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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242화 (242/500)

第五十九章 멸혼(滅魂) (2)

기습은 더 없었다.

검벽 무인들의 죽음이 한순간의 꿈인 것처럼 여겨졌다.

누가 공격했는지도 모른다. 왜 공격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수법에 당했는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본 것은 단 두 번 뿐이다. 다른 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전초 열 명은 죽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무공이 굉장히 뛰어난 자다.

습격에도 능하다. 아마도 암살 쪽에서 단연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살수로 추측된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은데, 공격을 멈출 이유가 없는데,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자가 계속 공격을 가해왔다면 검벽 무인은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등여산도 단 한 번의 공격에 팔을 베이고 말았다.

등여산의 무공은 임명강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책사라서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엄연히 태산파 전인이다. 태산파에서 당당히 내세우는 고수다.

그녀는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도 깊다.

더욱이 그녀는 마공관에서 상당히 많은 마공, 패공, 절공을 봤다.

일부는 수련했고, 일부는 머릿속에 남겨져 있다. 그런 부분들이 모두 그녀의 무공 속에 녹아 있다.

등여산이 당했다면 임명강 역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누구길래 느닷없이 공격을 가해왔다가 사라졌을까?

의문이다.

“다 왔네.”

등여산이 중얼거렸다.

천살단은 그녀를 파문했다. 파문에서 그치지 않고 중원 전역에 추살 명령까지 내렸다.

실제로 살단 무인들을 움직여서 공격하기까지 했다.

황고개에서 있었던 잡랑들과의 싸움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었다.

천살단은 호발귀 일행을 용서할 수 없고, 호발귀는 천살단을 용서하지 못한다.

현재, 호발귀 일행은 여전히 추살 대상이다.

혈마가 무고한 양민 수십 명을 죽였다. 이곳저곳에 시신을 수북이 남겼다.

호발귀를 따르는 사람들은 혈마 패거리인 것이다.

물론 양민들을 죽인 사람은 호발귀가 아니다.

혈천방이 만들어낸 혈마다. 호발귀는 오히려 그런 혈천방을 공격했고, 징계했다. 상을 줘도 모자란다.

하지만 천살단은 혈천방의 음모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등여산이 혈마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아니다.

이것은 표면상 이유이고, 속 내용은 조금 다르다. 혈마가 혈천방을 노리도록 만들었다.

그 길을 가게 유도했다. 실제로 호발귀가 혈천방을 공격하는 동안, 천살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놓고 이제는 필요하다면서 무림 공적을 초빙한다.

정말 세상은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

“여기 또 왔네?”

등여산이 호발귀를 보며 말했다.

호발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발귀에게도 천살단 기억은 좋지 않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십육 비자에게 잡혀서 압송되었다. 마공관에서 고문을 당했고, 참회동에 투옥되었다.

등여산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애증이 얽힌 곳이다.

“혈마 무공 전해줄 거야.”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혈마록은 모두 불태워야 해.”

“그게 그거 아니야?”

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혈마록에는 혈마 무공이 적혀 있다. 혈마 무공을 전해주면서 혈마록은 모두 불태우겠다는 말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차라리 혈마록을 주고 혈마 무공을 감추는 편이 낫지 않나?

홀리가 말을 이었다.

“혈마 무공이 투골지가 없으면 순환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마공은 마공이잖아. 혈마록도 마공이고. 똑같은 거 아냐? 난 솔직히 우리가 천살단에 가는 이유도 모르겠어.”

홀리가 한 말은 홀리의 생각만이 아니다. 호발귀와 등여산을 제외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등여산이 차분히 말문을 열어다.

“혈마 무공은 분명한 마공이잖아?”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

당홍이 대답했다.

“그래요. 머리에 이상을 일으키고 몸을 빨리 망가뜨리는 마공이 틀림없어요. 그것도 살천광마 같은 마인을 만들어 낼 정도로 강력한 마공이죠.”

“그런데?”

“그런데…… 역천금령공을 수련한다고 해서 동문을 일시에 죽이지는 않아요. 무공이 완성되기도 전에 살겁부터 일으키는 일은 없죠. 혈마록에서 추출한 마공은 역천금령공 이상이에요.”

“으음!”

“호발귀 생각은 아는 무공을 주고,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비급은 태우자는 거예요.”

등여산의 말에 호발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었다. 등여산과는 눈빛만 마주쳐도 서로 생각이 통한다.

“그런데 그게…… 내가 낄 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나 같으면 혈마록 같은 비급은 만일에 대비해서 수십 권쯤 필사해 놓겠는데. 그거 다 찾을 수 없지 않나? 솔직히 당주니, 전주니 하는 인간들이 혈마록을 보면 오죽 눈이 뒤집히겠어?”

해자수가 말했다.

정도 무인들의 가장 큰 맹점은 어떤 마공도 정화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다.

천살단에 마공관을 둔 것도 오만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도 무인들은 지금은 손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마공을 정화해서 순수한 패공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런 오만이 어디 있나.

마공은 마공이다. 사공은 사공으로 끝난다.

약물을 복용해서 내공을 높이는 마공이 있다고 치자.

이것을 어떻게 정화하겠다는 것인가. 결국,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약물로 대체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처음 마공을 만든 사람이 그런 것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것저것 다 해보고 안 되니까 몸에 해가 될지언정 이게 낫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마공이 마공인 줄 알면 손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공을 수련하는 즉시 혈마로 변해서 제정신을 잃고 날뛴다면 누가 수련하겠나.

하지만 정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다.

혈마록을 정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은 혈마가 되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혈마가 되지 않고 수련할 수 있어. 혈마가 될 것 같으면 중간에서 멈추지.

이런 생각들이 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혈마록에 눈이 뒤집힌다.

“일단 마공관에 있는 것은 전부 없앨 수 있어요.”

“마공관 밖에도 있을 거야.”

홀리가 말했다.

“필사를 비교한다고 말할 생각이야. 책을 베끼면서 잘못 적었을 수도 있으니까.”

“내주지 않으면? 혈마 무공은 혈마록이니 자기들이 비교하겠지.”

“무공에 이상이 생겼잖아. 그걸 핑계로 삼아야 하는데…… 솔직히 내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후유!”

등여산이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 등여산은 천살단주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만약 단주님이 혈마록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면? 단주의 집무실까지 뒤져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뒤질 수 없다. 침입해서 뒤져야 하는데, 그러면 검벽과 부딪친다.

‘어떻게든 모든 필사본을 한데 모아야 해.’

등여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호발귀 일행은 산 뒤, 좁은 길로 안내되었다.

정중한 초빙에도 불구하고 세상 이목을 따돌린 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거 뭐야? 우리가 죄인이야?”

당홍이 기분 나쁜 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발귀와 등여산이 오자고 해서 왔지만, 천살단은 혈천방과 마찬가지로 사지다. 적의 심장부다.

스읏!

앞서가던 임명강이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이 마중 나왔다.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편한 모습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왜 나오셨어요.”

등여산이 상당히 반가웠는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천원주다. 천살단주 다음으로 높은 신분인 그녀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어려운 청이었는데, 들어줘서 고마워.”

“안에 계시지 왜 나오셨어요?”

“먼 길을 온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가 뭘. 오면서 기습당했다고 들었어.”

“네. 지금도 습격자는 몰라요.”

“우리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가 사라진 것 같아. 그것보다…… 다쳤다던데?”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검벽이 많이 죽었어요.”

전원주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책사는 내가 데리고 갈게. 손님들 모시고 가서 차 좀 대접하고 있어. 잠시만 책사 좀 빌릴게요. 괜찮죠?”

천원주가 호발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는 속 좀 풀려? 천원주가 직접 마중을 나왔으니 배려를 해줬다고 할 수 있지.”

도천패가 당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흥! 그래도 뒷문으로 들어온 건 맞잖아. 속 안 풀려.”

“속 풀어. 당매가 인상을 쓰고 있으면 책사가 마음 편하지 못해. 편하게 해주자고.”

도천패가 당홍의 등을 쓰다듬었다.

호발귀는 참회동을 쳐다봤다.

그가 앉아 있는 객사에서는 산봉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산봉 밑에 있을 참회동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자신은 배수였다.

참회동에 갇힌 후, 장진 스님이 나타났다. 혈마 무공을 천천히 풀이해 주었다.

투골지를 외우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혈마 무공을 꿰뚫게 해준다.

혈마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오성(悟性)에 따른 문제이고, 일단 깨우쳤다고 가정하면 여덟 가지 무공을 하나로 연결해 준다.

또 한 가지 효능은 자신의 머리와 뼈를 꿰뚫는다.

지식과 육체가 하나로 연결된다. 머릿속에 각인된 무공이 육체에 전달된다.

장진 스님은 그렇게 나타났다.

스님은 머릿속에 담긴 무공을 육체에 전달시켜주는 가상의 도구다.

호발귀는 스님의 진정한 정체를 얼마 전에야 알았다.

혈기의 전령도 그 무엇도 아니다. 스님은 자신이다. 머릿속에 새겨진 지식이다. 그리고 몸이다.

스님이 하는 말은 자신이 알고 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 머릿속 깊숙이 잠겨있는 지식이다.

스님이 하는 말이 전부 옳지는 않다.

어떤 말은 맞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고, 어떤 말은 너무 틀려서 잊어버린 말이다.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이 머릿속에 담긴 말은 모두 꺼내준다.

“후후!”

호발귀는 참회동이 있는 산봉을 바라보면서 장진 스님을 그렸다.

앞으로는 종종 만나야겠다.

천원주는 등여산은 책사 시절, 그녀가 사용했던 전각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등여산이 전각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래?”

천원주가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있을 때와 똑같아요. 지금은 누가 사용해요?”

“방안에 임자가 있어. 인사해야지?”

“누군지 참 게으른 것 같아요. 제 취향이 별로 마음에 안 들 텐데, 가만히 내버려 둔 걸 보면.”

“게으르긴 해.”

드르륵!

천원주가 말을 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순간,

“어머!”

등여산이 깜짝 놀아서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방, 책사 시절에 사용했던 방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신이 떠날 때 어질러 놓은 그대로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들, 땀을 닦던 수건, 자신이 사용했던 지필묵, 책들, 작은 검장(劍欌)까지 원래 그 자리에 다 있다.

하지만 먼지는 쌓여 있지 않다.

시녀들이 매일 청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질러 놓은 상태 그대로 보존했다.

등여산이 천원주를 쳐다봤다.

“지금 보니까 어때? 이 집 주인, 상당히 게을렀지? 그렇게 치우라고 해도 콧등으로 듣고.”

“원주님, 고마워요.”

“아니. 나한테 고마울 것 없어. 단주님이 보존하라고 해서 내버려 둔 거지. 내겐 이럴만한 힘이 없잖아?”

“단주님이요?”

“널 내치기는 했어도 그게 본심은 아니셨지. 사실 널 가장 많이 아꼈잖아.”

“단주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가서 봬야겠어요.”

“오늘은 쉬라고 하시더라.”

“아, 네.”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기 머물러. 다른 사람들도 곧 여기도 다 올 거야. 이 전각에 머무는 게 가장 편할 것 같아서 이리 데려왔는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모두 여기로 온다고 했죠?”

“응. 왜?”

“그럼 빨리 치워야죠.”

등여산이 방바닥에 어질러 놓은 책들을 부랴부랴 정리하기 시작했다.

“허! 그렇게 치우라고 해도 안 치우더니 남편이 생기니까 치우는구나? 너 호발귀한테 잡혀 사는 거야?”

“놀리지 마세요.‘

”놀려야지. 이럴 때 놀리지 않고 언제 놀려.“

천원주가 활짝 웃었다.

등여산도 웃었다.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파문당하기 전이나, 추살 명령을 받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천살단은 여전히 그녀의 고향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안온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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