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一章 혈행(血行) (2)
“어!”
“아……”
혈마를 본 뇌옥 무인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그들은 지하 사층에 있던 괴인이 철문을 뚫고 올라올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철문이 부서지는 순간부터 거의 공황 상태였다.
그들은 검을 뽑기는 했지만, 와락 달려들지는 못했다.
혈마가 혈천방을 어떤 식으로 박살 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 소문은 무림에 흘러나가지 않았다.
무림은 호발귀가 혈천방에서 벌인 일을 모르고 있다. 혈천방은 자신들의 치욕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천살단 또한 정도 최후 보루라는 상징성에 손상을 받는 일이라서 침묵했다.
하지만 천살단 무인들은 혈마의 가공함을 귀가 따갑게 전해 들었다.
모두 쉬쉬하면서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은연중에 전해오는 말이 더 정확한 법이다.
혈마에게 잡히면 죽는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으니 감히 공격할 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도주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호발귀는 굉장히 섬뜩하다. 빨간 눈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혈의, 사악한 괴소…… 보기만 해도 무섭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공격하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혈마는 상대방에게 기죽어서 도망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라고 끌어당기고 있다.
“크크큭! 크큭!”
혈마가 괴소를 쏟아냈다.
호발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형옥 무인들을 쳐다보는 자는 피에 굶주린 살인귀다.
“호발귀!”
묶여 있던 홀리가 호발귀를 알아봤다.
그녀는 사로잡혀서 끌려왔다. 손발이 묶여 있어서 호발귀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하지만 진한 피 냄새를 맡은 순간, 퍼뜩 호발귀를 떠올렸다.
천살단에서 이 정도로 강한 혈향(血香)을 풍길 자는 호발귀밖에 없다.
‘호발귀…… 저 상태로 세상에 내보내면 안 돼.’
“이잌!”
홀리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호발귀가 미친 상태로 형옥을 나서게 하면 세상이 피바다로 변한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미탕……”
흘리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바짝 끌어모아서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호발귀의 혈마 무공은 상당히 변형되어서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구혼음소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호발귀가 구혼음소를 알아듣고 정신을 차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간절할 때, 호발귀는 늘 응답해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신을 차렸고, 결국은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틀림없이.
“처러카 미이 개자오라 도미 조 소이나.”
홀리는 전심전력으로 구혼음소를 읊었다. 구혼음소의 음률 따위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최대한 음률에 맞춰서 혈마를 죽이고자 했다.
호발귀가 구혼음소에 반응했는지 홀리를 쳐다봤다.
‘그래. 나야. 나 알아봐? 나 언제나 알아봤잖아. 나 홀리야.’
“취저 처 타마 뭘롱 닌비라……”
입으로는 구혼음소를, 마음으로는 간절한 애원을 담아서 호발귀에게 보냈다.
하지만 홀리의 중얼거림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았다.
혈마는 홀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중얼거림이 귀에 거슬렸을 뿐이다.
스스슷!
혈마가 다가온다. 좋은 뜻을 품지 않았다. 새빨간 두 눈에 살의가 불타오른다.
슈웃! 우르르릉!
호발귀가 일 권을 뻗어냈다.
주먹에서 우렛소리가 울린다. 구뢰마권!
‘아!’
홀리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퍼억!
구뢰마권은 정확하게 홀리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훅!”
홀리는 헛바람을 내질렀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이 뚝 떨어졌다.
너무 강력한 주먹이다.
호발귀는 홀리를 가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쒜에엑! 퍼억! 퍽퍽! 퍼어억!
도천패를 가격하고 당홍을 후려쳤다. 전력을 다한 구뢰마권이 저항하지 못하는 몸에 터졌다. 호발귀에게는 한주먹감밖에 되지 않는 해자수까지 매우 거칠게 두들겨 팼다.
호발귀는 아는 사람만 때리는 것이 아니다. 뇌옥에 있는 사람을 모두 후려친다. 손속에 사정을 담은 것도 아니다. 인정사정없이 죽을힘을 다해서 가격한다.
우루르릉! 퍼억! 퍽!
우렛소리와 격타음이 생생하게 귓전을 울렸다.
이런 주먹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운이 좋으면 즉사하는 것이고, 운이 좋지 않으면 두 대 세 대 연달아 맞다가 결국은 숨을 거둔다.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도 울렸다.
호발귀를 노리고 달려들던 무인이 머리뼈가 박살 나서 피식 꼬꾸라졌다.
스슷! 파파파팟!
호발귀는 손에 들고 있던 검도 사용했다. 한두 명이 달려들 때는 주먹질만 했는데, 여러 명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검을 쓰기 시작했다.
휘루룽! 파아아앙!
손에 들린 검이 마구 검광을 뿌렸다.
달려드는 무인이 많을수록 검은 더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핏빛 혈광이다.
검이 몸을 치면서 피를 끌어낸다. 하지만 피는 검에 묻지 않는다.
검속이 워낙 빨라서 피가 검에 딸려 나온다. 검이 지나가고 피가 허공에 흩뿌려진다.
굉장히 빠른 겁이다. 귀신같은 검초다. 마귀가 내려와서 인간을 도륙하는 듯하다.
슛!
일 검을 내리치자 일시에 두 명이 쓰러졌다.
호발귀의 검초는 끝도 없이 피어올랐다.
몇 사람이나 죽였는지 모른다. 이 층 뇌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다.
혈마가 생기를 찾아서 숨을 끊어버린다. 약간이라도 생기가 남아있으면 여지없이 검을 쓴다.
스읏!
호발귀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이 층에서는 산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절명했다. 누구 하나 요행을 피하지 못하고 피투성이 속에 몸을 뉘었다.
“크크크크!”
혈마가 괴소를 흘리면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으음!”
밀운은 신음을 흘렸다.
정신을 차리자 제일 먼저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다행스럽게도 역천금생단의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 순간 이후부터 언제든 부작용이 나타나서 몸을 망칠지 모른다.
우선 당장 몸이 깔끔할 정도로 괜찮으니 다행이라고 여긴다.
밀운은 참담한 눈으로 푹 쓰러져 있는 등여산을 쳐다봤다.
호발귀가 등여산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갔다. 그 행동 덕분에 등여산은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 뜨고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졌다.
호발귀는 그나마 남아있을 생기마저 끊어버렸다.
무정삼절 제일초 멸천겁을 발길에 실어서 힘껏 차버렸으니, 어떻게 살아남나.
이게 생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맞나?
호발귀와 등여산은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연인이라고 들었는데, 정신을 잃어버리니 연모도 잊히는 것인가.
“후유!”
밀운은 한숨을 내쉬면서 등여산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등여산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천원주에게 시신이라도 가져다줄 생각이다.
그런데…… 시신을 안아 들던 밀운의 눈이 번쩍 뛰었다.
온기! 온기다! 등여산의 몸이 따뜻하다! 살아있다!
쓰러져 있는 등여산을 안아 들자마자 그녀가 살아있다는 게 단숨에 느껴졌다.
밀운은 급히 등여산의 목동맥에 손가락을 댔다.
퉁! 퉁! 퉁!
미약하지만 분명히 동맥에 피가 흐른다.
‘살았어! 어떻게 살았을까?’
혈마가 검을 거칠게 뽑아내고 후려치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았을까?
등여산은 기식이 엄연하다. 하지만 밀운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등여산은 산다. 생기가 너무 강력하다. 맥박이 일정하게 뛴다. 점점 더 활기차진다.
혈마의 일격이 오히려 등여산을 살렸다.
밀운은 급히 등여산의 상처에 금창약을 뿌렸다.
우선 가장 선급한 것이 피를 멎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피를 많이 쏟아냈는데, 더 흘리면 안 된다.
피만 지혈되면 바로 탈출한다.
어떻게 살았는지, 정식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뇌옥을 벗어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츠으읏!
등여산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넣어 주었다.
츄우우웃!
진기가 거침없이 휘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밀운은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등여산은 눈만 뜨지 않을 뿐 보통 사람과 똑같다. 완벽하게 살았다. 방금 그녀를 안아 일으키면서 맥을 잡았을 때와는 또 달라졌다. 더 정상이다.
‘우선 빠져나가고 보자.’
밀운은 등여산 안아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혈마가 휩쓸고 간 자리는 그야말로 지옥이다.
눈앞에 형옥 무인들이 죽어 있다. 단순히 죽음이 아니다. 너무 처참해서 차마 보지를 못하겠다.
“우욱!”
밀운은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어제 먹은 음식까지 기어 나왔다.
“우욱! 우우욱!”
밀운은 이 층 형옥에다가 토사물을 내뱉었다.
극형 중에 거열형(車裂刑)이라는 게 있다.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이나 소에 묶고 각기 다섯 방향으로 달리게 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소를 이용해서 찢어 죽이면 오우분시(五牛分屍), 말을 이용하면 오마분시(五馬分屍)가 된다.
이 층 뇌옥에서 죽은 형옥 무인들의 시신이 꼭 그와 같다.
사람이 죽인 것이 아니고 이건 뭐라고 할까? 소와 말을 이용해서 강력한 힘으로 찢어 죽인 것 같다.
머리, 팔, 몸통, 다리…… 사지가 갈가리 찢겨 있다.
거열형처럼 억지로 찢어낸 상처는 아니다. 검으로 잘라내서 잘린 부위가 매우 매끄럽다. 하지만 사람을 난도분시했다는 점은 거열형을 생각하게 만든다.
뇌옥은 형옥 무인들이 쏟은 피 냄새 때문에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몸이 잘리면서 흩어져 나온 오장육부가 발에 밟혀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형옥 무인들의 죽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권각(拳脚)에 맞아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사지가 멀쩡하다.
주로 뇌옥 바깥쪽에 나가떨어져 있는데, 시신이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검을 맞고 죽은 자들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권각에 맞아 죽은 자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지만, 검을 맞고 죽은 자들은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마치 호발귀가 거칠게 공격하다가 모두 죽은 듯했다. 그러니 시신이 한 곳에 가득 쌓여 있지.
문득, 밀운의 눈길이 홀리, 도천패 등에게로 향했다.
혈마의 친구, 연인, 지인인 자들…… 이들은 아직 사지가 멀쩡하다. 하지만 역시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다.
자신의 임무는 등여산을 구하는 것, 그러니 이곳에서도 등여산만 구할 생각이었다. 음문촌이나 괴상한 투심문 무리 따위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예감이 그를 잡아끌었다.
밀운은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천패의 맥부터 짚어봤다.
쿵! 쿵!
뛴다! 맥이 생생하게 뛴다!
‘이자들 살아있어!’
이 자들의 모습은 등여산과 똑같다.
죽은 것처럼 혼절해 있는데, 기력은 매우 활기차게 뛴다.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보통 사람과 똑같다. 극독에 중독되기까지 했는데, 말끔히 가신 모습이다.
산공산이 효력을 다했나? 독에 중독된 현상은 없다.
“이렇게 멀쩡할 수가! 이게 무슨 일이지?”
밀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상식을 다 꺼내 봤지만, 이 사실이 설명되지 않는다.
“아아악!”
“크아악!”
일 층에서 비명이 거세게 울렸다.
혈마가 일 층에 있다. 이 층에서처럼 형옥 무인들을 척살하고 있다.
지금 일 층으로 올라가면 그 역시 당한다. 혈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등여산을 발로 찼고, 홀리도 주먹으로 후려쳤다.
도천패와 당홍도 일격을 맞았다.
생기를 감지하고 달려와서 전력을 다해 혈마 무공을 쏟아냈다.
실제로 도천패의 가슴과 옆구리에는 주먹 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뼈도 일부 금이 간 것 같다.
여인들은 옷을 들춰보지 못했지만, 도천패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정도의 강력한 타격이면 살리려고 내뻗은 건 아니다. 죽이려고 쳤다.
“아아악!”
밀운은 비명을 들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마…… 호발귀가 악귀로 보인다. 사람이 무서워지기는 처음이다. 무림이 싫어진다.
밀운은 살겁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