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九章 멸혼(滅魂) (1)
호발귀는 주위를 예리하게 살펴봤다.
‘없다……’
확실히 생기는 없다. 텅 비었다.
등여산 주위로 모여든 검벽 무인들을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
‘그 사이에…… 빠르군.’
호발귀는 당황했다.
혈기를 알게 된 이후, 모든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지해냈다.
알려고 해서 안 것이 아니다. 저절로 느낌이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저절로 보였다.
파란 안개 같은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못 볼 수 있나.
그런데 이번에는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호발귀는 주위를 다시 한번 쓸어보았다.
나무, 풀, 바위, 흙, 개천…… 모든 곳을 천천히 구경하듯이 훑어보았다.
마찬가지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다.
사실 보통 사람들도 생기를 느낀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항상 생기를 감지하면서 산다.
단지 호발귀처럼 뚜렷하게 보지 못할 뿐이다.
집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든다. 서로 만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어도 차갑거나 쓸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기운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집에 혼자 있으면 왠지 쓸쓸하고 허전하다.
보통은 사람이 있고 없고를 안다고 하는데, 생기가 있고 없고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이 있다고 해서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기를 감지하면 안심이 된다.
이것 역시 사람들은 사람이 있어서 안심된다고 생각한다. 생기를 의식할 수 없어서다.
대체로 인간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흉신악살이거나, 포악하거나, 아니면 칼을 들고 있어서 위협적이거나 술주정뱅이라거나…… 위해를 가할 만한 요소가 있어서 꺼리는 것이지, 사람 자체를 멀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띠고, 말은 나긋나긋하게 하며, 마음을 다정하게 써주는 사람은 절대 멀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죽어서 시신이 되면 갑자기 무서워진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거리감이 생기고, 무엇인가 강렬한 기운으로 찍어누르는 듯해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사기(死氣)라고 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사기는 없다.
죽은 사람이 무슨 기운을 끌어내겠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사람 몸에는 생기가 떠난 자리만 있다.
평소 느끼던 생기를 느끼지 못하게 되니까 이상해지는 것이다.
편안하게 해주던 요소가 사라지니 무섭게 느껴진다. 그것을 사기라고 한다.
기운을 발산하는 것, 아무런 기운도 일으키지 못하는 육체.
호발귀는 이런 모습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서도 읽을 수 없다.
‘없다. 아무것도.’
호발귀는 분명히 분명히 공격하는 자를 봤다.
등여산의 팔에 상처를 내고 지나가는 물체를 봤다.
정확하게 인상착의를 본 것은 아니다. 사람 비슷한 것이 공격하고 바로 숨는 것만 봤다.
그래서 매우 빠르게 달려왔는데…… 그래도 놓쳤다.
놓치는 것까지는 좋다. 상대방이 흘리는 생기를 쫓아가면 즉시 따라붙을 수 있다.
후후! 상대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아무것도 없다. 텅 비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호발귀도 처음 겪어보는 이상한 현상이다.
‘이건 뭐지? 혈마인가, 아니면 무공인가?’
호발귀는 눈살을 좁혔다.
토초가 만든 혈마는 생기가 읽힌다. 넋은 빠졌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목숨, 분명하게 생기를 드러낸다.
호발귀가 상대를 느끼지 못하려면 생기를 완전히 죽여버려야 하는데, 인간은 불가능하다. 숨이 흐르면 생기도 저절로 드러난다. 하지만 혈마라면 가능하다.
‘그런 혈마가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지. 혈마인가?’
호발귀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쾌속한 신법이 무공이 아니라 혈마의 움직임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혈마는 숨을 죽일 수 있다지만, 혈마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산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혈마의 생기는 읽지 못해도 혈마를 조정하는 자는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혈마후와 같은 존재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혹, 혈마 혼자서 움직인 건가?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혈마가 혼자서 움직여? 그것도 은밀히 숨어서 기습을 취해? 글쎄…… 그럴 수 있나?
호발귀는 멍하니 주위를 쓸어봤다.
“정말 아무도 없어?”
등여산이 물었다.
호발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곧 좌우로 흔들었다.
“자신할 수 없어.”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등여산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방금 자신할 수 없다고 말한 거지?”
“자신할 수 없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떠났을 수도 있고. 충분히 기습에 대비하고 천천히 물러서.”
등여산이 재빨리 임명강을 쳐다봤다.
임명강이 등여산의 뜻을 읽고 즉시 말했다.
“밀집해서 천천히 이동한다! 공격이 있을 수 있으니 바싹 긴장하고 움직여!”
스스스슷! 스스슷!
검벽 무인들이 질서 있게 후퇴했다.
“어떻게 된 거야?”
등여산이 살며시 물었다.
검벽 무인들이 옆에 있어서 궁금한 점을 참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약간 벌어지자 즉시 물었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호발귀가 자신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니.
“생기를 감지하지 못했어.”
호발귀는 사실대로 말했다.
“정말로? 그런 일도 가능해?”
등여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혈기에 관해서 깊이 연구했다.
혈마 당사자인 호발귀보다는 못하지만, 혈마를 제외하고는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혈기는 생기의 변형, 오염이다.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말로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오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실은 오염이라는 말은 틀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변한 것이 없는데 변한 상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룬다.
이럴 경우, 남자는 변한 것인가 변하지 않은 것인가.
남자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게 변했다고 할 수 있다.
혈기가 그렇다. 생기 더하기 탁기다. 탁기에 오염된 것이 아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된 상태다. 그래서 힘은 두 배로 늘어나고, 성질은 황폐해진다.
탁기를 보탠 만큼 효과가 일어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기는 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탁기를 묻혀서 돌아온다.
본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선택의 여지는 전혀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탁기를 흘렸을 것이고, 생기가 묻혀서 돌아왔을 것이다.
절대로 모를 리 없다.
호발귀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러면 눈 깜짝할 순간에 생기가 찾아낼 수 없는 거리까지 벌어졌다는 것인데, 인간이 그 정도의 신법을 펼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벗어나야 하는데?
호발귀가 말했다.
“이게 혈마인지 무공인지 모르겠어.”
“무공은 아냐. 이런 무공이 존재한다면 혈마도 어쩌지 못하는 천하제일인이겠지?”
“또 기습해 오겠지?”
“뭔가 약점이 있으니까 널 피하는 거야. 그렇지 않았으면 너하고도 승부를 가렸겠지. 그런데 도주했잖아. 네가 같이 움직이는 한, 습격은 없을 것 같은데?”
등여산이 말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이 정도 공부라면 충분히 호발귀와 싸울 만해. 아니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호발귀도 장담하지 못해. 신형을 잡아내지 못했잖아. 무공이든 혈마든.’
등여산은 상대방의 기습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검벽 무인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몇 걸음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지 모를 자는 호발귀의 혈마 무공까지 속여넘겼다.
무공이든 혈마 능력이든 대단하다.
분명히 다시 습격해 올 수 있다. 그래도 호발귀를 안심시켰다.
이제 막 동굴 철삭에서 벗어나 세상 공기를 마시지 않았나.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해줘야지.
“찾는 것은?”
등여산이 호발귀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호발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혈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아니면 본인 스스로 구혼음소를 읊조리는 방법……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금 호발귀가 혈만 무공을 쓴다면, 그 곁에는 등여산이나 홀리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호발귀 주에는 세 사람이 더 있다.
도천패와 해자수는 사내라서 처음부터 구혼음소를 외우지 않았다. 당홍은 등여산만큼 암기가 뛰어나지 못하다. 단시일에 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등여산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홀리와 나, 둘 중의 한 명은 꼭 내 곁에 있을 거야.”
등여산이 호발귀에 손을 꽉 쥐었다.
동굴 속에서 충분히 수련한 후에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습이 있었고, 검벽 무인 절반이 쓰러졌다.
상대는 혈천방주가 보낸 자로 추측된다. 검벽 무인을 가차 없이 베었다. 그럴만한 조직이나 문파는 혈천방밖에 없다.
기습은 또 있을 것이다.
“지금 바로 천살단으로 움직여야 해.”
등여산이 말했다.
임명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까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등여산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검벽은 고맙다는 말, 안 해도 돼요.”
임명강의 눈에 이체가 번뜩였다.
“저한테 옛날처럼 대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저는 어차피 파문당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제게 검벽은 모두가 친구들이에요. 내가 마인을 남편으로 맞이했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부담 갖지 마세요. 저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등여산은 진심을 말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임명강이 생각을 돌리지는 않는다.
검벽은 철저하게 임무 우선이다. 모든 행동이 명령에 맞춰져 있다. 다만, 천살단까지 가는 동안 호발귀와 자신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가는 길, 괜히 감시한답시고 심력 낭비하지 말라고.
임명강이 고개를 돌리며 명령했다.
“출발!”
* * *
“크크크! 어때? 만족하냐?”
키 작은 괴인이 말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이건 완전한 신병기야. 인간병기. 자넨 무기 역사를 바꿔놨어.”
동네 할아버지처럼 포근한 인상을 지닌 노인, 천살단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큿큿큿!”
괴인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자네가 보기에 호발귀는 어떤가?”
“큿큿! 저놈…… 묘해. 재미있는 놈이야.”
“연구해볼 가치가 있을까?”
“있지. 있어. 큭큭큭!”
괴인이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일단, 호발귀는 인간병기를 잡아내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공격을 펼쳤는데도.
천살단주가 말했다.
“이곳은 숨을 곳이 많아. 공격하고 숨기 쉬운 곳이야. 만약, 숨을 곳이 없는 곳에서 사우면 어떻게 될까?”
“그런 곳에서 왜 싸워? 숨을 곳이 천지인데.”
“자신을 해줘야 호발귀를 끌어들이지. 자칫하면 범을 안방에 들여놓게 되잖아.”
“킥킥킥! 형옥으로만 보내. 그곳이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 저놈을 잡으면 내 거라는 거 잊지 마. 킥킥!”
“신났군. 그렇게 좋은가?”
“이놈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개떡이 되는 거였지. 다행히 이놈이 완성되어서 이제 내 이름은 천하에 빛날 거야. 자네 이름 위에 내 이름이 있는 거라고. 킥킥킥!”
“쯧! 이제 곧 죽을 나이에 공명심은.”
“네놈은 그래서 검벽이 죽어 나가도 태연한 게냐? 그래도 네 놈 목숨 지키겠다는 놈들인데.”
“대를 위한 희생이겠지. 후후! 장례는 잘 치를 검세.”
“죽은 놈한테 장례가 뭔 필요 있어. 큭큭!”
천살단주와 괴인은 세상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들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호발귀로부터 백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능선에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말하는 중이다.
한쪽에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숨을 쉬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쉬기는 했다. 무척 가늘고 깊은 숨이다.
보통 사람이 숨을 열 번쯤 쉴 때 그는 한 번 쉬는 것 같았다.
매우 길게 들이쉬고, 매우 길게 내신다.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어떠한 기척도 일으키지 않는다.
눈빛도 죽었다. 두 눈은 어떠한 감정도 떠올리지 않는다.
차디찬 눈이 아니다. 차가운 눈은 오히려 감정이라도 있다. 무심하게 죽어 있는 눈이다.
“수고했네. 잘 숨겨놓고 있어.”
“킥킥킥! 킥킥!”
만족스러운 웃음이 넓은 산속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