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九章 멸혼(滅魂) (3)
등여산은 천살단주의 부름을 받았다.
천살단주에게 가는 길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
신나게 외유를 하고 돌아왔지만, 고향 집은 여전하다. 변함이 없다. 단주에게 가는 숲길이 매우 익숙하다.
곳곳에 검벽 무인들이 은신해 있다.
예전에는 등여산이 지나가면 작은 신호를 보내주곤 했다.
잘 있었느냐, 책사님 저 여기 있어요, 안녕…… 하지만 지금은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더 깊이 숨는다.
검벽 무인은 달라진 현실을 말해준다.
자신이 이쯤 오면 검벽주 주치균이 장난을 걸어오곤 했다.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놀래주려고 준비를 참 많이 했다.
그러고 보니 천살단에 왔는데도 아직 주치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원래 살단은 천살단에 거처를 두고 있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할까?
등여산은 산길을 걸었다.
째액! 짹짹! 째애액!
숲에서 산새가 우짖는다.
‘새 소리도 변함이 없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사람만 변했구나. 훗!
등여산은 피식 웃었다.
단주의 집무실은 여전히 어둡다.
봉창이 있기는 한데, 크기가 너무 작아서 들어오는 햇살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희미한 빛이 방안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주었다.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어요?”
등여산은 천살단주를 보자, 깊이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후후! 허식은 그만두고 앉아라. 그래…… 오랜만에 내 방에서 자보니까 어떠냐?”
“제 방을 온전히 보존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잠은 잘 오더냐?”
“네. 단주님. 오랜만에 푹 잤어요.”
“푹 잤다니 잘 됐구나. 후후! 호발귀하고는 부부지연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네.”
“혼례도 안 치르고?”
“죄송해요.”
“언제든 혼례를 치를 때는 나한테도 청첩장을 보내야지?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지.”
“고맙습니다. 단주님.”
등여산은 환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살단주가 혼례 말을 한다.
마치 호발귀를 인정해주는 듯한 느낌이다.
“자, 그럼, 일 얘기 좀 해볼까?”
“네. 혈마록에서 무공을 뽑아내셨다고 들었어요.”
“허허! 마공관주 작품이야. 네가 떠난 후, 마공관에서 혈마록을 풀이했는데 그게 탈이 났지. 허허!”
천살단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네. 대충 말은 들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죽고, 마심(魔心)에 정복당한 아이는 잡아서 뇌옥에 가둬놨다.”
“네. 지금은 어때요? 정신이 돌아왔나요?”
천살단주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아이도 한 번 보고…… 그러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겠지. 약전주는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 마공관주는 무공에 이상이 없다고 해. 그러니 더 이상하지.”
천살단주가 책상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임명강이 쓱 나타났다. 검벽주는 언제나 천살단주 곁을 떠나지 않는다.
단주와 외인과 대화를 나눌 때는 특히 그렇다.
그가 종이뭉치를 집어서 등여산에게 가져왔다.
“그게 이번에 찾아낸 무공이다.”
“단주님은 안 보셨어요?”
“그런 걸 봐서 뭐하게. 골치만 아파.”
천살단주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다른 때도 그랬다. 살단이 외부에서 마인을 제거하고 마서(魔書)를 수습해 오면 제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보지 않았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이 급히 마공관에 넣으라고 지시하셨다.
단주가 종이뭉치를 살펴봤다면 좀 더 일찍 잘잘못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무공을 계속 연구하실 거예요?”
“아니. 없애버려야지. 좋지 않은 무공은 없애는 게 나아. 다만 혈마록에서 왜 그런 무공이 나왔는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잘잘못을 찾아내야 형옥에 있는 아이도 제정신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고. 연구해 봐.”
“제가요?”
“그러라고 널 부른 거 아니냐.”
“네. 그리고 드릴 말씀이…… 혈마록도 봤으면 해요. 필사를 몇 부나 해놓으셨어요?”
“후후후!”
천살단주가 웃었다. 등여산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혈마록을 없애고 싶은 것이냐?”
단주가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요점을 말해왔다.
“네. 호발귀가 혈마 무공을 기술해 드린다고 했어요. 혈마 무공을 알아도 운이 닿지 않으면 혈기를 보지 못한다면서, 적어드려도 괜찮다고 하네요.”
등여산은 투골지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완전히 잘못 말한 것도 아니다.
투골지까지 말해준다고 해도 혈마 무공을 습득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호발귀는 이해하지 못할 언어를 머릿속에 각인시킨 후에야 혈마 무공을 얻었다.
단순히 마인들 무공 여덟 개가 아니라 혈마가 남겨놓은 진전을 얻었다.
이런 면을 고려했을 때, 혈마 무공을 습득하는 부분에 대해 등여산은 호발귀와 의견이 다르다.
누군가가 혈마가 되고 싶다면 호발귀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해하지 못할 글자들을 달달 외우고, 참회동처럼 완전히 격리된 장소에서 몇 년을 보내야 한다.
투골지만 안다고 해서 혈마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등여산이 바로 말을 이었다.
“혈마록에 적힌 언어들 해독하지 못하는 한, 혈마록을 연구하면 계속 이런 무공만 나올 거잖아요. 그래서 진짜를 넘겨드리고, 이런 것들은 없애려고요.”
“진짜 혈마 무공…… 진짜 혈마 무공이라는 것들, 뛰어나기는 하지만 절정은 아니지. 그걸 절정으로 만든 것은 혈마의 혈기인데, 그것은 운이 닿아야 한다. 후후! 어쨌든 혈마 무공을 적어준다니 어느 정도나 강한지 보지.”
“혈마록은……?”
“호발귀가 적어준 것은 마공관에 있다. 마공관주에게 말해두마. 필사본은 한 부 있는데, 살단주에게 주었다. 살단주는 만나기 껄끄러울 테니, 수거해서 건네주마.”
“네.”
“그럼 가서 일 보고.”
천살단주가 손으로 턱수염을 만졌다.
“형옥에 갈 때, 호발귀를 데려가도 돼요? 아무래도 혈마록에서 나온 무공이라면 저보다는 호발귀가 더 잘 알 것 같아서요.”
천살단주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옥은 우리 천살단 비중지처이니까 말 나가지 않게 단단히 주의 주고.”
“네.”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등여산이 나가고 반 각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천살단주는 어둠 속에서 고민했다. 깊이 침묵하며 어둠을 쫓았다.
“쯧!”
무엇이 안타까운 것일까? 단주가 혀를 찼다.
“검주.”
“네.”
임명강이 즉시 대답했다.
“형옥주에게 가서…… 하사문(下四門)을 열라고 전해라.”
“하사문, 말씀입니까?”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
천살단주는 너무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넷!”
임명강이 대답했다.
등여산은 단주에게서 받아온 종이뭉치를 여러 사람 앞에서 펼쳐 놓았다.
“혈마록에서 나온 무공이에요. 방금 단주님께 받아온 건데, 다 같이 연구해 봐요.”
“그럼 이게 정신을 헤까닥 가게 만드는 마공이란 말이우? 햐! 고민이네. 이거 깊게 들어가면 우리도 머리가 헤까닥 해버리는 거 아니야?”
해자수가 말했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살펴야죠. 언니, 언니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 줘요. 호랑은 생기, 혈기에 미치는 영향. 우리 넷은 순수하게 무공만 볼게요.”
“잠깐! 그런데 방금 호발귀에게 뭐라고 불렀어? 호랑?”
홀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등여산을 쳐다봤다.
“이름 부르니까 듣기 싫다며! 이거나 봐! 여기 적힌 무공은 틀림없이 마공이야.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인간의 뇌를 건드렸는지 찾아내야 해.”
등여산이 급히 말을 돌렸다.
“어때? 호랑이라고 불리니까, 기분이?”
당홍이 호발귀를 쳐다보며 물었다.
“정상적인 사람이 느닷없이 살인귀로 변한다? 흠! 그러면 대단히 큰 자극이 있었을 거야.”
호발귀도 대답을 피했다.
“그럼 나도 호랑이라고 불러야지. 호랑. 호랑. 호랑. 아, 이 호칭 입에 짝짝 달라붙네. 좋다. 큭큭!”
홀리가 장난스럽게 불렀다.
“인제 그만! 무공 고수면 고수답게 이걸 보고 잘못된 점을 찾아냅시다.”
등여산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아씨, 다시 한번 불러보슈. 난 책사가 말한 것보다 아씨가 말한 게 더 듣기 좋은데? 책사는 어쩐지 좀 딱딱해. 아씨는 찰싹찰싹 달라붙고.”
“그렇지? 호랑.”
홀리가 호발귀를 보며 생긋 웃었다.
진기 자극은 내면에서 일어난다. 진기가 적절한 경로로 운행하지 않고 갑자기 경맥을 찌르거나, 긁어대거나, 할퀴거나, 역행하면 육체에 손상을 일으킨다.
그 손상으로 인해서 더 강한 탄력이 발생한다.
대부분의 마공은 이렇다.
온순하던 황소를 깜짝 놀라게 해서 성난 황소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일시적으로 아주 강한 힘을 발출하지만, 그 후유증은 대단히 크다. 자칫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마공이다.
정상적인 무공은 결코 인체 손상을 가져오지 않는다. 운용하면 할수록 더 내공이 증진된다.
시간만 있다면 등여산이 차분히 앉아서 탐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 읽어보고 각기 파악한 점을 빠르게 취합한다.
당홍이 재빨리 무공을 훑었다.
“독에 대한 건 없어 경락을 자극하는 것도 미미해. 정말 이 무공을 수련한 거 맞아? 이건 혈마록에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운데? 마공보다는 정종 무공 쪽이야.”
당홍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나도 이상해. 경맥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지극히 정상적인 범주야. 그렇게 강하진 않아. 이거 혈마 무공이 맞아?”
홀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강(强)만 봤는데, 이 무공은 강하지 않아. 오히려 상당히 부드러워. 혈마 무공 중에 부드러운 무공이 있나? 하나같이 독랄하잖아? 소름 끼치도록.”
도천패가 말하면서 호발귀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호발귀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호발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시연해 봤는데……”
“뭐!”
호발귀가 입을 열자마자 도천패가 경악해서 소리쳤다.
“방금…… 시연해 봤다고 했어?”
홀리도 놀라서 물었다.
아니, 놀라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해자수, 당홍, 등여산도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모두가 종이 뭉치에 적힌 무공을 봤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구결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공을 본 것은 아니다. 구결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오류가 있는지만 살폈다.
어떤 무공이든 몸에 붙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무공 전체를 관통해서 쭉 시연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무공 천재도 불가능하다.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소림사 대항마진력이나 무당파 태청검법 같은 절공도 비급만 보여주면 당장 펼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호발귀가 말한 것은 그와 같은 뜻이다.
“내게는 무공이 보이네. 이거…… 혈마록에서 나온 무공은 맞는 것 같은데, 아직 이상 유무는 찾지 못했어.”
“이게 잘못되면 어쩌려고 시연을 해!”
등여산이 놀라서 말했다.
“왜? 미쳐서 사람을 죽일까 봐? 하하! 그건 내 주특기잖아. 설마 이게 혈마보다 독하겠어? 하하! 무공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연해 보는 거지. 잠깐 해서는 모르겠고, 깊게 들어가 봐야겠어. 등매, 홀리. 부탁해.”
호발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깐 시연해 보는 것은 보통 무인들이 행하는 운기조식이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수련이다. 방금 호발귀가 시연해 봤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혈기로 세세한 부분을 파보겠다는 것이다.
진기 운행이 생기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려는 것인데, 그러자면 혈기가 일어난다.
혈마가 된다.
“호랑! 왜 얘한테는 등매라고 하고 나한테는 이름을 불러? 이거 차별 아냐?”
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두 글자, 두 글자. 됐지? 호랑도 두 글자. 우린 두 글자로 통일.”
“그럼 홀매라고 해야지!”
호발귀가 홀리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벌써 눈을 감았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