 하지 마.”
“그러면 호발귀를 찾지 못해.”
그 말에 홀리가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췄다.
쒜에엑!
뒤늦게 따라온 해자수가 미처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두 사람을 지나쳐 앞으로 치달렸다. 그러다가 화다닥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꼬꾸라질 뻔했다.
“아이고! 이건 뭐 서면 선다 얘기나 좀 하든가.”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홀리는 해자수가 급하게 멈춰 선 것을 알았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뚫어지게 등여산을 보며 물었다.
“천살단 놈들은 죽이면 안 된다는 거야?”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호발귀는 저기 없어.”
“알아.”
“천살단 사람들…… 저기서 시신 정리를 끝내면 어디로 갈까? 계속 뒤를 살펴야 할 거 아냐?”
“호발귀를 쫓아서!”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홀리는 비로소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마를 조종하는 자는 천살단이 뒷수습을 완전히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혈마를 급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 앞뒤가 손발을 단단히 맞춰야 한다.
비교적 여유 있게 혈마를 조종하고 있다.
그러면 천살단만 뒤쫓으면 호발귀와 만난다는 말이 된다. 어차피 저들도 호발귀가 살인하는 장면을 지켜볼 것이다. 그래야 뒤를 정리할 수 있으니까.
잘하면 다음 혈겁 현장에서는 호발귀를 만날 수 있다.
“알았어. 천천히 갈게. 가.”
쒜에엑! 쒜엑! 쒜에엑!
세 사람은 여유를 갖고 신형을 쏘아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애꿎은 양민을 죽이는 거죠? 혈마를 조정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알 방법이 수없이 많은데.”
“그러게요.”
등여산이 쓴웃음을 흘렸다.
천살단이 왜 혈마를 계속 자극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막연한 추측으로는 혈마를 조종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저들이 혈마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세상은 바로 혈겁에 휘감긴다.
이백 년 전, 혈마를 조정하던 혈마후는 혈마가 진심으로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혈마를 죽일 수 있는 구혼음소까지 지녔지만, 결국은 쓰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혈마후는 혈마를 조정했고, 중원 절반이 피로 물들었다.
하물며 천살단이 혈마를 조정하게 되면…… 혈천방의 위험은 장난이 되어 버린다. 혈천방을 토벌한다는 핑계로 중원 마인을 쓸어버릴 것이다.
문제는 그 와중에 발생하는 애꿎은 죽음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천살단이 혈마를 악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문파가 있으면 당장 토벌될 것이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무인도 죽는다.
천살단이 혈마를 악용할 소지는 다분하다.
사마를 이용해서 혈마를 조정한다. 이 방법은 혈마후가 혈마를 조종한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또 사마로 유인하는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제 곧 이런 일은 멈추어진다.
밀운의 말을 빌리면 혈마는 발전하고 있다. 아니, 그녀들이 보기에도 발전하고 있다.
호발귀가 등여산과 함께 형옥 지하 사층에 내려갔을 때만 해도 호발귀는 사마를 쫓아다녔다.
사마를 끌어내지 못하고 직접 자신이 쫓아가서 죽였다.
만약 그 당시에 지금처럼 사마를 끌어들일 수만 있었다면 등여산이 검에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혈마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 이것을 놓치면 큰일 난다. 정말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쒜엑! 쒜에엑!
그들은 여유를 가지고 달렸다. 하지만 마음은 개미굴처럼 번잡했다. 아무리 여유를 가지려고 해도 금방 들끓어 오르는 급함 때문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