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七章 암류(暗流) (5)
“내가 천살단에 다녀올게.”
등여산이 말했다.
그녀는 이미 파문당했다. 천살단 출입은 물론이고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래도 호발귀를 위해서 가보려고 한다.
천살단 정보가 아니면 혈천방의 종적을 알아내지 못한다. 어디로 숨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 하지 마.”
호발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강하에서 혈천방이 사라졌을 때도 어디로 숨었는지 몰랐다면서? 지금도 그럴 거야. 천살단에 가봤자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전혀 없어. 있어도 알려주지 않을 거고.”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난 내 여자가……”
호발귀가 등여산의 말문을 막았다.
모두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가 지금 한 말, ‘내 여자가’라는 말은 어떠한 밀어(蜜語)보다도 달콤하다.
그 말이 무뚝뚝한 호발귀 입에서 나왔으니 뒷말이 더 궁금하다.
“뭐?”
호발귀가 말이 없자, 등여산이 캐물었다.
“나도 궁금한데. ‘내 여자가’ 뭐?”
홀리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머리 숙이지 마. 비굴한 말도 하지 말고.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하지 마.”
호발귀가 말을 내뱉자마자 일어섰다.
호발귀는 서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혈천방주를 놓쳤으니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혈천방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옛날처럼 귀문을 찾아다니면서 박살을 내는 방법도 없다.
혈천방은 더는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
귀무살도 마찬가지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시비를 걸고 싶어도 걸 데가 없다.
복수하는 길이 막혔다. 사부를 찾는 방법도 없다.
사방을 둘러보면 갈 곳 투성이인데, 막상 발길을 옮길 곳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혈천방은 반드시 돌아와.’
맞다. 지금은 준비하는 단계라서 혈마를 건드리지 않는다.
호발귀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했다.
장점도 약점도 거머쥐고 있다. 그러니 준비만 충실하면 사냥할 수 있다.
혈천방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잡아채기 위해서 준비 중이다.
‘그 전에 내 무공을 정리해야 해.’
호발귀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까지는 혈마 무공을 될 수 있는 대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혈마 무공은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모든 무공이 혈기로 터진다.
무공은 사용하되 혈기 사용은 최대한 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억눌러도 혈기는 일어난다.
빨리 일어나고 늦게 일어나고의 차이만 있을 뿐 혈기는 반드시 일어났다. 원래 생기, 혈기의 관계가 그렇다.
생기가 오염되면 혈기가 된다. 그러니 막을 방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그 무진 고생을 했다.
생기가 오염되면 혈기가 된다. 혈기는 정화되어 다시 생기로 돌아온다.
다만 제대로 정화되지 않으면 미치광이로 남는다. 완벽하게 정화되어야만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느 경우든 혈기가 일어나는 것은 막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해가 지고 뜨는 것처럼 생기와 혈기의 순환은 자연 흐름이다.
그래서 혈기를 내버려 둔다. 다만 혈기에서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수단을 취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길 안내는 홀리가 했다.
호발귀가 ‘수련’을 입에 올리자마자 즉시 그를 이끌고 보름 거리를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등여산이 물었다.
“천음산(天陰山) 혈옥(血獄).”
“천음산? 혈옥?”
“혈마 뇌옥.”
“그런 데가 있어? 이름만 들어도 섬뜩하네. 하기는…… 혈마를 가두는 뇌옥이라면. 그건 언제, 누가 만든 거야? 혈천방? 음문촌?”
“나. 내가 만들었어.”
“……?”
“혈천방에 토방이 있었어. 내가 갇혔던 곳. 그곳을 본떠서 만든 곳이야. 호발귀가 혈마가 되면 죽여야 하는데…… 죽여야 한다는 건 알지. 그런데…… 죽일 수 있어?”
홀리가 등여산을 쳐다봤다.
등여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혈마가 되어서 세상을 피로 물들이면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그때는 정말로 호발귀를 죽이기 위해서 검을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혈마로 변하는 순간은 아니다.
그렇다. 죽이지 못한다.
마음은 반드시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믿는다. 오죽하면 혈마가 되어서 자진한 사람까지 살리려고 했을까.
등여산의 마음을 읽은 듯 홀리가 말했다.
“나도 그래. 못 죽여. 하지만 미쳐서 날뛰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일단 가둬둘 장소를 마련했어.”
“아! 그런데 언제? 혈천방에서 떠난 적도 없잖아.”
“해자수.”
“아! 어쩐지 안 보이더라.”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어이구, 안 왔으면 했는데 왔네. 여기 와서 좋을 거 하나 없는데. 그런데 맨정신으로 왔네?”
해자수가 일행을 보고 반색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나 잡아둘 곳을 마련하고 있었네?”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모실 곳을 마련했는데. 킥킥! 어때? 몸은 괜찮고?”
해자수가 호발귀의 몸을 톡톡 건드렸다.
“화약고. 건드리면 터져.”
“아이구! 무서워라.”
해자수가 급히 손을 움츠렸다.
해자수는 자연 동굴을 다듬어서 뇌옥으로 개조했다.
동굴 벽에 어린아이 몸통만 한 철정(鐵釘) 네 개를 박아놨다.
철정을 만들어서 바위에 박은 것이 아니라, 바위에 구멍을 뚫고 쇳물을 흘려 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철정에는 굵은 철삭이 묶여 있다.
지심옥에서 혈천방주가 호발귀를 묶은 철삭보다 더 두텁고 강해 보인다.
작업은 어렵지만, 천하장사도 뽑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
“딱 좋아.”
호발귀는 모처럼 만족했다.
“나 되게 겁나. 알지?”
홀리가 말했다.
“시작하자.”
호발귀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일의 경우, 혈기를 통제하지 못하더라도 동굴 밖으로 뛰쳐나갈 염려는 없다.
단단한 철삭이 사지를 묶었다.
만약 정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이곳에서 사지가 묶인 채로 죽어가야 한다.
“어떻게 시작하면 돼?”
“시작은 내가 할 거고. 내가 혈마로 변하면 알지?”
“알았어. 해.”
“휘우!”
홀리가 말했고, 등여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등여산도 이 과정이 피치 못하다는 것을 안다.
이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겨내야 한다.
츠으으읏!
호발귀가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역천금령공을 운기하고, 운기하고 또 운기한다.
쿠우웅! 쿠웅! 쿠우웅!
밖에서는 들리지 않지만, 내면에서는 거대한 울림이 일어나고 있다.
진기가 순환하는 소리인데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해 오는 듯 요란하다.
촤아앗!
역천금령공을 실은 진기가 몸 밖으로 발산되었다. 그리고 다시 거둬들였다.
‘후우웁!’
호발귀는 당장 혈기를 느꼈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맑은 진기가 오염되었다.
장소 탓을 할 수도 없다.
천음산은 음기가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물이 많고, 그늘이 많다.
덕분에 음지식물이 많이 자란다. 뱀이나 지네 같은 독충은 손만 뻗으면 잡힌다.
혈기를 일으키는 땅이 아니라 오히려 꾹 눌러주는 땅이다.
해자수가 혈옥 장소로 천음산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은 인간의 영역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기운의 영역에서 움직인다. 음기 속에 섞인 탁기에도 당장 오염된다. 그리고 혈기로 둔갑한다.
퓨우우웃!
호발귀는 손가락을 놀려서 혈천도법을 펼쳤다.
손가락을 통해서 역천금령공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혈겁도, 혈신삼분, 혈흉개홍…… 혈천도법의 정수가 줄줄이 풀어졌다. 손가락으로 그려낸 도법이다.
츄아앗! 퓨우웃!
호발귀는 혈마가 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강력하게 혈기를 사용했다.
“웃!”
“헛!”
홀리와 등여산은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강기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호발귀는 철삭에 묶여 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다. 앞으로 반보, 뒤로 반보. 앞뒤를 합쳐야 간신히 한 걸음이 된다. 딱 그 정도의 거리밖에 움직이지 못한다.
옆으로도 마찬가지다. 겨우 반보 정도 움직이는 게 고작이다.
전후좌우 한 걸음이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이다.
그만한 공간에서 무공을 떨쳐내고 있는데, 그 여파가 칼날이 되어서 몰아친다.
“훨씬 강해졌어.”
홀리가 중얼거렸다.
“힘으로 부딪쳐도 대력도강을 누를 거야.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그랬잖아. 석벽을 부쉈다고. 이만한 힘이 있으니 석벽을 부술 수 있었던 거지.”
등여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해야 할 수련을 하는 중이지만 영 못마땅하다.
피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사서 혈마가 되겠다니.
“크크크크크!”
호발귀가 괴소를 흘렸다.
“저 정도면 혈마가 된 거 아니야?”
등여산이 불안한 눈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아니. 아직 안 됐어.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어야 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 거고. 보면 알아.”
흔히 혈마라고 하면 살인에 미친 살인마를 말한다.
그런데 호발귀의 경우에는 살인과는 상관없이 진짜 혈마다. 온몸이 붉은 핏빛으로 물든다.
첫 번째 증상은 눈에서 일어난다. 눈이 핏빛으로 물든다.
두 번째 증상은 피부에서 나타난다. 얼굴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해서 전신이 핏빛으로 달아오른다.
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크크크크! 크크크!”
호발귀가 연신 괴소를 토해냈다.
“아직도 아냐?”
“이제 전초야.”
“이게 전초?”
등여산은 입을 쩍 벌린 채 호발귀만 쳐다봤다.
그녀도 호발귀가 혈마로 변하는 모습을 봤다.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 정도만 해도 혈마라고 칭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데.
지금 호발귀의 모습은 등여산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매우 사나운 모습이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 모습이야. 그런데 이게 전초라고? 도대체 뭘 본 거야.’
등여산은 홀리를 흘깃 쳐다봤다.
그녀는 홀리가 지심옥에서 본 혈마를 상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도 안 된다.
“크크크크! 끄으으으윽!”
호발귀가 괴음을 질렀다. 입가로는 침을 질질 흘러 흘리고 있다.
두 눈은 시뻘겋게 변했고, 안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조금 더 놔둘까?”
홀리가 말했다.
“혈마가 된 거 맞지?”
“이 정도면 맞아. 아직 정심을 꿰뚫지는 못한 거 같고. 시작한 김에 더 놓아두는 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호호! 겁먹었구나?”
“그래. 나 겁먹었어. 심장이 떨려.”
등여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호발귀의 겉모습만 본 게 아니다. 호발귀의 몸에서 뿜어지는 진기를 봤다.
살기! 엄청난 살기!
호발귀는 홀리와 등여산을 죽이려고 한다.
마치 배고픈 늑대라 병아리를 보았을 때 떠올리는 폭군의 모습이 보인다.
손가락으로 그려내는 혈천도법이 자꾸 두 사람에게 뻗쳐온다.
호발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이번 한 번으로 깨달음 같은 걸 얻기는 무리겠지?”
홀리가 등여산을 보면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