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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258화 (258/500)

第六十二章 경고(警告) (3)

등여산은 허리춤에 꽂힌 서신을 읽었다.

‘밀운?’

자신을 구한 사람이 밀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등여산은 밀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지 짐작은 한다. 천원주가 숨겨둔 비밀 호법일 것이다.

천원주에게 비밀 호법이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밀운이 남긴 서신 덕분에 호발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도 알았다.

‘염창……’

서신만 읽었어도 염창에서 부는 피바람을 느낄 수 있다.

혈마가 사마를 쫓아서 염창으로 갔다면 틀림없이 혈검을 일으킬 것이다.

이미 중원의 혈마의 저주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등여산은 서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죽을힘을 다해서 쫓아간다고 해도 혈마의 저주를 막을 방법은 없다.

오히려 정반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어설프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완벽하게 움직여야 한다. 혈마를 어떻게 되돌릴지 확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밀운은 편백림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 호발귀를 뒤쫓아서 염창촌에서 벌어진 일을 확인한 다음에 그곳으로 오겠다고 친절하게 글을 남겨놨다.

“등 좀 빌려주실래요?”

등여산이 말했다.

도천패가 냉큼 달려와서 등을 내밀었다.

“언니. 언니 여기서 기다려줘요. 홀리가 다녀와서 아무도 없으면 당황할 거예요.”

“어디 가게?”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밀운이라는 천원주님 호법인데, 소식을 남겨놔야겠어요.”

“조심하고.”

당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삼십 장 정도 쭉 가셔서 왼쪽으로 꺾으세요.”

쒜에엑!

도천패는 등여산이 말하는 대로 신형을 쏘아냈다.

등여산은 편백림으로 왔다.

편백림에는 산책하다가 쉴 수 있게끔 곳곳에 의자를 만들어놨다.

편히 드러누울 수 있는 평상도 있다. 숲 안쪽에는 기와를 얹은 정자도 있다.

물론 천살단 무인들은 편백림 안에 정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박!

등여산은 정자 위로 걸어 올라갔다.

정자 안에는 지필묵이 있다. 서책도 있다.

다기(茶器)도 있고, 바둑판과 바둑돌도 있다. 천원주가 편히 쉬면서 휴식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쉴만한 것이 많다.

밀운이 편백림으로 가라고 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쉬고 있으라는 말이다.

스읏!

등여산은 붓을 들고 천원주에게 전하는 서신을 남겼다.

혈(血), 추(追).

단 두 글자다. 피를 쫓는다. 혈마를 쫓는다는 뜻이다.

천원주와 밀운은 두 글자에 내포된 의미를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이 글자를 보면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도 안다. 더 이상 안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천원주가 아니었으면 천살단에 오지도 않았다.

천원주가 직접 방주의 명을 들고 찾아왔기 때문에 방문했다. 그리고 여지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하지만 등여산은 천원주가 이번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천원주는 그럴 분이 아니다. 자기 가슴에 검을 틀어박히는 모습을 지켜볼 분이 아니다.

모든 상황이 천원주도 그녀를 등졌다고 말하지만, 등여산은 절대적으로 천원주를 믿는다.

설혹 이번 일에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해도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이 마음졸일까 봐 두 글자를 남겨놓는다

등여산은 서신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황동 문진으로 종이를 꾹 눌러놓았다.

등여산은 볼일을 마치고도 한참 동안을 정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야. 이곳에 두 번 다시 오기 힘들 거야. 어쩌면 살아서는 마지막일지도.’

등여산은 편백림의 곳곳을 눈에 담았다.

천원주의 손을 잡고 병법을 말하면서 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떤 이야기를 해도 부드러운 미소로 받아주셨는데.

“가요.”

등여산이 나왔다.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죠?”

도천패가 나직이 말했다.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가요.”

등여산도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떠나자고 말한다.

지켜보는 사람이 천살단 무인이면 바로 추격을 받을 텐데, 태연히 떠나자고 한다.

도천패가 등을 내밀었다.

쉬이이익!

도천패가 신형을 날려서 편백 사이를 바람처럼 치달렸다.

“아는 분?”

도천패가 나직이 물었다.

“천원주님이에요.”

“아! 그럼 인사라도……”

“지금은 서로 안 만나는 게 나아요. 나중에, 나중에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

천원주가 등여산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원주 정도 되는 고수면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뭇잎이 수북이 쌓인 곳을 걸어도 일절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도천패와 등여산은 그녀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만큼 무공이 탁월해졌다.

쒜에에엑! 쒜에엑!

도천패는 호랑이가 들판을 질주하듯이 매우 빠르게 신형을 쏘아냈다.

신법을 펼치는 게 재미있어서, 이토록 빨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더욱더 빠르게 질주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다행.’

천원주는 빙긋 웃었다.

밀운의 전서를 받고 등여산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편백림으로 보냈다는 글도 읽었다.

편백림에는 등여산 외에도 속칭 ‘혈마 무리’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단다.

독기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살며시 들어와서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등여산이 무사하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하다. 멀리서 본 것이지만, 혈색도 좋아 보인다.

가슴 상처가 심해서 사내 등에 업히는 것일 터이고…… 내상은 없어 보인다.

‘내가 너를 괜히 오라고 해서…… 건강해라.’

천원주는 발길을 돌렸다.

사박! 사박!

그녀는 진기를 풀었다. 더는 발자국을 숨길 필요가 없다. 이미 떠난 것을 보았으니.

* * *

“허허! 너무 과장되지 않나. 혈마가 신도 아니고…… 혈마 무공 속에 사법이 섞인 것이겠지.”

천살단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입은 걸레지만 쉰 소리는 하지 않잖아. 사법도 아니고, 최면도 아냐. 혈마 그놈은 뇌를 조정해. 아니, 이건 뇌도 아니고…… 좌우지간 뇌를 조정하는 것보다 더 강력해.”

괴마 하구량이 말했다.

“허허! 단단히 겁먹었군. 자네 이런 모습, 정말 오랜만인데? 자네 같은 사람도 겁이라는 걸 아는군그래.”

“이봐. 지금 혈천방은 내가 만든 사마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귀검이고 뭐고 다 눌러 버릴 수 있다니까. 그러니까 호발귀는 죽여야 해. 혈마는 죽여야 한다고.”

하구량은 혈마 참살을 강력히 요구했다.

혈마를 죽일 수 있는 무인은 없다. 막말로 천살단주와 혈천방주가 합공해도 죽이지 못한다.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겠지만, 괴물로 변한 자는 못 죽인다.

혈마를 죽이려면 함정으로 유인해야 한다.

곰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사슴을 잡기 위해서 올무를 놓듯이 혈마를 낚을 수 있는 함정만 준비하면 된다.

혈마도 피와 살로 이루어졌으니 죽일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사마, 또 만들 수 있나?”

“재료만 충분하면……”

“재료보다는 시간이겠지. 어린놈을 데려와서 몸을 정화해야 하고, 이지를 망각시켜야 하고…… 난 여기까지밖에 모르는데, 할 게 참 많지?”

천살단주가 웃었다.

인간을 데려다가 혈마로 개조하려면 정말로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멀쩡한 인간을 정신없는 괴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못해도 족히 이십여 년은 걸린다.

“만드는 법을 알았으니까, 혈마라면 몰라도 사마라면 만들 수 있지. 킥킥! 이것만 해도 획기적이지 않아? 사마를 열 놈만 만들어도 혈천방 따위는 발붙이지 못해. 날 믿으라고.”

“지금 혈마를 만들기 시작하면 글쎄…… 죽기 전에 완성이나 보려나? 내가 보기보다 많이 늙었거든.”

“일이 년 안에 반드시 만들어내지.”

허풍이다. 사마를 만들 방법은 있지만, 일이 년 안에 만들어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마를 만드는 법을 후세에 남긴다? 왜?

천살단주는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만 원한다.

죽은 후에 호발귀 같은 혈마 천 명이 만들어진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한다.

“차 들지.”

천살단주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홀짝 마셨다.

“혈마 저놈은 지금 죽여야 한다니까. 저놈이 가장 두려운 것은 진화야. 점점 강해지고 있어.”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다시 한번 물어보겠는데. 호발귀, 어떻게 연구할 수 없을까? 잘하면 호발귀를 조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괴마 하구량이 멍한 표정으로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네놈 지금……!”

괴마 하구량의 머릿속에 얼른 한 생각이 흘러갔다.

천살단주는 처음부터 혈마 제조를 믿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혈마를 만들든 그것은 가짜일 것이라고. 생기를 다루는 혈마는 오직 혈마록이 만든 혈마뿐이라고.

혈마와 비슷한 마인은 만들 수 있지만, 혈마는 아니다.

- 이놈은 혈마와 몇 합이나 싸울 수 있을까?

- 정말 혈마가 이놈 생기를 못 읽을까? 나는 읽지 못하겠지만 혈마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뭐 이렇게 많이 만들어? 진짜 혈마라면 한 놈이면 되는 거 아냐? 이백 년 전 혈마는 하나뿐이었는데도 중원 반이 쓸려나갔어. 혈마보다는 못한가 보지?

당시에는 무심이 지나쳤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말에 불신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천살단주는 사마 백 명보다는 혈마 한 명을 원한다.

괴마가 만들어 낸 사마를 이용해서 혈마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혈마 호발귀를 죽이는 일이나, 새로 사마를 제조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키키키! 이제 네 놈 속을 알았어. 엉큼한 줄은 알았는데. 원하는 게 뭔지 알겠는데, 안 돼. 멀쩡한 호랑이라면 잡아서 길들일 수라도 있지. 저건 미친 호랑이야. 완전히 미쳐서 우리에 가둬놔도 발광하고 울부짖다가 죽을 놈이라고. 킥킥!”

“후우!”

천살단주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단주는 고민이 깊은 듯 손으로 턱을 잡고 잠시 주변을 서성거렸다.

“고민할 필요 없어. 일단 혈마는 죽이고, 사마를 이용해서 혈천방을 쓸어버려. 그동안 난 사마를 만들 테니까. 딱 이 년이면 쓸만한 놈을 만들 수 있다니까!”

천살단주가 괴마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괴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형옥은 이번에 발각됐고, 어디서 하려고?”

“장소야 뭐 구하면……”

“아니, 그동안 지하에서 고생 많았는데 자네도 좀 쉬어야지. 자네가 만든 사마라는 것, 혈마에게 언제 잡혀 죽을지 몰라서 전전긍긍할 정도라면 또 만들어서 뭐 하게?”

“그러니까 혈마만 죽이면……”

괴마는 말을 잇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서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어깨 뒤, 천종혈(天宗穴)과 곡원혈(曲垣穴)에서 강한 압박을 느꼈다. 그리고 전신이 자르르 저린다 싶더니, 이내 사지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혈도를 통해서 천살단주의 진기가 침습했다.

진기는 창이 되어서 밑으로 내리꽂힌다.

허리에 있는 소해혈(小海穴), 골반 위 지정혈(支正穴)까지 단숨에 뚫어버렸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거 안 풀어, 이놈아!”

“곁에 좋지 않은 친구를 두는 게 아니라던데, 그 말이 딱 맞아. 자네를 옆에 둔 후부터 계속 안 좋은 일만 생겨. 무엇보다 친구랍시고 이놈 저놈 하는 네 입도 마음에 안 들고.”

“으음!”

괴마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어깨에 올려진 손이 목을 휘감더니 목젖 옆에 있는 천정혈(天鼎穴)을 꾹 눌렀다.

‘헉!’

괴마는 성대마저 마비되어서 비명을 쏟아낼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벙어리가 된 듯 모든 말이 목젖 아래로 가라앉았다.

“죽이진 않을 거야.”

툭툭!

단주가 손을 떼고 괴마에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사람은 원래 살던 곳에서 살아야지. 지하에 살던 사람이 땅 위를 걸어 다니면 안 돼. 자네를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보낼 거네. 거기가 좋지?”

형옥 지하 사층을 말한다.

철문까지 다시 복원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금역이 된다.

지금까지는 혈마를 만드는 최고의 비밀 장소였지만, 이후에는 괴마를 가두는 장소가 될 것이다.

“아! 혹시 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적어두고. 자네가 적은 것을 보고 감동이라도 받으면 혹시 알아? 옛친구로 다시 지낼 수 있을지.”

‘사마 운용법을…… 괜히 알려줬어.’

괴마는 끝없이 자책했다.

형옥주에게 사마 운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감히 자신을 가둘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 운용법을 알려준 순간, 자신의 용도는 폐기되었다.

괴마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천살단주를 쏘아 봤다.

“그렇게 쏘아볼 거 없어. 원래 정사(正邪)는 공존할 수 없는 법이야. 그러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천살단주가 괴마 하구량의 어깨를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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