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一章 혈행(血行) (5)
“키키킥! 키킥!”
혈마가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혈마를 향해 다가왔다. 자신들 스스로 죽으려고 다가오고 있다.
쒜에에엑!
혈마는 사정없이 그들을 베었다.
어린아이, 여자, 노인…… 가리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그들 중에는 쟁기나 낫을 들고 저항하는 자들도 있다는 점이다.
‘저항? 대들어?’
밀운은 눈을 끔뻑거렸다.
맥없이 끌려오기만 한다면 강력한 최면(催眠)이나 최혼술(催魂術)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데 저들은 대항한다. 죽음의 공포를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마을 주민 중 일부는 처절하게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휘두른다.
그렇다면 저들은 최면이 걸린 게 아니다.
몸에 동아줄을 묶어 놓고 강제로 끌어당기듯이 질질 끌려오는 것과 같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혈마는 어린아이를 죽이면서도 혈마도법을 시전했다. 혈마 같은 무인이 어린애 한 명 죽이면서 최선을 다할 이유가 있나? 없다. 습관적으로 혈마 무공을 떨쳐내고 있다.
그것도 전력을 다해서 떨친다.
이제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전력으로 쳐낸 혈마도법을 맞고 죽었다.
언뜻 보면 매우 당연해 보인다.
혈마의 모든 움직임은 혈마 무공에 기초한다.
혈마도법, 마영심도, 구뢰마권…… 하나같이 악랄하고 잔인한 무공이다. 그런 무공이 걸으면서도 사용된다.
그런 무공이 마을 사람을 죽이는데도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지금 혈마는 무공이 강한 사람이든, 전혀 모르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공격한다. 눈앞에 갓난아기가 있어도 십 성 공력으로 혈마도법을 펼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밀운도 그런 점을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지금 혈마에게는 단순히 길을 걷는 행위조차도 전투다. 평범한 들판을 걸으면서도 마형귀적이라는 신법을 펼친다.
밀운이 이상하게 보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혈마가 일상생활을 혈마 무공으로 대체한다면 그만큼 진기 소모가 많아야 한다.
일반 무인이 혈마처럼 움직인다면 반 시진도 안 되어서 진기가 고갈되어 버린다. 기력이 탈진해서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혈마는 왜 멀쩡한가? 왜 펄펄 날뛰나.
이게 이상했다.
일상의 움직임이 진기로 이루어진다. 손짓, 발짓이 모두 혈마 무공에 기초한다. 이 정도로 진기를 사용한다면 벌써 나가떨어졌어야 하는데, 혈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정반대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혈마의 검초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혹시…… 생기를 흡취해서? 상대방을 죽이면서 생기를 흡취하는…… 그렇다면 혈마에게 사람은 먹이야. 반드시 먹어야 하는 먹잇감인 거야.”
밀운이 중얼거렸다.
배를 채우는 것만이 먹이가 아니다. 진기, 생기를 보충하는 것도 먹이다.
“아!”
급기야 밀운은 절망 섞인 탄식을 토해냈다.
혈마를 상대할 방법이 전혀 없다. 혈마를 외딴 골짜기 같은데 몰아넣고 아예 산 전체를 무너뜨리면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수지로 유인한 다음에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혈마가 도주하지 못하게 묶어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런 방법이 아니고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다.
밀운은 무거운 마음으로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이 본 바를 하나도 남김없이 적었다.
* * *
괴마는 입을 쩍 벌렸다.
“아! 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탄식뿐이다.
혈마가 염창 주민들을 죽이는 모습, 똑똑히 봤다. 한 명, 한 명 검 앞으로 끌어들인 후에 참살한다.
주민은 알면서도 도주하지 못한다.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사정도 하고 욕지거리도 한다. 하지만 어김없이 참살당한다. 누구도 요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괴마는 망연자실했다.
‘저놈…… 저놈……’
이건 책으로 읽고, 귀로 들은 혈마가 아니다. 짐작하고 있던 혈마가 아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선다.
저놈은 미쳐도 아주 상(上)으로 미친놈이다.
혈마는 사람의 행동을 조절할 줄 안다. 그렇다면 신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신은 아닐지라도 사람을 죽이는 능력만큼은 거의 신에 가깝다.
저런 놈을 어떻게 만들어내나.
저런 혈마는 만들어내지 못한다.
더욱이 혈마는 점점 더 발전한다. 지금 보고 있는 혈마는 형옥에서 봤던 혈마가 아니다. 상당히 다르다. 뭐라고 할까? 삼류 검객이 일류고수가 되었다는 느낌?
혈마는 지하 사층 형옥에서 사마를 죽일 때까지만 해도 저런 식의 검을 쓰지 않았다.
사마는 도주하고, 혈마는 쫓아갔다. 사마는 죽을힘을 다해서 사층을 빙빙 돌았고, 혈마는 그런 사마를 쉽게 잡지 못했다. 부지런히 쫓아갔다.
덕분에 괴마가 등여산을 움켜잡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상대방을 자신의 검 앞으로 끌어당겨서 죽이다니!
어느 미친놈이 자신을 죽일 칼 앞에 몸을 들이미나!
최면을 이용한 사법인가?
보천화상(寶天和尙) 같은 자가 최면을 이용한 사법으로 세상을 미혹했다.
검첨이 순식간에 일곱 개로 불어난다는 칠첨환검(七尖幻劍)도 최면을 이용한 검초다.
모두 순간적으로 정신을 홀리게 만드는 사법이다.
최면을 길게 이어갈 수도 있다. 미혼산(迷魂散)을 이용하면 집단 최면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모든 사법에는 공통점이 있다. 최면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행동을 일으키지만, 의식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다.
혈마에게 당한 사람들은 의식이 또렷하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질질 끌려왔다.
세상에 이런 살법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직접 보고도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건 사마로도 안 돼.’
괴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사마가 혈마를 유인하고 있다.
사마가 보이면 쫓아가고, 안 보이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죽인다. 계속 이런 식으로 유인하면 혈마를 목적한 곳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혈천방으로 보내서 싹 쓸어버리는 것이다.
아니, 이 생각은 잘못되었다. 아주 큰 오판이 생각 한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자가 발전!
이 부분을 간과했다.
혈마는 곧 사마를 잡아낼 것이다.
지금 혈마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사마를 잡기 위한 방책인지도 모른다. 마냥 쫓아가는 것보다 사마가 검 앞으로 걸어오게 만드는 것이다.
혈마의 본능이 사마를 잡으려면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지금, 형옥 무인과 염창 주민들에게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마를 끌어당기지 못하지만, 이 방법에 조금만 더 능숙해지면 충분히 사마를 끌어당긴다.
그다음은 생각하기도 싫다.
사마가 혈마 앞에 나타나는 순간 사마는 질질 끌려갈 것이다.
혈마를 유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혈마에게 끌려간다. 그리고? 죽는다. 칼 대 칼로는 혈마 상대가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사마까지 당한 후에는 어떻게 되나? 혈마를 조종할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은 혈마 천하가 된다.
‘저놈은 죽여야 해.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괴마는 혈마의 진짜 모습을 본 후, 기가 질려버렸다.
혈천방이나 자신이나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이 있다. 혈마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람 중에서도 아주 강한 자,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는 거다. 이게 실수다.
혈마는 사람이 아니다. 말 그대로 악귀다.
세상 사람 중에 마귀 마(魔) 자를 별호에 담은 사람이 많지만, 혈마는 진짜 마귀다. ‘마귀 같은 놈’이 아니다. 혈마 자체가 마귀 본신이다.
마귀는 만들어내는 방법도 없고, 상대할 방법도 없다. 애초부터 탄생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쫓을까요?”
검벽 무인이 말했다.
염창 주민을 모두 죽인 혈마가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고 있다.
염창촌에 아직도 산 생명이 있는지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마귀가 생명을 쫓는다.
‘쫓는다고? 어디로?’
혈마는 쫓을 수 없다.
혈마의 감각은 점점 발전한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방원 십장 안에 있는 생기를 감지해낸다고 하면 내일은 십일 장, 모레는 십오 장으로 넓어질 것이다.
현재, 혈마의 감각이 어느 정도로 발달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로 간격을 벌려야 안전한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막연히 멀리 떨어져서 쫓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라고 말한 것이다.
‘비교적 안전한 거리’도 당분간이다. 지금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거리도 내일은 달라진다.
쫓아가는 자, 다 죽는다.
“형옥주가 사마를 잘 다루고 있으니…… 우리는 단으로 돌아가자. 단주를 만나야겠어.”
괴마가 힘없이 말했다.
* * *
투투투투둑!
전서구가 날아왔다.
천원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전서구는 비보전에서 관리하지 않는다. 천원주가 직접 관리하는 전서구다.
당연히 오가는 길목도 정해져 있다. 천원주 집무실과 제일비처(第一秘處)만 날아다닌다.
이 세상에서 오직 천원주와 밀운만의 연락 방식이다.
밀운이 보낸 전서구다.
밀운에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밀운은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밀운이 등여산을 형당에서 빼낸 사실은 알고 있다.
형옥에서 많은 무인이 죽었다. 그 와중에 등여산을 비롯한 호발귀를 따르던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호발귀가 데려가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천원주는 여기까지만 안다.
이런 사실도 천살단에 떠도는 풍문을 종합해서 안 것이다. 형옥에서 누가 보고한 것은 아니다.
형옥은 천원주 소관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천살단주가 형옥주에게 ‘혈마에 관한 전권’을 부여한 후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공식적인 직제 개편은 없었지만, 은연중에 검벽처럼 완전히 별동부대로 떨어져 나갔다.
형옥주는 형옥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당연히 천원주는 세부적인 내용을 전해 듣지 못했다.
천살단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아는 것이 없다.
다만 밀운이 지금쯤 멀리 사라져서 등여산을 살피고 있을 것이라는 정도는 추측한다.
흘러 다니는 말을 들어보면 책사가 형옥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 그녀에게 날아온 전서구가 아마도 그 사실을 보고하고 있을 것이다.
천원주는 급히 전서구를 낚아채서 전통을 빼냈다.
전서에는 모든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있었다.
등여산이 살아있다. 그녀의 이상한 증상도 적혀있다. 분명히 죽었는데, 멀쩡한 상태……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등여산에 관한 내용은 긴 서신에서 앞부분만 차지했다.
앞부분을 지나가 곧바로 혈마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혈마가 염창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살아남은 사람이 왜 한 명도 없는지, 왜 피가 한 곳에 웅덩이져서 있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전서다.
천원주는 전서를 와락 구겼다. 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등여산과 호발귀는 확실히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다. 그 두 사람은 만나는 순간부터 비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적과 적이 만나서 뭘 어쩌겠다고.
호발귀는 혈마록을 손대면 안 되는 거였다. 혈마록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호발귀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저주받은 것이다.
스읏!
천원주는 지필묵을 꺼내서 서신을 적었다.
혈마를 이 상태로 놔둘 수는 없다.
천살단주는 혈마를 이용해서 마인을 제거할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현재 혈천방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비보전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혈천방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혈마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 살심을 어떻게 누그러트린단 말인가.
계속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면서 애꿎은 사람이라도 죽여야 하지 않는가.
혈마는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
이 세상 전부를 죽일 수도 있다.
천원주는 한숨을 내쉬면서 서신을 전통에 넣었다. 그리고 전서구를 다시 날려 보냈다.
천원주의 눈에 등여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고통스럽다.
천살단이 정상적으로 정도인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면 이런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아예 혈마록을 연구하지도 말았어야 한다.
마공관! 마공관 자체를 소멸시켰어야 한다.
천살단에 왜 마공관이 필요한가. 그런 게 있으니까 혈마 제조까지 손댄 것이고, 호발귀를 끌어와서 참회동에 가둔 것이다.
‘단주. 단주님 말씀대로 이건 제가 짊어져야 할 업보 같습니다. 왜 이런 아픔을 전에는 보지 못했을까요?’
천원주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앞날은 천살단을 위해서 싸우다가 끝맺을 줄 알았는데, 아마도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싸움을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