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二章 경고(警告) (5)
“저놈 되게 빠른데?”
당홍이 말했다.
해자수가 신형을 띄우자, 숨어있던 자도 바로 도주를 시작했다.
해자수가 자신을 노린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그래서 은신술도 쓰지 않고 바로 도주한다.
“그래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오면서 산화신법(散華身法)을 가르쳐 줬거든. 신이 나서 배웠는데. 지금 해자수 진력에다가 산화신법 육성이면 저 정도는 잡아요.”
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산화신법을?”
당홍이 놀란 표정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산화신법은 음문촌 검공인 산맥검법의 기초다. 산화신법을 수련하고, 산맥검법을 수련한 후, 최후 절공인 혈맥참으로 이어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이 움직이는 듯한 검공을 구사하는 최초 발판이다.
“이제는 해자수도 음문촌 사람이니까.”
홀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해자수에게 혈맥참까지 전수할 생각인 듯하다. 해자수는 무공에 큰 뜻을 품지 않았지만.
“저 사람이 펼치는 신법, 음사신법(陰蛇身法)이야.”
“음사신법?”
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음사신법은 음자(陰者) 신법으로 알려져 있다. 음자들이 사용하는 신법이다.
음자는 음병(陰兵)이라고도 한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귀신이다.
전원이 몰살당했는데 운 좋게 살아남았을 때 음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난 대장군이 죽었을 때, 음자들이 곡을 하고 사라졌다는 말도 있다.
음자는 그늘에 숨어서 남몰래 돕는 자들이다.
당금 무림에 음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없다. 하기는…… 음자의 특성상 무림에서 활동하고 있어도 존재를 전혀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나, 저 사람 누군지 알 것 같아.”
등여산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당연히 알겠지. 천살단 사람이니까. 그런데 천살단에 음사신법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어? 음자야? 천살단이 음자도 써? 음자는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에게만 국한된다는데, 맞아?”
당홍이 딱따구리처럼 따다닥! 몰아쳤다.
“음사신법…… 풋! 궁금하네. 말 안 해줄 거야?”
홀리도 물었다.
“밀운.”
“밀운? 천살단에 그런 사람도 있어? 본명은 아닌 것 같고?”
“별호일 거야. 나도 밀운이라는 것밖에는 몰라. 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우리를 형옥에서 꺼내준 사람이야. 내게 서신을 남긴 사람이고. 잡을 게 아니라 감사해야지.”
“아! 그 서신…… 그런데 왜 우릴 감시해? 그냥 나타나면 될걸? 이것도 음자 방식인가?”
홀리가 말했다.
등여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한 것은 본인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한다.
막연한 추측은 금물이다. 다만,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쫓아온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밀운은 혈마를 쫓아서 염창으로 가겠다고 목적지를 밝혔다.
그는 여기서 혈마 혈겁을 목격했다. 그리고 혈마가 떠난 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천살단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던 것이다.
등여산이 편백림에 있지 않고 나타난 것은 뜻밖이지만…… 밀운에게는 등여산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책사를 구출하라’라는 임무는 끝난 셈이다.
굳이 등여산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
‘천살단이 뒤를 정리하고, 우리가 나타날 때까지 공백이 있어. 몸을 빼낼 시간은 충분한데…… 밀운은 움직이지 않았어. 누구를 더 기다렸다는 건데, 설명이 필요해.’
등여산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밀운이 왜 이곳에 있을까?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밀운도 간과한 점이 있다. 등여산을 비롯한 다섯 명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몰랐다. 음자의 은신술을 간단히 파악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을.
그동안 지켜봤던 도천패나 책사의 무공이라면 자신을 절대로 발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인데.
만약, 이 사실을 진작 인지했다면 훨씬 더 멀리 떨어져서 지켜봤을 것이다.
밀운과 해자수의 추격전은 홀리 말이 맞았다.
밀운이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쳤지만, 해자수를 떼어놓지 못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이제 곧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
해자수와 밀운은 무공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밀운이 따라잡힌 것은 음사신법보다 산화신법이 훨씬 더 빨라서다. 사실, 음사신법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빠를 필요가 없다.
빠름에 치중한 신법과 은밀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법이 부딪친 셈이다.
하지만 싸움을 벌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음자의 칼은 음지에서 움직인다. 암수(暗手), 독수(毒手)가 주를 이룬다. 해자수가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돌출 공격이 툭툭 튀어나올 것이다.
두 사람의 무공이 비슷하다면 해자수가 불리하다.
등여산은 이런 점까지 고려해서 도천패에게 뒤를 부탁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시간이 없어서, 지켜보는 자를 빨리 잡기 위해서 부탁했다.
상대가 음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음자여서’라는 말로 바꿨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닥칠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매우 적합한 합공이다.
스읏! 스슷!
해자수가 쫓고, 앞쪽에서 도천패가 나타났다.
그러자 밀운은 도주를 포기했다. 순순히 두 손을 드는 것을 보면 항복 의사를 표시한 듯하다.
밀운은 등여산을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등여산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희 구해주신 거 알아요. 감사드려요.”
“절 본 적이 없으실 텐데, 용케 알아보셨습니다.”
밀운이 정중하게 말했다. 상전을 모시듯 허리까지 숙이면서 존대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몰랐어요. 음사신법을 보고 짐작했죠.”
“그것까지 보셨습니까?”
“밀운이라는 이름은 별호인가요?”
“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아!”
등여산이 처음 알았다는 듯 탄성을 토해냈다.
“저희를 구해주신 것, 천원주님 명을 받으신 거죠?”
“그렇습니다.”
“혹시 지금 여기서 기다리신 것도 천원주님 부탁 때문이 아닌가요? 저 때문에. 맞죠?”
“훗! 역시 책사십니다. 남들이 책사, 책사 할 때도 철없는……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저 철없는 아가씨 정도로 생각했죠. 제가 건방졌습니다.”
밀운이 허리를 다시 숙였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밀운은 묵묵히 품에서 서신 두 통을 꺼내 등여산에게 보여주었다.
한 통은 전해진 지 좀 오래되었고, 또 한 통은 얼마 전에 받았다. 두 통 중 한 통에서만 먹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 향세계선고혈마적탄생(向世界宣告血馬的誕生). 경고혈마적위험성(警告血馬的危險性).
세상에 혈마의 탄생을 알려라. 혈마의 위험성을 경고하라.
“아! 천원주님.”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천원주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밀운에게 밀마를 내릴 사람은 천원주밖에 없다. 음자는 오직 한 주인밖에 모시지 않는다. 그러니 밀운에게 전해진 모든 명령은 오직 천원주가 내린 것이다.
또 한 통의 서신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있다.
- 책사적전도일편칠흑(策士的前途一片漆黑). 도주후면(堵住後面).
책사의 앞날이 어두울 테니, 뒤를 막아라.
등여산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역시 천원주는 편백림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자마자 바로 밀운에게 이런 전서를 보낸 것이다.
“이 서신, 제가 가져도 될까요?”
등여산은 두 번째 서신을 밀운에게 보였다.
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여산은 서신을 접어서 품에 넣으며 말했다.
“혹시 호발귀가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호발귀는 추격 불가입니다. 무턱대고 쫓아가다가는 개죽음당할 겁니다.”
밀운이 암울하게 말했다.
“그래도 쫓아가 봐야죠. 뒤쫓을 단서가 있을까요?”
밀운이 손가락을 들어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 새, 전서구.
등여산이 빙긋 웃었다.
“역시 그 방법이 최고죠?”
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발귀는 사마를 뒤쫓고 있다. 그런 호발귀를 천살단 무인들이 뒤따른다. 호발귀는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면서 혈겁을 저지르는데, 그 뒤 청소를 해야 한다.
그러자면 호발귀를 어디로 유인할지, 혈겁 현장은 어떻게 지울지 끊임없이 본단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
당연히 전서구가 끊임없이 오간다. 그중에 몇 개만 낚아채도 호발귀의 목적지를 알 수 있다.
“지금 호발귀는 어느 쪽으로 갔어요?”
“산청(山淸) 쪽으로 갔습니다. 사마가 서둘지 않는 것을 보면 혈겁 범위를 넓힐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쫓아가셔도 충분할 겁니다.”
밀운이 말했다.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아뇨. 책사님 무공이 저를 능가하니, 제가 따라가는 건 오히려 짐만 될 겁니다. 그럼 전 지금부터 안심하고 이 일에 매달릴 생각입니다.”
밀운이 첫 번째 전서를 들어 보였다.
혈마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다.
천살단은 혈마를 숨긴 채 움직이고 있는데, 이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다.
자칫하면 밀운은 천살단의 추격을 받을 것이다.
밀운은 혈마 탄생을 알리면서 혈마가 저지른 혈겁, 그리고 혈마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동향까지 소문낼 생각이다. 그래야 천원주가 원하는 대로 애꿎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 미리 소문을 듣고 몸을 피할 테니까.
“이거…… 알릴 방법은 있어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밀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하게…… 아니다. 밀운의 속마음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천살단 소식망, 쓰지 못하죠?”
“……”
물으나 마나 한 소리다.
밀운은 완전히 홀몸이다. 음자는 주인을 정하면 주인 명만 받는다. 그래서 천원주가 도와주지 않는 한, 밀운 혼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무척 벅차다.
밀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소문을 내는 것이다.
천원주는 그런 점을 알면서도 밀운에게 전서를 보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일에 매달렸을까.
등여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천원주의 마음을 읽었다.
“하오문(下午門)을 써보는 건 어때? 그놈들 입소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내는데.”
도천패가 불쑥 말했다.
밀운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하오문을 쓰면 소문은 빨리 날 것이다. 하지만 밀운은 하오문에 연줄이 없다.
“하오문을 움직이기가 쉽나.”
당홍이 다소 핀잔 조로 말했다. 말하나 마나 한 말은 하지 말라는 투로.
“내가 소문을 내봐? 어때요? 내가 내볼까요?”
도천패가 등여산을 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소문을 어떻게 낸다고 그래! 모르면 입이나 다물고 있지.”
이번에도 남들이 말하기 전에 당홍이 먼저 말했다. 도천패의 입을 다물려는 것이다.
도천패는 무공만 쓸 줄 알지 이런 일에는 젬병이다. 할 줄 아는 것은 힘자랑밖에 없다. 그런데 무슨 수로 소문을 낸다고 자신 있게 말할까.
도천패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당매, 당매는 내가 투심문 사람인 거 잊었어?”
“아! 투심문!”
“이런 소문은 하오문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지. 나도 뭐 대장간에 틀어박혀서 쇠만 두들겼으니 하오문에 닿는 연은 없고…… 하지만 하오문을 움직이는 방법은 알지. 돈.”
“아휴! 우리에게 돈이 어딨어? 돈이 있으면 어디 가서 따뜻한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싶다.”
당홍이 말했다.
“나도 돈은 없어.”
“그런데 무슨……”
“나는 돈이 없는데 호발귀에게는 엄청난 돈이 있다면?”
모두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투심문! 투심문에는 돈이 쌓여 있다. 그동안 역대 문주가 도둑질해서 모은 금은보화가 한 곳에 소장되어 있다.
“내 문주놈 눈만 살짝 속이면 따뜻한 국수가 아니라 기름진 고기도 매일 먹게 해줄 수 있는데.”
도천패가 당홍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거 제가 책임질게요. 써주실 수 있으세요?”
등여산이 말했다.
“문주놈이 나중에 뭐라고 안 하겠죠?”
“뭐라고 하면 제가 혼내줄게요. 우리 둘이 혼내면 그 투심문주인가 뭔가 하는 사람 꼼짝 못 해요.”
홀리가 거들었다.
“아! 내가 이거 투심문만 욕먹게 하잖아? 문주놈 야단맞게 하면 안 되는데. 에잇!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이 친구하고 하오문을 움직일 테니까.”
도천패가 밀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나도 같이 가. 나…… 같이 가도 될까?”
당홍이 등여산을 쳐다봤다.
“호호! 그럼요. 바늘 가는 데 실도 어떻게 안 따라가요. 같이 가야죠. 호호호!”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