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章 울분 (2)
홀리에게는 천살단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좋은 집에서 지내고 기름진 음식을 대접받지만, 마음은 개미굴처럼 번잡하다.
너무 불편하니까 마치 숯불이 활활 불타고 있는 화로 위에 앉은 느낌까지 든다.
음문촌과 천살단은 태생적으로 공존하지 못한다.
똑같은 옷을 입혀서 한 자리에 모아놓으면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반드시 죽여야 할 철천지원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욕을 들을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천살단 무복을 입히고, 음문촌이라는 허울을 씌우면 서로가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홀리는 음문촌이라는 허울을 벗었다.
음문촌 가족들과 일체 모든 인연을 끊었으니, 이제는 음문촌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천살단에서도 안심하고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천살단 무인들에게 음문촌은 영원한 음문촌이다.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니 홀리를 쳐다보는 눈길이 고울 리 없다.
홀리만 다가서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면서 병기를 잡는다. 솔직히 언제 공격이 가해질지 몰라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조차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한다.
정녕 천살단에 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등여산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래서 왔다.
정말로 한 발짝도 들여놓기 싫은데 등여산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를 보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한 것은 잠시 참으면 되지.
우울하기는 해자수도 마찬가지다.
해자수는 천살단에 들어온 이후, 등여산의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다.
남들이 혈마록이다 뭐다 해서 바쁘게 움직일 때도 섬돌 위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무료한지 신발을 벗어서 탁탁 털기도 한다.
홀리는 해자수에게 걸어갔다.
“따분하지?”
“따분하다기보다는…… 거 뭐냐, 그렇지 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달까? 거북하지 뭐.”
해자수가 목을 북북 긁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참아. 혈마록만 없애면 바로 나갈 거야.”
“참는 거야 일도 아닌데…… 여기도 뭐 사람 사는 데고. 그런데 미친놈을 보러 간 사람들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죠?”
“글쎄?”
“상태가 심각한가? 주화입마에 걸린 놈이야 다 그렇고 그런데, 뭐 볼 게 있을까?”
“훗!”
홀리는 실소를 흘리면서 해자수 옆에 앉았다.
“아씨. 내 생각에는 말예요. 천살단주가 책사를 살살 꼬시려는 것 같아. 책사를 꼬시면 호발귀도 따라오니까 일거양득 아니우. 혈마록에서 무공을 뽑아내기는 개뿔.”
해자수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주화입마의 현상은 매우 다르다. 오죽하면 사건 하나에 증상 하나라는 말까지 있다.
정신이상이 생기거나, 사지가 망가진다. 반신불수가 되는 수도 있고, 죽기도 한다. 어느 경혈에서 문제가 생기느냐에 따라서 증상이 크게 달라진다.
또 주화입마에 들면 그 속에서 원인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가 잘못되어서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는 편이다.
천살단에서 기대하는 것은 호발귀의 기감이다.
생기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광인의 정신 상태나 몸 상태를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이번 일은 천원주가 등여산에게 부탁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청한 사람은 호발귀다.
호발귀는 독공도 알고 있다.
본인이 말을 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독공 깊이가 당홍보다 못하지는 않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니 몸의 이상 유무를 즉시 파악해낼 것이다.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천살단에서 책사를 회유할 것이라는 해자수의 말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호발귀의 적은 혈천방에 있다.
호발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혈천방을 향해 모든 촉각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 점을 잘 아는 등여산이 천살단에 남는 일은 없다.
그때, 홀리가 뜬금없이 말했다.
“정 심심하면 우리 비무나 할까?”
“비무요? 갑자기 무슨 비무를…… 싫어요. 누구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해자수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런데 홀리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신발 신어.”
“아이, 싫다니까 그럽니까. 정 비무하고 싶으시면 혼자 검무나 춰보시던가.”
“신발 끈 단단히 매.”
“……!”
해자수는 홀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묵묵히 신발을 신었다. 옷깃도 단단히 조이고 바짓가랑이도 꽉 여몄다.
홀리의 표정에서 싸움 직전에나 떠올리는 진한 긴장감이 보인다.
홀리는 상당한 고수다. 음문촌에서 나올 때 이미 웬만한 무인쯤은 상대할 수 있는 검공을 소유했다.
거기에 호발귀로부터 생기격타를 당하면서 내공이 급진전했다.
탈태환골(奪胎換骨)? 그 정도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홀리는 과거 살단주인 오택골과 싸워도 될 만큼 강해졌다. 귀무령주 귀검과도 검을 맞댄다.
그런 고수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어린다.
“아씨. 신발 끈을 여미기는 했는데…… 에이, 설마? 정말?”
해자수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하다가 홀리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홀리는 싸움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싸움이 일어날 리 있나. 이곳은 천살단이다.
자신들은 귀빈으로 와 있다. 누가 왜 싸움을 일으키나. 혈마를 안방에 불러놓고 싸움을 벌이는 바보도 있나?“
“무기는?”
홀리가 낮고 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바, 방에 있는데.”
“아무거나 집어. 가져올 시간 없어.”
“아씨, 설마 이거 심심해서 절 놀리려고……”
해자수는 말을 하다가 말문을 닫아버렸다.
홀리가 잘못 판단할 게 아니다. 전각 지붕 위로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저들은 매우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천살단 어디 소속 무인들인지 모르겠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하지만 손에 아주 강한 철공을 들고 있다.
틀림없이 좋지 않은 뜻으로 찾아온 불청객이다.
스읏! 슷!
불청객들이 철궁을 당겨서 두 사람을 겨냥했다.
스읏!
홀리도 검을 잡았다. 하지만 홀리는 곧 인상을 확 찡그렸다.
“독! 이것들이 정말!”
홀리가 거칠게 말하며 천살단 무인들을 쏘아봤다.
“독이요? 갑자기 무슨 독…… 아! 이거이거 너무 비겁한데. 살살 꼬셔서 데려와서는 독? 이놈들 이거 혈천방보다 더하잖아? 이놈들보다는 차라리 귀무살이 양반이네.”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중독된 상태다. 조금 전까지도 전혀 알지 못했는데, 갑자기 사지가 무력해진다.
힘이 쭉 빠지면서 현기증이 일어난다. 아마도 산공독(散功毒)인 것 같다.
사실 두 사람을 중독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두 사람 곁에는 독의 대가, 당홍이 있다.
누군가가 독수를 썼다면 당황이 먼저 발견했을 것이다.
적어도 당홍 앞에서는 독수를 쓰지 못한다.
그렇다면 언제?
당홍은 도천패와 함께 뒷마당에서 쌍학을 수련하고 있다.
당홍이 도천패의 등에 올라탔다가 튕겨 나오면서 검을 쳐내는 수법인데, 둘의 호흡이 매우 정교하다. 마치 한 사람처럼 연결되어서 공수 전환이 자유롭다.
두 사람은 쌍학을 매우 좋아한다.
혈천방 무인들을 상대로 쌍학을 사용한 후부터는 자나 깨나 쌍학 수련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쌍학 수련 중이다.
‘한 시진 전에 뒷마당으로 갔으니까…… 그때부터 대략 한 시진. 독을 펼쳤다면 그 한 시진 동안에…… 그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는데.’
“방에 있는 물 마셨어?”
홀리가 해자수에게 물었다.
“마셨죠. 물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 물! 제길!”
해자수가 툴툴거렸다.
홀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서 양쪽 가슴에 있는 옥예혈(屋碨穴) 두 곳과 가슴 정중앙 화개혈(華蓋穴), 그리고 하복부 관원혈(關元穴)을 꾹 눌렀다.
독이 전신으로 번지는 것을 방지한다.
“제길! 이걸로는 안 되는데.”
해자수도 즉시 손을 들어서 경혈 네 곳을 찔렀다.
옥예혈은 위장에서 스며 나온 독이 사지 백해로 번지는 것을 막아준다.
화개혈은 목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주고, 관원혈을 회음혈(會陰穴)을 돌아서 독맥(督脈)으로 흐르는 길을 차단한다.
일시 경맥을 막아서 독의 흐름을 제어한다.
하지만 경맥을 막으면 진기를 사용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아니, 이미 산공독 상당 부분이 전신에 번졌다.
그래도 한 올의 진기라도 지키고자 경혈을 눌렀지만, 효과는 지극히 미비하다.
사박! 사박!
한 여인이 전각으로 들어섰다.
누군지 모르겠다. 등여산이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를 했다. 오다가다 들렸다면서 한두 마디하고 갔다. 등여산과 친했던 사람들이다.
그중에 이 여자는 없었다.
“잠깐 얘기 좀 해야겠어.”
여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천살단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나 보지?”
홀리가 말투도 차가웠다.
“나 감찰일당(監察一堂) 당주야. 난 피 냄새를 좋아해. 피 냄새만 찾아다니지. 이곳처럼.”
“아이구, 겁나라.”
해자수가 홀리 뒤로 숨으며 말했다.
“장난으로 듣지 마. 난 정말 피 냄새를 좋아해. 좋게 이야기할래, 아니면 피를 보게 해줘?”
천원주 휘하에 십삼당이 있다. 감찰당은 일당부터 사당까지 네 개 당이 있다.
그중에서도 감찰일당은 독하기로 소문나 있다.
감찰일당은 사람을 잡으면 일단 반쯤 죽여놓고 시작한다.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서 고문하는 것이 아니다. 죄가 있든 없든 재미로 두들겨 패놓고 시작한다.
“호발귀하고 책사는?”
홀리가 물었다.
“그 사람들? 잘 얘기하고 있어.”
“이야기를 한다. 싸우고 있는 건 아니고?”
“독을 썼다고 매우 화난 표정인데, 내가 독을 쓴 것은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죽을힘을 다해서 저항할 거고, 우리도 전력으로 쳐야 하고. 서로 전력을 다하는 싸움에서 목숨까지 보장할 수는 없잖아?”
“어휴! 내가 저 여자 무섭다고 말했잖아요. 여자 생긴 것 좀 봐. 아주 표독하게 생겼잖아. 에휴! 꿈에 나올까 무섭다.”
해자수가 홀리 등 뒤에서 치를 떨었다.
물론 농담이다. 해자수는 무공은 약하지만, 담력은 매우 강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농을 칠 수 있는 사내다.
“주둥이 터는 것은 너희들 자유인데, 지금 처지도 생각해야지? 결정해. 피? 대화?”
“하! 이거…… 두 개 말고 다른 수나 없나?”
해자수가 난감해서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기가 약해진다. 잔뜩 끌어모으고 있지만, 저절로 흩어진다.
중독되지 않은 상태라면 이들을 뚫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어림없다. 감찰당주와 뒤에 늘어선 천살단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감찰당주가 말했다.
“참고로 말해주는 건데, 지금 상태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덤빈다고 해도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있어. 피만 조금 보면 되니까, 안심하고 싸워. 싸워 볼래?”
“풋! 호랑이가 함정에 빠지니까 쥐새끼가 와서 놀려대네.”
홀리가 말하면서 검을 내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그냥 잡히는 겁니까? 이렇게 맥없이? 멱살 한번 잡아보지 않고?”
해자수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해자수. 저 여자 무공이 안 보여?”
“무공이 뭐 꺼내서 손에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놓지 않은 걸 어떻게 봅니까?”
“저 여자는 단신으로 우리 둘을 잡을 수 있어.”
- 아씨, 정말 잡힐 거유?
이번 말은 거의 홀리만 들을 수 있도록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경맥까지 막힌 상태에서 저 여자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봐? 몸이라도 보존해.”
- 호발귀와 등여산이 형옥에 들어가서 안 나와. 아무래도 이상해. 발악하면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을 놓고는 못 가겠어. 좀 많이 힘들 거야. 미안.
홀리가 해자수만 들을 수 있는 말을 했다.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덜컹!
홀리가 검을 아예 던져버렸다.
“자! 이제 얘기할 수 있지?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묶어! 반항하면 사지를 잘라. 목숨만 붙어있으면 되니까, 마구 돌려도 돼!”
감찰당주가 홀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