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八章 제삼마(第三魔) (5)
삐익! 삐익!
가죽 피리 소리가 울렸다.
입으로 부는 일반 피리 소리가 아니다. 손에 쥐고 누르는 가죽 피리 소리다.
“이 소리는!”
등여산은 검벽의 신호 체계를 잘 안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경각심을 높이는 방법 중 제일 좋은 것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힘껏 소리 지르는 것처럼 좋은 연락 방법은 없다.
그래서 암습자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죽인다.
손바닥 피리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되었다.
손바닥에 가죽 피리를 붙여 놓고 있다가 해를 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무조건 꾹 누른다. 실수해도 좋으니까 누르고 본다.
검벽에게 가죽 피리를 추천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이 소리를 모를 리 없다.
“검벽이 기습당했어!”
그녀는 바로 뒤돌아섰다.
지금 울린 소리로 보면 검벽 무인은 살해당했다.
살아있을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연타를 친다. 경각심이란 소리가 클수록 좋다. 적이 나타났는데 ‘적이다’하고 속삭이는 사람은 없다. 온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친다. 더 빨리, 더 넓게 퍼져서 모두가 알게 해야 한다.
연타를 치지 못하고 짧게 한두 번으로 피리 소리가 끝났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야 울렸다는 뜻이다.
등여산은 즉시 신형을 돌려서 검벽을 향해 쏘아갔다.
임명강과 헤어진 후 미처 오십 보도 걷지 않았는데, 거리가 삼사십 장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새 이런 일이 벌어졌나.
등여산은 골짜기를 향해 달려오는 검벽 무인과 만났다.
“윤량(尹亮)!”
등여산은 검벽 무인의 이름을 불렀다.
아는 자다. 키는 작지만, 몸집은 단단하다. 또 몸이 민첩해서 날다람쥐라고 불렸다.
“책사님!”
윤량도 등여산을 알아봤다.
검벽 무인들은 등여산을 냉대하고 적의를 품었지만,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을 다 잊었다.
그녀를 옛날처럼 책사라고 부른다. 등여산도 윤량 이름을 불렀다.
입에 베인 습관이다. 몸에 밴 반가움이다.
“어떻게 된 거야?”
“기습입니다.”
“기습? 누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전탐조 열 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벽주님께서 본대 무인에게 전탐조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같이 당했어요.”
등여산은 머릿속이 텅 비었다. 멍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검벽을 공격할 사람이 누가 있나.
혈천방은 절대 아니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설혹 공격을 가해왔다고 해도 전탐조 열 명을 비명 한 마디 흘리지 못하게 만들면서 죽일 만한 고수는 없다.
귀무살 총령 귀검이 직접 칼을 쓴다고 해도 가죽 피리가 서너 번은 울린다.
지금은 딱 두 번 울렸다.
먼저 죽은 자는 엉겁결에 누른 것이고, 나중에 죽은 자는 그래도 얼굴을 보기는 했다. 적을 봤을 때 한 번 눌렀고, 죽으면서 또 한 번 눌렀다.
나중에 울린 자 역시 연타를 치지 못했다는 것은 적을 보자마자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검벽주는?”
“뒤로 물러서는 것까지 보고 왔습니다.”
“윤량, 넌 이 길을 곧장 따라가. 가다가 아무나 만나면 무조건 제일급이라고만 말해.”
“알았습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모두 알아서 할 거야.”
“네.”
“가!”
등여산은 윤량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앞을 향해 쏘아갔다.
그녀는 진정 검벽 무인들이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삿! 사사삿! 사삿!
검벽 무인들은 질서 있게 이동했다.
임명강까지 여덟 명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어깨와 어깨를 맞닿은 채 사방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지금은 누가 공격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공격에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때,
삐익!
갑자기 측면에서 가죽 피리 소리가 울렸다.
임명강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전탐조, 본대, 암행조는 각각 다른 무공을 수련했다.
전탐조는 수색에 필요한 무공은 모두 섭렵했다.
안광은 고양이 눈처럼 밝다. 풀잎이 밟힌 흔적도 가뿐하게 찾아낸다. 자연이 만든 환경과 인위적으로 조성한 흔적을 명확하게 판별해낸다.
매복자가 전탐조를 피하기는 무척 어렵다.
암행조는 도주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무공도 모두 도주에 집중되어 있다.
암행조의 은신술을 가히 천하제일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살단주를 안전하게 도주시키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다.
은신술은 물론이고 신법도 상당히 뛰어나다. 상황판단도 누구보다 빠르다.
한 마디로 여우처럼 약은 자들로 구성했다.
그런데 숨어 있는 위치를 들켰을 뿐만 아니라 전탐조와 마찬가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어떤 놈이냐!’
임명강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적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장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어떠한 움직임도 보지 못했다.
깊은 밤이라면 모르겠다.
지금은 대낮이다. 앞이 환히 보인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 나가는 데도 본 것이 없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이 따로 없다.
임명강은 즉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삐익! 삐익! 삐익!
휘파람을 세 번 불었다.
암행조에게 은신술을 풀고 나와서 본대에 합류하라는 신호다.
암행조 무인이 당한 이상 더는 은신술을 믿을 수 없다.
모두 나와서 본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본대 무인은 사력을 다해서 싸우는 게 임무다.
천살단주가 기습을 받았을 때, 암행조가 도주할 수 있게끔 충분히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본대 무인들은 독랄한 무공을 수련했다.
서른 명 중 무공은 본대 무인들이 제일 강하다.
설혹 누가 누구를 보호해 줄 수 없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한데 뭉쳐서 싸워야 한다.
스스스스! 스스스!
암행조가 모습을 드러내서 본대에 합류했다.
나타난 사람은 여섯 명이다.
네 명이 나오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절명했다.
네 명 중 가죽 피리 소리로 울린 자는 한 명이다. 세 명은 그야말로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었다.
암행조는 서로 간의 거리를 벌리고 숨는다.
한 사람이 공격당해도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을 만큼 간격을 넓게 펼쳐놨다.
암행조 무인 네 명을 죽였다는 것은 적어도 십 장 거리를 이동하면서 죽였다는 소리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면서 사람을 죽였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길 이토록 기척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음!”
임명강은 침음했다.
아무래도 불길하다. 검벽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뼈를 묻을 것 같다.
쉬이이잇!
등여산이 물찬 제비처럼 날아와 임명강 앞에 섰다.
그녀는 구진을 슬쩍 쳐다보는 것만으로 현재 상황을 한눈에 읽어냈다.
‘암행조까지 당했어!’
등여산이 주위를 쓸어보며 물었다.
“누구예요?”
임명강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입에 담았다.
“난 이게 호발귀 짓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했다. 이 정도로 고도의 살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혈마밖에 없지 않나.
“아뇨. 호발귀는 지금 묶여 있어요.”
“묶여 있다고!”
임명강이 놀랐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든 혈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에요. 온갖 방법을 다 써보고 있죠.”
“그럼 지금 혈마 상태?”
“아뇨. 혈마가 되었을 때, 빠져나오는 수단을 취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출발을 늦춘 거고. 십여 일 정도 더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방법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등여산은 말을 하면서도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별다른 기척은 없다. 내력을 가득 끌어내서 주위를 살펴봤지만, 기척이 전혀 없다.
살수는 떠난 것 같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움직여!”
임명강이 명령을 내렸다.
사삿! 사사사 사삿! 사사삿!
그들은 충분히 주의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스스스스!
기척이 들린다. 왼쪽에서 뒤로 달려간다. 뱀처럼 은밀하고 표범처럼 빠르다.
탓! 쉐에엑!
등여산은 즉시 설화팔보를 밟았다.
신형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동시에 설화팔극검이 좌후방을 향해 펼쳐졌다.
쒝! 쒝! 쒝! 쒝!
검광이 풀숲을 훑었다.
땅속을 기어가는 두더지가 있어도 사지가 갈가리 찢길 정도로 날카로운 일격이다.
스스스!
등여산은 한 사람을 봤다.
옆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설화팔극검을 벗어나서 유유히 숲으로 스며들었다. 그때,
풀썩!
구진을 형성하며 쫓아오던 본대 무인이 목을 움켜잡고 힘없이 쓰러졌다.
쿨럭! 콸콸!
목에서 붉은 피가 샘물처럼 솟구쳤다.
피가 흘러나오는 양으로 보면 단숨에 목동맥을 잘라낸 것 같다.
“아!”
등여산은 탄식했다.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매우 빠르게 반응했는데도 그림자밖에 보지 못했다. 기습을 막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봤어요?”
“못 봤습니다.”
임명강이 다시 존대했다.
존대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다. 임명강 역시 입에 붙은 습관대로 말하고 있다.
“일단 적은 한 명…… 탓!”
등여산은 말을 하다 말고 급하게 검을 쳐올렸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뚝 떨어져 내린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공격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윳! 싸아아악!
날카로운 칼이 오른쪽 팔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쭉 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파아앗!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손끝을 타고 떨어졌다.
‘너무 빨라!’
등여산은 진정 이토록 빠른 검은 보지 못했다.
빠름으로만 보면 단연 제일이다. 호발귀나 귀검도 이처럼 빠르지는 못할 것 같다.
“부상이 심합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앞! 앞을 봐요!”
등여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쒜에에엑!
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친다. 엄청난 폭풍이 몰려온다.
“하아!”
등여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일어난 바람, 신법 마형귀적이 일으키는 흔적이다.
지극히 은밀한 신법이지만 은밀함을 버리고 속도에만 치중하면 저런 광풍이 생긴다.
달려오는 사람은 호발귀다.
“다쳤어?”
호발귀는 오자마자 등여산의 상처부터 살폈다.
“스친 정도야.”
“스친 게 아닌데? 뼈가 보여. 상당히 깊게 베였어.”
호발귀는 금창약을 꺼내서 상처에 뿌렸다.
적이 근처에 있다. 언제 공격해올지 모른다. 하지만 등여산은 검을 늘어트릴 정도로 안도했다. 호발귀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를 살피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호발귀이지 않은가.
“굉장히 빠른 자야. 지금 어디 있어?”
등여산이 붉은 핏물 위에 뿌려지는 하얀 가루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호발귀는 생기를 읽는다. 제아무리 은밀하게 숨어 있어도 즉시 찾아낸다.
호발귀가 말했다.
“근처에 없어.”
“뭐?”
“이 근처에 없어. 산 사람은.”
“이상하네? 나 방금 급습당했어. 그자가 아무리 빨라봤자 이십 장을 벗어나지 못해. 넌 이십 장 밖에 있는 사람도 찾아낼 수 있고. 이건 뭔가 이상해.”
등여산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