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七章 암류(暗流) (3)
삐리리리! 삐이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으면 밤새 우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분명히 피리 소리다. 그리고 홀리는 누구보다도 이 피리 소리에 대해서 잘 안다.
자신을 불러내는 소리다.
홀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또 피리 소리가 울렸다.
삐이이이! 삐리리리……!
피리 소리가 새 울음소리를 포기한 채 날카롭게 들렸다. 이제는 누가 들어도 피리 소리다.
“나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등여산이 말했다.
홀리는 아랫입술만 잘근 깨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음문촌 사람들,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녀에게 가족의 의무를 다하라고 재촉한다.
음문촌 사람들의 사활이 관련 문제를 풀어내라고 재촉한다.
음문촌에는 아버지와 형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음문촌에 일신을 의탁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변을 당했지만, 여전히 상당수는 몸을 빼내서 다른 곳에 은신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촌장으로 받들어 모신다.
언젠가는 혈마를 모시면서 중원을 활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촌장과 홀리가 중원에 나가서 할 일이 바로 혈마를 장악하는 일이다.
음문촌 사람들은 촌장 가족이 그 일을 해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가족 간의 인연을 끊어버리면 되지 하고 간단하게 칼로 무 자르듯이 잘라 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삐이익! 삐리리리!
피리 소리가 밤을 뚫고 들려왔다.
“나가 봐. 어떤 것은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더라고.”
등여산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홀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아버지.’
예상대로다. 피리를 분 사람은 아버지와 다섯 오빠다. 원래는 토로도 같이 있어야 하는데.
“지심옥에서는 수고했다.”
촌장이 여느 때와 다르게 다정하게 말했다.
“쉬는 중이었어요.”
“사람이 가장 마음 편할 때는 가족과 함께 할 때지. 여기서 푹 쉬어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그런가요?”
“그럼.”
“그럼 저는 가장 안전한 분에게 죽을 빤 했네요? 얼마 전에.”
“안전에는 단서가 붙지. 가족을 배신하지 않았을 때, 가족을 위험에 빠트릴 때.”
“풋!”
홀리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땅바닥에 앉았다.
아버지와 다섯 오빠가 편한 모습으로 땅에 앉아 있다.
낯선 모습은 아니다. 음문촌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땅에 앉아서 식사도 하고, 회합도 연다.
“혈천방주가 왔더구나. 네가 혈마를 조정했다고?”
“그런 말을 해요?”
“자식이 한 일을 남의 입에서 듣게 하다니.”
“호호호! 우리 인연, 끝난 것 아니었어요?”
“후후후! 핏줄이 말 몇 마디로 끊어질까. 정 인연을 끊고 싶으면 칼로 심장을 찔러서 내가 준 피를 모두 뽑아내야겠지. 뼈와 살덩어리 정도는 그냥 줄 수 있고.”
음문촌장이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들어보자. 혈마를 어떻게 조정했는지.”
‘불쌍한 분.’
홀리는 처음으로 음문촌장의 현 위치를 정확히 알았다.
혈천방주처럼 기고만장하지도 못하고, 천살단주처럼 명예를 얻지도 못했다.
겨우 조무래기 몇 명 거느리고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뭐라도 된 듯 설쳐댄다.
당금 무림에서 음문촌장을 아는 사람은 없다.
오라버니들로 문제다. 이 사람들의 무공은 절대 약하지 않은데, 이 나이가 되도록 무명 하나 얻지 못했다.
이것이 음문촌의 현주소다.
혈마, 혈마, 혈마…… 도대체 혈마가 뭐라고. 혈마가 옆에 있으면 뭐를 하려고?
홀리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면서 말했다.
“아버지, 오빠. 혈마 포기해요.”
“포기? 후후! 혈마하고 배 맞았다, 이거냐? 배 붙었으니 이제는 혈마 천하고 뭐고 필요 없다 이거지?”
이자가 외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말 그런 식으로 하다가 혓바닥 뽑혀.”
“하하하! 그래, 이제 너답네. 그렇게 가시를 세워야지. 아버지? 하하하! 몸에 두드러기 나는 줄 알았네. 하하!”
이자가 비웃음을 가득 담고 말했다.
홀리는 이자를 노려보다가 음문촌장을 보며 말했다.
“우리 음문촌에 전해지는 구혼음소, 세 개 다 호발귀에게 먹히지 않아.”
“뭐라고!”
“그럴 리가!”
여기저기서 동시에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홀리가 놀라운 말을 했지만, 거짓은 아니다. 홀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구혼음소가 전혀 통하지 않아요. 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나 내가 읊는 구혼음소나 호발귀에게는 똑같은 소리예요. 후!”
홀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네가 혈마를 조정했다고 들었는데?”
“지심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으니 아시겠지만…… 호발귀가 혈마로 변해서 무인들을 때려눕힐 때, 제가 구혼음소를 읊은 줄 알아요? 알 수 있잖아요. 한 명 잡아서 정확하게 구혼음소를 읊었는지 아닌지 알아보세요.”
“그럼 어떻게 혈마가 돌아온 거냐? 귀색혼령대법만 사용했나?”
이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내 말 믿어. 호발귀에게는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아. 그때 내가 한 말은 ‘하지 마’가 다야. 호발귀가 이 말을 듣고 멈춘 것인데, 방주가 말하는 것처럼 나를 알아봐서 멈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멈추려고 해서인지는 알지 못해.”
“으음!”
음문촌장이 신음했다.
홀리의 말과 혈천방주의 말이 맞아떨어진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밖에 없었어. 무기를 들면 혈마에게 숨이 끊겨. 이건 분명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혈마 앞에서 무기를 들면 죽어. 그러니 무기는 들 수 없고 구혼음소는 힘을 못 쓰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버지, 혈마 그만 포기하세요. 우리 손에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좌중은 조용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여섯 명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홀리가 하는 말은 음문촌 사람들의 존재 이유를 상실시킨다.
이제 앞으로 음문촌은 혈마를 모시는 집단이 되지 못한다는 소리다. 암중으로 혈마를 조정하면서 무림을 지배한다는 생각도 물 건너 갔다.
이백 년 동안 혈마를 기다리면서 지내온 세월이 헛되이 무너졌다.
한참 만에 촌장이 말했다.
“혈마를 만들어 줘야겠다.”
홀리는 눈을 사납게 치켜뜨고 촌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네가 토초를 죽였으니 인제는 혈마를 만들 사람이 없어. 우리 부족을 생각한다면 혈마를 만들어라.”
“거절해요.”
“후후! 거절이라는 말은 네가 할 말이 아니야. 네 입에서 나올 말은 ‘네’라는 말뿐이다.”
음문촌장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인연 끊어야겠네.”
홀리가 사납게 말하며 일어섰다.
“네가 혈마를 만들지 않는다면!”
홀리가 일어서기 무섭게 촌장이 고함지르듯 말했다.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촌장님!”
홀리는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촌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홀리가 늘 사용하던 호칭이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호칭이 어색할 판이다.
음문촌에는 귀색혼령대법에 버금가는 또 다른 대법이 있다.
혈마후의 도움 없이 혈마를 만드는 방법이다.
독초를 이용해서 체내의 잠력을 최대한 격발시킨다. 물론 독초에 중독된 시신은 죽어간다.
살이 썩고, 문드러진다. 고름이 생기고, 악취가 풍긴다.
그래서 극독을 이겨낼 새로운 극독을 주입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극독을 이기기 위해서 새로운 독을 투입하는 이독제독(以毒制毒) 수법이 열 차례나 진행된다.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견디지 못한다. 십중팔구는 마지막 열 번째 독이 투입되기 전에 죽는다.
만약 견뎌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머릿속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이미 뒤죽박죽 마구 헝클어진 상태다.
이때, 혈도를 약간 조정하면 살인에 미친 살인광이 된다.
여기서 귀색혼령대법을 시전한다. 구혼음소는 필요 없다.
음양쌍고를 사용해서 짝을 정해준다. 혈마를 조정하기 위해 주인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다.
이것은 음문촌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혈마 제련법이다.
한데 문제가 있다. 독을 주입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지간한 각오가 아니면 아예 도전하지조차 못한다. 또 내공도 매우 정심해야 한다.
현재, 음문촌에서 해당하는 사람은 촌장 자식들밖에 없다.
음문촌은 이렇게 해서 혈마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내공이 약한 자들로 시험해서 시험 도중에 모두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단지 이론상으로만 체계를 세워놓은 상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혈마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자신한다.
촌장의 말은 홀리의 오빠 중 한 명 또는 서너 명을 자발적 혈마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넌 어차피 부부지연을 맺었다면서? 그럼 이제 처녀도 아니고 굳이 몸을 아낄 이유도 없잖아. 혈마 몇 명만 만들어 놓고 가. 오빠들을 위해서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사자가 썩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홀리는 사자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봤다.
“됐어.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맙네.”
“뭐라고? 무슨 뜻이야? 해주겠다는 거지? 킥킥! 그럴 줄 알았다니까. 킥킥!”
사자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 말을 해주지 않았으면 굉장히 괴로웠을 거야. 혈마를 만들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한데 당신들, 지겨워. 가족? 가장 안심할 수 있다고? 난 당신들 틈에서 안심한 적이 없는데? 어차피 우린 이복형제잖아. 배도 다른 데, 핏줄 한쪽 섞였다고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홀리가 뒤돌아섰다.
“킥킥! 넌 항상 네 멋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더라. 네가 할 말은 ‘네’라는 말뿐이라는 거, 방금 아버님이 말했잖아.”
사자가 철퇴 두 자루를 들고 일어섰다.
이자고 일어섰다. 품에 검을 품고 홀리의 길을 막는 모양새다.
“촌장님, 길을 막을 거예요?”
“네가 자발적으로 해주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되면 억지로 할 수밖에 없지. 잡아.”
촌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때,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처벅! 처벅!
모두 발걸음 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음문촌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어렸다. 그들은 누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매우 뛰어난 고수다.
사람들은 나타난 사람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호발귀, 그가 걸어오고 있다.
“여기서 뭐해? 밤이 늦었는데.”
호발귀가 홀리를 보면서 말했다.
“왜 나왔어? 추한 모습 보여줬네. 후!”
홀리가 억눌린 한숨을 토해냈다. 홀리의 눈가에는 눈물도 글썽거렸다.
“가자.”
호발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음문촌장이 싸늘하게 말했다.
“자네는 장인과 처남에게 인사도 없나? 우리 홀리를 데리고 살려면 인사 정도는 해야지.”
음문촌장이 일어서서 호발귀를 쳐다봤다.
“인사, 하려고 했지. 음문촌에 대한 기억도 바꿔보려고 했고. 그런데 혈마를 만들라는 말을 듣고는 정나미가 떨어져서.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는데 이런 식으로는 곤란해.”
호발귀가 음문촌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음에 또 이런 식이면 용서가 안 되지.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혈마, 튀어나올 거야.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언제든지 시험해봐. 나는 무방하니까.”
호발귀가 검을 잡았다.
“지금 시험하겠다면 그것도 괜찮고.”
그러자 음문촌장이 한발 물러섰다.
“후후! 오늘 좋은 얘기를 했군. 했으면 됐지 뭐 꼭 추운 날에 피까지 볼 거 있나. 가자.”
음문촌장이 먼저 등을 돌렸다.
“오빠, 나랑 같이 가.”
홀리가 육자를 잡아 세웠다.
홀리와 육자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지내왔다.
음문촌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훗!”
육자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왕 등 돌리고 떠난 거, 잘 살아. 두 번 다시 음문촌에 기웃거리지 말고. 눈앞에서 음문촌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쳐다보지 마. 넌 그러지 못하는 게 약점이야. 그래서 일러주는 거고.”
“오빠.”
“나까지 떠나면 음문촌 사람들, 모두 살인 병기가 된다. 형들 입김이 세서 뭘 할 수 있을까마는……”
톡톡!
육자가 홀리의 손을 살짝 두들겼다.
“너 지금 정말 보기 좋은 거 알아? 얼굴색이 활짝 폈어. 저놈이 딴 여자에게 한눈팔면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촌장님을 노려보면서 한 말이 있는데. 기억해?”
“풋! 눈알을 파버릴 거야.”
“하하! 간다.”
육자가 홀리의 손을 밀어내고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