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一章 혈행(血行) (4)
밀운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등여산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등여산을 빼내서 천살단을 탈출하면 된다. 그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하지만 등여산과 함께 형옥에서 빼낸 사람들이 있다.
형옥에서 꺼낼 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상 등여산만 데리고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들까지 모두 데리고 탈출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론은 지금 당장은 탈출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등여산이나 다른 사람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 깨어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사실, 등여산 같은 경우에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홀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반쯤 죽었다가 깨어났다. 아니, 아직 깨어났다고 할 수도 없다. 오직 맥박만 정상이다.
이런 상태로는 정말 깨어난다고 보장도 하지 못한다.
등여산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처지다.
이들이 깨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려야 하나?
그동안 혈마를 쫓아볼까? 염창촌은 바로 인근, 횅하니 달려갔다가 와도 될 것 같은데.
‘갔다 오자.’
밀운은 생각을 결정하자 즉시 지필묵을 꺼내 서신을 적었다.
자신은 밀운이라고 한다. 천원주의 명을 받고 책사를 구했다.
구하는 김에 다른 사람도 함께 구했다. 호발귀는 혈마로 변해서 당신을 공격하고, 일행도 공격했다.
그는 염창으로 가고 있다. 자신도 염창으로 간다.
혈마는 천살단이 만든 혈마를 뒤쫓아갔는데 아마도 엄청난 살육을 벌일 것 같다.
먼저 뒤쫓아가 보겠다. 정신을 차려 차리고 몸이 수습되면 뒤쫓아오고, 그렇지 않으면 편백림(扁柏林)에 숨어있기를 바란다. 곧 다시 돌아오겠다.
그런 내용이다.
편백림은 천원주만의 숲이다.
편백 오백여 그루가 쭉쭉 뻗어있는 아름다운 숲인데, 천원주 이외에는 출입하는 사람이 없다.
천원주의 휴식 공간이기 때문이다.
천원주를 존중해서 천살단주조차도 편백림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딱 한 번, 천원주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인지 와본 것이 전부다.
그 후부터 편백림은 일종의 금역이 되었다.
금줄이나 경고판 같은 것은 없다. 담장이나 철망이 설치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천살단 무인들은 편백림 안으로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천원주는 등여산을 예뻐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편백림을 선택한 적이 몇 번 있다.
그곳이라면 안전할 수 있다.
밀운은 서신을 작성한 후 등여산의 허리춤에 찔러 넣어 주었다.
잠시 등여산의 얼굴을 쳐다봤다. 가슴 상처에 금창약도 다시 뿌려주었다.
‘됐어. 이 정도면 위험하지 않아.’
밀운은 즉시 신영을 날려 혈마를 쫓아갔다.
쒜에엑! 쒜엑! 쒝!
밀운은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염창으로 달려갔다.
혈마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염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조급해하지 않는다. 염창으로 가면 원하지 않아도 만날 것이다.
“제발 혈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데.”
밀운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혈마는 천살단이 만든 혈마, 사마를 쫓는다.
사마는 기척을 드러내지 않는다. 살아있지만 아무런 기운을 흘리지 않는다. 생기조차 흘리지 않는다. 마치 유령처럼 쓱!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사마라고 일컫는다. 사마가 혈마로 변할지
세상은 사마가 눈앞에서 사람을 죽여도 알아보지 못한다. 유령이 죽였는데 어떻게 알아보나.
사마는 호발귀처럼 전신에 피칠을 하지 않는다.
자기 몸에 피가 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가 튀면 피 냄새가 풍긴다. 그 냄새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추격 단서가 된다.
세상에는 냄새를 쫓는 무리가 너무도 많다. 특히 사냥개를 동원하면 여지없이 추격당한다.
그래서 피가 튀는 것조차 방비한다.
사마도 밥은 먹는다, 생체 기관을 유지하고 있으니 먹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밥을 먹으면 음식 냄새가 난다.
익힌 음식, 화식(火食)을 먹으면 몸에서 야릇한 인내가 풍긴다.
그래서 사마는 생식만 한다.
생쌀을 먹고, 소나무 잎을 씹고, 나무뿌리를 캐 먹는다. 도토리를 으깨서 꿀에 버무려 먹는다.
무척 먹기 힘들지만 사마는 아주 자연스럽게 섭취한다.
그 덕분에 사마는 어떠한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사마는 완벽하게 죽은 인간이 되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오히려 사마가 혈마를 쫓는 게 더 쉽다.
혈마는 온몸에서 진한 피 냄새를 풀풀 풍긴다.
보통 사람도 맡을 수 있는 역한 냄새인데, 사마가 어떻게 맞지 못하겠나.
반면에 혈마는 사마를 쫓지 못한다.
혈마는 사마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야만 쫓아갈 수 있다.
사층 뇌옥은 십여 명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하지만 사마나 혈마 같은 자들이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사마가 도주하는데 제약이 많았을 것이다.
세상에 나오면 달라진다. 혈마는 사마를 잡을 길이 없다. 세상에 나오면 온갖 것들이 생기를 풍겨낸다.
하늘하늘 날갯짓하는 나비조차도 생기를 풍긴다.
생기가 득실거리는 곳에 생기 죽인 사마가 존재한다. 찾을 수 없다.
사마는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좁은 동굴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약한 냄새조차도 세상 밖으로 나오면 완전히 묻혀버린다.
사마가 풍기는 냄새보다 세상에 쏟아내는 냄새가 훨씬 진하다.
이것은 사냥개로 추격시켜봐서 안다.
사냥개는 사마 냄새를 맡지 못했다. 오히려 눈 가린 사마가 사냥개를 찾아내서 죽였다.
혈마가 사마를 잡아낸다는 건 무척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찾았어!’
밀운은 염창촌에 거의 다다라서야 혈의를 입고 무겁게 움직이는 혈마를 찾아냈다.
스스슷! 스읏!
혈마는 뭔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앞으로 치달렸다가 멈춘다. 멈췄다가는 다시 치달린다.
사마가 보이면 쫓아가고,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서성거렸다.
마치 미련한 멧돼지가 토끼를 쫓는 것 같다. 눈에 보이면 쫓아갔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멈춰서서 주변을 뒤진다.
나무뿌리며 칡뿌리며 주변에서 먹을 걸 찾는다. 그러다가 또 토끼가 나타나면 뒤도 안 보고 쫓아간다.
혈마의 움직임이 멧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혈마는 조금씩, 조금씩 염창으로 향했다.
혈마는 확실히 유인당하고 있다.
쒝! 악!
첫 비명이 터졌다.
염창으로 들어간 사마가 길 가고 있던 아낙을 다짜고짜 검으로 베어버렸다.
여인은 등이 쩍 벌어져서 절명했다.
여인은 단 일격에 즉사했다. 아직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지만, 근육의 떨림일 뿐, 영혼은 이미 육신을 빠져나갔다.
여인의 몸에서 쏟아진 피가 길을 흥건히 적셨다.
스으읏!
사마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낙이 검을 맞고 죽었는데, 누가 죽였는지 본 사람이 없다. 죽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데 마침 그 순간에 혈마가 나타났다.
“크크크! 크크크크!”
혈마가 섬뜩한 괴소를 흘렸다.
이 순간, 혈마의 눈은 비명을 듣고 뛰쳐나온 마을 사람들을 향했다.
사람들은 부리나케 달려 나오다가 피를 흠뻑 뒤집어쓴 혈마를 보고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저, 저게 뭐지?”
“사, 사람이야.”
“아니, 악마야. 악마.”
“사람이 맞지?”
“악마라니까!”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서 죽은 여인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렸다.
혈마는 피로 물든 검을 손에 쥐고 다닌다. 애당초 검집 따위는 없으니 검을 꽂을 곳도 없다. 또 전신에는 형옥 무인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고.
지금 혈마의 모습을 보고 치를 떨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혈마 손에 죽었다. 혈마가 여인의 몸을 갈랐다.
“엄마!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어린애가 죽은 여인을 향해 달려가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어깻죽지를 잡혔다.
아이가 발을 동동 굴리면서 울부짖었다.
“너도 죽고 싶은 거야! 가만있어!”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혈마는 그런 사람들을 쏘아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혈마의 눈에는 울부짖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주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장 혈마의 위험을 감지했다.
혈마는 살인마다. 지금 여인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마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척 보면 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살인에 중독된 살인마다.
이런 자는 누구든지 죽인다.
“으으……”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그때 묘한 일이 일어났다. 정말로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터졌다.
“큭큭! 큭큭큭!”
혈마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검을 들어 올렸다.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순히 검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겨눴다. 한 명, 한 명……
혈마가 ‘너희는 빠져나갈 수 없어. 너희 모두 죽을 거야. 내 손에 죽어.’하고 잔인한 저주를 거는 듯했다.
그 생각은 옳았다.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된 순간, 저주가 걸린 순간, 뒷걸음질 치던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면서 혈마에게 걸어갔다.
“엇!”
밀운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도주해도 모자랄 사람들이 오히려 혈마에게 다가간다. 아니, 지금도 몸을 물러서고 싶은데 다리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으으으……”
혈마에게 다가서는 노인의 눈에 공포가 절절히 베여 있다.
노인은 곧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전신에 피칠을 한 괴인이 검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걸어간다.
이 사실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스으읏! 쒜에에엑!
혈마는 노인이 가까이 오자 단숨에 마영심도 십칠 식을 전개했다.
“웃! 이건!”
밀운은 또다시 눈을 부릅떴다.
혈마가 한낱 노인을 향해 마영심도 십칠 식을 모두 쏟아냈다.
노인은 머리가 반쯤 잘리고, 가슴이 베이고, 옆구리가 찍히고,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노인은 십칠 식을 모두 받지 못했다.
겨우 이식이 전개될 무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썩은 짚단 무너지듯이 풀썩 무너졌다.
스으읏!
혈마가 또 검을 들어 올렸다.
“제발! 제발! 나으리!”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을 흘렸다. 혈마를 향해 애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죽기 싫다고 울부짖는 사람, 도망가라고 소리치는 사람…… 온갖 말이 쏟아져 나왔다.
염창촌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지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차마 떼기 싫다는 듯 발을 꿈쩍거리고 있지만, 서서히 혈마를 향해 다가갔다.
혈마가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자는 전력을 다한 혈마 무공으로 천참만륙 한다. 육신을 소멸시켜 버린다.
‘안돼! 저건 살인이야!’
밀운은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가려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형옥 무인들이 저 검에 당했다. 그래도 그들은 무인이어서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공격을 가했다.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염창촌 사람들은 싸울 줄 모르기 때문에 애원하고 울부짖는 것이다.
형태만 다를 뿐, 죽음은 같다.
혈마가 들고 있는 저 검은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자신이 나가면 자신 역시 저 검의 제물이 된다.
왜 사람들이 반항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한, 모든 사람이 저 검 앞에 죽는다.
혈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성이 없다. 정신을 망각한 살인 기계가 생명을 소멸시킬 뿐이다.
지금 호발귀의 눈에는 염창 주민들이 반드시 생명을 끊어야 하는 날벌레로 보일지도 모른다.
쒜에에엑!
검이 허공을 갈랐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자리에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
시신이 방원 삼 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벌써 십여 명이 쓰러졌었는데 모두 삼 장 안에 쓰러져 있다.
호발귀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멀리 떨어져 나가 죽었다.
아니, 실제로 죽음은 방원 반 장 안에서 일어났다. 몸뚱이가 잘리면서 삼 장 밖으로 튕겨 나갔기 때문에 반경이 넓어진 것이다.
실제로 핏물은 혈마 주위에만 흥건히 고여있다.
죽은 사람들의 몸통이 혈마 주위에 널브러져 있다.
“우욱!”
밀운은 또 토악질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