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二章 경고(警告) (4)
“어? 이게 뭐지?”
이상징후는 해자수가 제일 먼저 알아챘다.
“왜?”
홀리가 해자수를 보며 물었다.
해자수는 달리던 걸음까지 멈췄다. 그리고 눈살을 잔뜩 좁히고 하늘을 쳐다봤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은데. 어디서 아주 큰불이 난 것 같아.”
모두 해자수를 쫓아서 하늘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였다. 단지 하늘이 좀 뿌옇다는 느낌뿐인데, 날이 흐려서 구름 낀 날도 많으니까…… 하늘만 보고는 불이 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홍도 곧 이상징후를 알아챘다.
“산불 맞아. 아주 큰 불인 것 같은데.”
당홍은 냄새로 알아챘다.
장작 타는 냄새는 다른 사람도 곧 맡았다. 바람을 타고 나무 타는 냄새가 솔솔 전해져 왔다.
“불은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까지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아주 큰불이야.”
당홍도 해자수가 보고 있는 하늘을 쳐다봤다.
“저쪽에서 불이 난 것 같은데…… 가만! 우리가 가는 쪽이네. 그럼, 저기가?”
홀리가 해자수를 쳐다봤다.
“저기가 바로 염창이오. 염병할!”
해자수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모두 깜짝 놀라서 아연실색했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입을 벌리기도 했다.
산불이 염창촌이라는 마을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호발귀가 저곳으로 갔다. 그런데 하필 저곳에서 불이?
염창촌 부근에서 산불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저 산불은 분명히 염창촌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저거 흔적 지우는 거 맞지?”
홀리가 물었다.
등여산은 고개만 끄덕였다.
혈겁은 벌써 벌어졌다. 아니, 뒷수습으로 흔적을 지우는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저 짓 하는 놈들, 누굴 것 같아?”
홀리가 물었다.
혈마의 살겁을 지우는 자들, 이 자들은 천살단의 일원이다.
누가 흔적을 지우고 있을까?
혈마가 혈겁을 일으켰다면, 그 현장은 분명히 좋지 않을 것이다. 염창촌에서 혈겁이 일어났다면 죽은 자들 전부가 주민이다. 민간인이 이유 없이 떼로 살해당했다.
정도 무인이라면 불로 태울 것이 아니라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 흉수를 찾아야 하지 않나. 흉수가 혈마라면 만천하에 혈마 짓을 알려야 한다.
혈마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 그것이 정도 문파가 할 일이다.
이렇게 흔적을 지우는 짓은 혈천방이나 할 짓이다.
홀리는 그걸 묻고 있는 것이다. 혈겁을 지우는 자들, 혈천방과 같은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자들이 누구냐? 어떤 조직이냐? 아는 놈들이냐?
“일단 가봐야겠어.”
등여산이 말했다.
타타닥! 타닥! 타닥! 타닥!
산불 소리가 매우 거세게 울린다.
마치 들판에서 천군만마가 치달리면서 병장기를 부딪칠 때처럼 요란하다.
팡! 파아앙! 팡!
산불이 공기를 압축시켰다가 터뜨리는 소리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산불이 일어난 곳은 전쟁터를 능가한다.
“아!”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야?”
그들은 염창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산불이 잔뜩 겁을 준다.
산불은 매우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 이미 염창촌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앞산에서 일어난 불이 염창촌을 집어삼키고 뒷산을 태우는 중이다.
앞산에 있는 불도 아직 꺼지지 않았다. 활활 타오른다.
염창촌이 앞산과 뒷산 사이에 끼어서 불의 통로 역할을 한다. 화염지옥이다.
“아! 저 사람들 어떻게!”
당홍이 발을 동동 굴리면서 소리쳤다.
염창촌에 산 사람은 없다. 혈마가 지나갔다면 닭 한 마리 생존하기 힘들다.
그걸 알면서도 염창촌에서 불에 타 죽는 사람들이 안쓰러운 것이다. 아니, 시신들이.
“휴우!”
도천패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어쩌나. 이번 일을 벌인 사람이 바로 호발귀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제정신이 들어왔을 텐데, 아직도 혈마가 되어서 날뛰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혈마에게는 구혼음소도 듣지 않는다. 구혼음소를 읊으면 반야심경으로 바꾸고, 바뀐 반야심경을 호발귀 자신의 주문으로 바꿔 듣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간신히 제정신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쪽에서 아무리 구혼음소를 읊어도 반야심경이 일어나지 않으면, 호발귀가 자신만의 주문을 들을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호발귀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 불길한 사례가 형옥에서 일어났었다.
홀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구혼음소를 읊었는데, 호발귀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형옥에서는 주먹을 사용했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칼이 쓸지 검을 찌를지 아무도 모른다.
형옥에서는 아끼던 사람들을 알아봤지만 지금 상태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등여산이 나서도 칼을 쓸지 모른다.
“어떻게 할 거야?”
홀리가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등여산이 되물었다.
“불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 봐야지. 만약에 여기 남겨진 흔적도 형옥에 남겨진 것과 똑같다면…… 휴우!”
홀리가 말을 잊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호발귀 앞에 선 사람은 모두 죽는다.
호발귀가 건드는 것은 진기가 아니다. 생기다.
중원 대다수 사람은 ‘생기’ 자체를 모른다. 생기를 말하면 그게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진기와 생기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인간은 공기를 마시면서 산다.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무인은 공기를 받아들여서 진기를 양성한다.
하지만 무인이 양성하는 진기는 공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이나 영약도 진기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그런데 혈마록으로 들어가면 이 모든 고정관념이 철저히 무시된다.
공기는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산다.
그러면 공기는 어떤 존재인가? 운반체다. 우주에서 생성된 기운을, 실제로 사는데 필요한 어떤 물질을 날라다 주는 운반체가 바로 공기다.
그러니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가 아니라 ‘공기가 날라다 주는 물질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가 되는 것이다.
이 물질이 바로 생기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기운…… 생기다.
이 기운이 차곡차곡 쟁여지면 활력이 샘솟는다.
이 기운이 흩어지면 기운이 쇠락한다. 젊은 사람은 공기를 마실 때마다 많은 양의 생기가 흘러들고, 노쇠하면 숨을 부지런히 쉬어도 흘러드는 양보다 빠져나가는 양이 많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등여산과 홀리 아니, 호발귀에게 생기격타를 당한 사람들은 똑똑히 안다.
생기격타를 당하면 전혀 진기가 흔들리지 않는다.
몸에는 아무 흔들림이 없는데 갑자기 힘이 불쑥 솟구치는 느낌이 든다.
진기를 정말로 정심하게 수련한 사람처럼 강해진다.
진기를 담는 그릇은 단전이다.
예전 그릇이 간장 종지만 했다면 생기격타를 당하고 나면 국그릇만 하게 켜진다.
작은 종지에 담겼던 진기가 갑자기 큰 사발로 옮겨지고 가득 채워진다.
힘이 펑펑 솟구친다. 이 상태라면 정말로 하늘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다.
진기가 확 불어난 느낌은 생기격타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호발귀는 진기보다 훨씬 상위의 것을 건드린다.
호발귀의 살검은 일반인에게나 고수에게나 똑같이 작용한다. 무인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진기인데, 진기를 건드리지 않으니 대응 방법이 없다.
어떤 신공도 어떤 마공도 무용지물이다.
“하아!”
홀리가 답답한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타닥! 타닥!
큰불이 지나갔다. 하지만 작은 불이 여전히 남아서 나무를 계속 태우고 있다.
등여산은 후끈한 열기로 휘감긴 마을로 들어섰다.
“어휴! 이거 뜨거워서 들어갈 수가 있나.”
해자수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불티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살을 태울 듯 뜨거운 열기가 몰아쳐 왔다.
공기가 후끈거려서 숨을 쉬기도 답답했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장작 타는 냄새만 가득하다.
산불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 전부를 태웠을 텐데, 사람 타는 냄새는 깨끗이 지워지고 없다.
오직 나무 타는 냄새만 온천지를 휘감는다.
“아!”
등여산이 탄식했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새카맣게 변한 땅을 발견했다.
산불이 혈흔을 태운 자국이다. 불길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검은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의 시신은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완전히 타버린 시신도 있고, 타다가 말아서 아직 인간 형체를 띠고 있는 것도 있다.
대부분 집에서 뛰쳐나가 나오다가 당한 모습이다.
등여산은 오직 마을 입구에 있는 검붉은 땅만 쳐다봤다. 마을 사람들은 살펴보지 않았다. 홀리도, 도천패도, 당홍도…… 검붉은 땅만 쳐다봤다.
살겁은 이곳에서 일어났다. 바로 이곳에서 마을 사람 전부가 혈마 손에 죽었다.
시신이 흩어져 있는 것은 천살단 작품이다.
저들을 살펴봐도 시신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한다. 검이 닿은 곳에는 불붙기 좋은 마른 잎이나 장작, 혹은 소량의 화약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살해 흔적은 다 타버리고 없다.
천살단은 은폐 작업을 치밀하게 한다.
“형옥도 이렇게 되어 있었어?”
등여산이 물었다.
“응. 이거하고 똑같아. 후유! 크기도 비슷해. 혈흔 자국이…… 형옥 무인이 쉰 명이라고 했지? 그러면 여기서 살해당한 사람도 거의 쉰 명은 될 것 같네.”
“사람을 검 앞으로 끌어왔다는 거네?”
“맞아. 검 앞으로.”
“최면일까?”
등여산은 최면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녀도 생기격타를 반대로 작용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생기를 이롭게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아예 대응할 방책이 없으니 애써서 부정해 본다.
“생기겠지. 생기를 건드려서 끌어오는 거야. 최면하고는 차원이 달라. 언니, 혹시 이런 경우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요? 지나가는 이야기라도.”
홀리가 당홍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독은 많이 알지만 생기는…… 이런 걸 건드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생기 같은 거,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어. 진기를 활용하는 것도 벅찬데, 그 이상의 것을. 할머니라면 모를까 나는 전혀 모르겠네. 미안.”
도천패가 괜찮다는 당홍의 어깨에 손을 얹고 꽉 껴안아 주었다.
“자자, 여기서 궁상떨어봤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이럴 때는 술 한잔 마시는 것도…… 안 되나? 그럼 호발귀를 쫓아가야지. 뭐 이러고 있는다고 혈마가 호발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자자! 기운들 내고.”
해자수가 말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할까?”
해자수가 등여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처에 사람이 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해자수가 알아낼 정도이니 별 볼 일 없는 자일까? 아니다. 지금 해자수는 능이 일류고수 반열에 올라섰다. 옛날에 허우적거리던 해자수가 아니다.
“한 명이에요. 일단 잡죠.”
등여산이 말했다.
“내가 해?”
해자수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홀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어지간히 무공 쓰고 싶어서 안달 났나 보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싸우고 싶어 할까?”
“에이! 아가씨도 참. 내가 언제 싸우고 싶어서 안달 났다고. 진짜 아가씨는 날 좀 존중해야 해. 내가 얼마나 아가씨를 위해서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니는데.”
“그냥 맡기면 좋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저 사람, 은신한 모습을 보니까 신법이 꽤 뛰어날 것 같아요. 토끼몰이하죠. 앞에서 쫓고, 뒤에서 막고. 도와주세요.”
등여산이 도천패를 보며 말했다.
도천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나 혼자 해도 되는데.”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토끼몰이가 어디냐는 듯 재빨리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