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一章 혈행(血行) (3)
“문을 닫아야 합니다.”
형옥주가 말했다.
“문을 안 닫았다고요?”
천원주가 놀란 눈으로 형옥주를 쳐다봤다.
“상황이 너무 급해서……”
“아무리 급해도 그렇죠. 혈마가 날뛰는데. 그러다가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요? 형옥 무인들이 다 죽는 걸 보면서도 생각되는 게 없어요?”
천원주가 형옥주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형옥주는 천원주의 질책을 이기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때, 묵묵히 대화를 듣건 천살단주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닫지 마시게.”
뜻밖의 말이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말이다.
“단주님!”
천원주가 말이 안 된다는 듯 단주를 쳐다봤다.
“호발귀가 우리 혈마를 쫓는다고 했나?”
“네.”
“사층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네.”
“그럼 남은 아이는 둘이라는 건데…… 그 아이들을 염창(苒滄)으로 보내봐.”
“단주님! 염창은!”
천원주가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표시했지만, 천살단주는 손을 들어서 말을 막았다.
“보내 봐.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혈마가 염창 주민들을 모두 죽일 거예요. 설마 민간인이어서 봐주리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천원주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천살단주는 못 들은 척 형옥주에게 말했다.
“그 애들 잡히지 않게 주의하고. 잡히면 죽으니까. 아! 그놈들이 먼저 도주했다고 했나?”
“네. 혈마가 쫓고, 우리 혈마가 도주하고…… 그래도 워낙 좁은 곳이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형옥주가 사층 상황을 설명했다.
괴노가 키운 혈마를 호발귀를 상대하지 못했다. 진짜 혈마를 보자 바로 천적임을 알아챘다.
처음에는 공격도 하고, 등여산도 공격했지만, 천적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후에는 도망만 다녔다. 하지만 괴노의 혈마는 신법에서도 뒤처졌다.
“그래. 계속 도망 다니게 해. 넓은 곳에 풀어놓으면 도망 하나는 잘 다니겠지.”
“네.”
형옥주는 천살단주가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도망만 다니는 것도 혈마를 통제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혈마는 여타 무인보다도 괴노의 혈마를 우선해서 쫓는다. 혈마부터 죽인 후에 다른 생기에 눈길을 돌린다. 그렇다면 괴노의 혈마를 죽일 자들이 있는 곳으로 유도하면?
혈마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기를 도륙할 것이다.
어느 칼보다도 강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이 된다.
그 사이에 천살단 혈마는 또 모습을 감춘다. 호발귀를 살행 장소로 유인할 때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 유인할 때만 쓰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지금 천살단주가 말한 염창은 마인이 있는 곳이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모으고 있는 민촌이다.
그곳에 혈마를 들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혈마가 애꿎은 사람들을 죽일까, 아니면 그냥 무심이 지나칠까? 염창 주민들은 생기는 내뿜지만 살기는 토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마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기만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을 죽일까?
실제로 혈마를 투입해서 확인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천살단주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애들이 잡히면 안 돼. 이제 남은 거라고는 그거 두 개밖에 없어. 그거 두 개 만드는 데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얼마야? 두 개로 최선을 다해봐.”
“네.”
“이건 자네가 목숨 걸고 맡아.”
“목숨을 걸겠습니다.”
형옥주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옆에 천원주가 있다.
지금까지 형옥주는 천원주의 지시를 받았다. 조금 전에도 형옥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고 면전에서 질책을 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천살단주의 직명을 받는다.
검벽처럼 단주의 명령만 쫓으면 되는 위치가 되었다.
내 총관을 통하지 않는다. 형옥주라는 지위가 천원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분명히 한 단계 위로 올라섰다.
“가봐. 살펴볼 게 많잖아.”
천살단주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섭섭한가?”
“제가 어린애인가요. 이 정도 일로 섭섭하면 그게 오히려 한심한 거죠. 다만 회의가 들어서요”
“후후!”
천살단주가 웃었다.
“회의라. 뭐 천살단을 항상 공명정대해야 한다. 이런 거?”
“뭐라고 궤변을 늘어놔도 천살단은 정도 문파를 대변해요. 그런 조직에서 혈마를 만들어내고, 또 혈마를 이용한다? 말이 안 되죠. 애꿎은 민간인을 죽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고.”
“난 죽이자고 안 했는데? 어떻게 되나 보자고 했지.”
천살단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치졸한 말장난은 아니다. 천살단주가 그 정도로 퇴락하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농담을 던진 것이다.
“재미없어요.”
“그런가? 천원주…… 전에는 이런 말에도 웃어주곤 했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건 아닐까?”
“이것은 분명히 정도가 아네요.”
“그렇지.”
천살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단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태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회의가 들 수밖에 없지. 한데 그건…… 우리 몇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이지 않을까 하는데.”
“……”
천원주는 침묵했다.
천살단주의 마음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칼이라는 게 원래 사악한 거 아닌가.”
‘아!’
천원주는 속으로 탄식했다.
‘칼이 사악하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생각이 골수에까지 물들었다면 그의 검은 매우 잔인하고 사나워진다.
칼을 손에 쥔 사람이 이런 쪽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칼은 위험한 도구이니 잘 다스려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악하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대부분의 악행이 용서받는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념이다.
천살단주가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런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칼이 사악하니 사악한 칼을 모두 부러트려야 한다.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것이 천살단주의 생각이었나.
“혈마를 사악한 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사악한 칼을 잘 이용해서 우리가 손대지 못하는 마인을 공격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딨나. 예를 들어서 귀검 같은 자. 살단주까지 패한 검의 귀재, 귀검. 혈마가 아니면 죽일 사람이 없어.”
천살단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은 혈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해야겠네요. 혈마를 만들기 위해서 형옥 무인들이 모두 처참하게 짓이겨졌어요. 그들 모두 우리 형제들인데,”
“당분간 희생이 따르겠지만…… 이 희생을 아낀다고 열매를 놓친다면 소탐대실이 아닐까 하네. 당분간 날 믿고 내부를 추슬러 줘. 죽은 자들, 잘 수습하고.”
“알겠습니다.”
천원주가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은 싸늘했다. 인자한 미소라든가 온화한 기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꽝!
거친 울림이 일어났다.
혈마가 드디어 형옥 문을 깨트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형옥 문을 굳게 걸어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뚫을 수 있었다.
아니, 굳게 잠겼어도 시간은 걸렸겠지만 결국은 뚫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하 사층 철벽도 부수고 나오지 않았나. 혈천방 석벽도 부쉈고.
쉬이잇!
혈마의 눈앞으로 희뿌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킥킥킥!”
혈마는 당장 그 그림자를 쫓아갔다.
고양이가 쥐를 봤을 때처럼 일절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림자만 보면서 달려갔다.
이미 형옥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
혈만은 순식간에 모든 생기를 끊어버렸다. 말살해 버렸다.
혈마는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의 혈마는 생기를 쫓아다녔다. 생기가 번뜩이면 달려들어서 죽였다.
지금의 혈마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그리고 생기를 지닌 자들이 달려들도록 만든다. 생기를 끌어들인다.
다가오게 만들어서 편히, 쉽게 죽인다.
그래서 시신들이 넓은 장소에 퍼져 있지 않다.
혈마가 있던 곳 한 곳에 뭉쳐있다.
완전 핏덩이다. 핏물이 가득 고였다.
피로 만든 웅덩이, 시산혈해(屍山血海), 모든 말이 다 들어맞는 장면이 연출된다.
마인을 가리키는 말은 많다.
하지만 혈마라는 말을 듣는 마인은 많지 않다. 그러려면 정말로 피가 강이 되도록 죽음을 일으켜야 한다. 매우 잔인한 살법을 전개해야 한다.
이백 년 전에 한 명의 마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림은 그에게 혈마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 칼이 굉장히 잔인했기 때문이다. 중원을 피로 물들여서다.
그 잔인함, 밀운은 확실하게 봤다.
형옥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시신 더미를 보고도 토악질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으! 우웨에엑!”
밀운은 토악질을 너무 해서 누런 신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속이 계속 니글거린다.
‘아냐.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밀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곧 형옥을 살피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등여산을 움직여야 한다.
지금 즉시!
쉬이이익!
그는 등여산을 데리고 형옥 밖으로 나왔다.
‘이제 천살단을 빠져 나아야……’
밀운은 즉시 천살단을 벗어나려다가 생각을 돌렸다.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혈마의 친구들……
그자들은 죽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는데, 형옥에서 오직 그자들만 살아남았다.
천살단은 그들을 끝까지 이용할 것이다.
목숨을 붙여 놓고, 만약 혈마에게 어떤 짓을 할 때가 되면 그들을 이용할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천원주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천원주의 검은 악에 물들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태생부터가 맑고 청순하다. 그런 검이기에 천원주를 존경한다. 기꺼이 목숨을 맡길 수 있었다.
밀운은 천원주의 주위로 악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을 감지했다.
피의 물결과 악의 물결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형옥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악의 물결이다. 혈마가 만든 것은 피의 물결이다.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피 웅덩이 주변으로 악의 물결이 흐른다. 누가 혈마를 만들었나.
누가 혈마에게 이런 살인을 하게끔 유도했나. 악의 물결이다.
밀운은 다시 형옥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끄집어냈다.
“끄응!”
도천패를 옮길 때는 너무 무거워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야만 했다.
홀리는 가장 안쪽에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혈마는 정말로 손속에 사정을 담지 않았다. 아예 단매에 죽으라는 듯이 거칠게 손을 썼다. 그렇지 않고는 여인은 오 장이나 날려버릴 수는 없다.
밀운이 막 홀리를 안고 뛰쳐나왔을 때, 일단의 무리가 형옥에 나타났다.
낯선 노인이다.
또 검벽 무인도 보인다. 노인을 검벽 무인이 에워싸고 있다. 검벽 무인들이 있다는 것은 천살단주가 노인을 특별하게 보호한다는 뜻이다.
‘저자가 누군데……’
밀운은 노인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검벽을 동원해서 특별히 호위할 정도라면 대단히 중요한 자다.
‘괴마 하구량!’
밀운은 얼굴도 보지 못한 지하 사층의 괴노 하구량을 떠올렸다.
저자, 오척단구에 미친놈처럼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트린 자…… 저자가 천살단 혈마를 만들어냈다.
밀운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이 하는 행동을 빤히 지켜봤다.
그의 귀식대법은 혈마를 속이지는 못하지만, 검벽 무인들을 속일 수는 있다.
노인은 형옥을 세심히 살폈다. 검벽 무인들을 밖에 세워놓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
괴마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가득했다.
- 등여산이 없어. 계집이 없어
밀운은 괴마의 입술을 읽었다.
괴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음성을 듣지 못한다. 또 괴마가 소리 내어서 말할 리도 없다. 검벽 무인에게 한 말도 아니다. 혼자서 허공을 보고 중얼거린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입을 벌려서 말을 했고, 밀운은 입술을 읽었다.
독순술(讀脣術)이다.
입술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냈다.
- 계집이 없어. 분명히 죽었는데. 혈마가 데려간 것도 아니고…… 가루로 만들었나? 핏더미 속에도 없었어. 아니, 나머지도 없어. 어떻게 된 거지? 이것들이 살아났나?
“자넨 단주에게 가. 이 사실을 빨리 보고해. 나는 염창으로 갈 테니까. 일단 혈마의 움직임을 살펴봐야겠어.”
괴마가 검벽 무인에게 말했다.
밀운은 괴마가 말하는 것을 다 읽었다.
‘혈마가 염창으로 가고 있다고? 방금 사라졌는데 어떻게……? 그럼 유인?’
밀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