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六章 마존(魔尊) (5)
“네 사부! 사부의 행방…… 나 아니면 몰라.”
혈천방주가 쏟아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위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사부까지 생각할 수 있나. 배수 주제에. 당신이 죽으면 귀검을 찾도록 하지. 귀검을 족치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귀검을 족친다? 후후!”
“안 나와도 어쩔 수 없고.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했어.”
호발귀가 지친 듯이 말했다.
“이 석벽, 사면이 다 죽음이다.”
“난 죽음 상관없고, 당신도 괜찮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야? 아! 이건 좀 협박이 됐나?”
“끄윽! 이 졸음 좀 어떻게……”
혈천방주가 손을 들어서 자신의 머리를 탁탁 쳤다.
“졸음이 오면 억지로 쫓지 말고 빨리 자. 이를 악물고 버텨도 변하는 건 없어.”
혈천방주는 코와 눈 사이의 정명혈(睛明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뒤통수 아래 움푹 들어간 곳, 풍지혈(風池穴)도 눌렀고, 새끼손가락 소부혈(少府穴), 손목 신문혈(神門穴), 손목 안쪽 내관혈(內關穴)도 눌렀다.
졸음을 쫓을 수 있는 혈 자리는 모두 눌렀다.
방주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호발귀가 정말로 석벽을 무너트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독수가 흘러든다.
기관으로 열지 않고 힘으로 부수면 무조건 독수가 터져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좋아. 협박이 통했어. 기관을 열지. 그러니 이 졸음 좀……”
혈천방주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푹 떨궜다.
아니, 떨궜다 싶은 순간에 다시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졸음이 자득 덮인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환혼몽은 혈천방주 같은 사람을 잡기 위해서 만든 매우 강렬한 미약이다.
독의는 환혼몽을 만들면서 무인이라면 대처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전부 예상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혼몽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독단을 만들어냈다.
설마 잠 쫓는 방법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화살이 날아와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다.
자신의 진기로 혈맥을 터뜨려도 이겨내지 못한다.
막말로 말해서 검을 뽑아서 자신의 팔 하나를 자른다고 해도 잠속에 떨어진다.
“한 번 속아볼까 하는데.”
호발귀가 홀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한 번 속아보는 게 아니라 그냥 속는 거야. 혈천방주를 믿지 마. 믿을 사람이 못 돼.”
“홀리. 널 데리고 나가고 싶다. 한 번 더 속아보지 뭐. 내겐 환혼몽이 남아있으니 방주를 잠재우는 건 일도 아냐. 잠재우지 못하면 그냥 죽여도 되고.”
호발귀가 말하면서 혈천방주에게 다가왔다.
물론 이 말로 방주를 속이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방주는 두 사람이 죽기로 작정했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기관을 연다. 조금이라도 삶을 보이는 한, 절대로 열지 않는다.
“약속 지켜야 할 거야.”
호발귀의 손이 방주의 명문혈에 닿았다.
“빨리하지.”
방주가 말했다.
호발귀의 손이 명문혈에 닿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다.
무엇이 빠져나간다는 느낌, 진기가 움직인다는 느낌 아니면 어떠한 기운이 스며든다는 느낌 같은 것이 들지 않는다.
그냥 손만 얹어놓고 있다.
“하는 중이야.”
“운기하면서 말을?”
“독섬칠공에 대해서 전혀 모르잖아? 아는 척하지 말고.”
“후후후! 그런 말을 혈천방주에게 할 사람도 드물지.”
“독성을 뽑아내긴 해도 잔량이 남아. 이 미약은 워낙 독성이 강렬해서 한 일다경 정도 잠들었다 깨어날 거야. 짧게 잠드는 것이니까 마음 푹 놔도 돼.”
혈천방주는 호발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쿵 쓰러졌다. 잠에 떨어진 것이다.
혈천방주가 석벽을 더듬었다.
“뭐로 알아내는 거죠? 저희도 석벽은 살펴봤는데.”
“저 친구는 혈마가 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잖아. 우리가 서로 비밀을 공유할 사이는 아니지?”
“그렇네요.”
홀리가 피식 웃었다.
그때, 호발귀가 말했다.
“진기로 파악하고 있어.”
순간, 혈천방주가 놀란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이게 보여?”
“후후! 혈마 무공이 무엇을 이용하는지 알면서도 그런 질문은 하는 건 좀 그렇지?”
“후후! 그런가? 그렇군. 진기, 맞아. 진기로 파악해.”
혈천방주는 속이지 않았다.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다. 혈마의 눈은 생기를 본다. 생기의 움직임을 파악한다.
인간이 발출하는 모든 진기 속에는 생기가 스며있다.
호발귀가 진기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타악! 타악! 타악!
혈천방주가 진기로 벽을 친다. 강하게 치는 것이 아니라 톡톡 두들겨 본다.
터엉!
어느 한순간, 다른 곳과 다른 울림이 일어났다.
물론 울림이라고 해도 귀로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울리지는 않는다.
진기를 쳐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진기의 울림이다. 반탄력의 일종이라고 할까?
“이것도 봤어?”
혈천방주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파해법이 쉽군.”
“후후! 사멸강진의 파해법이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일 거다. 이건 절대 쉽지 않아. 방법을 안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지. 난 적어도 둔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 감각을 찾기까지 꼬박 일 년 걸렸어.”
혈천방주가 반탄력이 일어난 석벽을 힘껏 내리쳤다.
쉿! 퍼억!
석벽이 부서지며 작은 공간이 나왔다.
보통, 공간은 망치 같은 것으로 두들기면 소리가 울리는데, 이 공간은 너무 적어서 소리도 울리지 않는다.
오직 진기로만 알아낼 수 있는 정밀한 장치다.
진기를 퉁겨내서 공간이 만들어 낸 반탄력을 느껴야 한다. 진기가 매우 정순해야 하며, 공간을 읽는 감각도 뛰어나야 한다.
혈천방주 말대로 방법을 안다고 해서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혈천방주가 손가락을 넣어 걸쇠를 잡았다.
“이거 당기면 독수가 쏟아질 수도 있는데, 불안하지 않아?”
“헛소리.”
“그런데 사멸강진은 어떻게 알았지? 아는 사람이…… 아! 등여산! 후후! 책사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군.”
혈천방주가 피식 웃으면서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릉! 그르릉! 그르르……!
석벽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면서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홀리는 바싹 긴장한 채 열리는 문을 쳐다봤다.
문을 여는 사람이 혈천방주라서 안심하지 못한다.
언제 무슨 짓을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다.
등여산의 말대로라면 일단 그들은 작은 공간에 갇히게 된다.
독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다음이다. 석벽이 열리자마자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 들어갈까?”
혈천방주가 호발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뇨. 주인이 먼저 안내를……”
홀리가 거절하는 말을 할 때, 호발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왜?’
홀리가 눈으로 물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호발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홀리가 염려하는 것은 호발귀가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문이 닫히는 것이다.
그러면 꼼짝없이 밀실에 갇힌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혈천방주가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안에 갇힌다.
의심하면 끝이 없다.
가장 안심할 방법은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면 안심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혈천방주 같은 사람은 언제든 틈을 만들어 낸다.
혼자 떨어져 나가고자 한다면 살짝 고개만 돌려도 사라진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혈천방주의 마음이다.
호발귀는 살려두고 싶지 않지만, 혈마가 죽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혈마에게는 볼일이 많다.
모두 작은 공간으로 들어서자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왔다.
“화섭자.”
방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천방 무인이 불을 켰다.
방주는 석실 곳곳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도 기관 장치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석실을 여는 방법은 알지만, 사멸강진을 접하는 건 처음이다.
“이쪽이군.”
혈천방주가 사면 벽 중에서 석벽 하나를 택했다.
그르릉! 그릉! 그릉!
석벽이 요란한 소리를 울리면서 열렸다.
석벽은 함정에 들어서기를 강요한다. 열린 석벽이 다시 닫힐 때까지는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않는다.
함정도 떨어지지 않지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그르르르릉!
석벽이 다시 닫히고,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혈천방주는 한 시진에 걸쳐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석실을 적어도 열 곳은 거쳐왔다.
함정은 네 곳이다. 그 네 곳을 피하고자 멀리 빙 돌아서 움직여야만 한다
“마지막이다.”
혈천방주가 석벽에 있는 고리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그르르르릉! 그르릉!
이번 석벽도 어느 석벽과 다름없이 움직였다.
굉음도 같았고, 움직이는 속도도 같았다. 하지만 석벽이 움직이기 무섭게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주 말대로 마지막 석벽이 맞다.
“운 좋군.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햇살이었는데.”
혈천방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피차일반. 우리보다는 방주가 더 햇살 보기 힘든 상황이었지.”
그르르르릉!
석벽이 매우 느리게 열렸다. 하지만 이미 한 사람이 빠져나갈 공간은 열렸다.
다만, 서로 더 넓게 열릴 때까지 나가지 않고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단서라도 주지? 혈마, 됐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적한테 알려줄 말은 아닌 것 같고.”
“우리 혈천방, 혈마를 모시잖아. 어쩌면 널 방주로 모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야박한 거 아냐?”
“혈천방 앞에 서서 칼 노릇 할 생각 없으니 생각 접고. 방주, 향후 또 내게 칼을 들이대면 그때는 정말 숨 끊겨. 오늘은 사멸강진에서 벗어나게 해줬으니 놓아주지.”
“하하하하!”
혈천방주가 크게 웃었다.
“이거 어쩌지? 난 놓아줄 생각이 없는데.”
혈천방주의 눈에 붉은 혈기가 비쳤다.
혈천방주는 석실을 빠져나오는 동안 뇌옥 수하들에게서 호발귀에 대한 말을 들었다.
호발귀가 석벽을 깨고 달려드는 과정을 소상히 말해주었다. 더불어서 현재, 호발귀의 가장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탈진 상태에 대해서도 말했다.
혈천방주가 공격할 거리는 매우 많다.
방주가 말했다.
“가까운 사람들…… 잘 챙겨야지? 보아하니 음문촌 촌장 여식도 네 여자가 된 것 같은데, 그럼 더 잘 챙겨야지. 혹여 눈먼 칼에 당하기라도 하면…… 쯧!”
혈천방주가 혀를 찼다.
“분명히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고. 방주, 죽인다는 말뜻 몰라?”
“분명히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너야. 등여산, 도천패, 당홍, 그리고 네 사부. 눈먼 칼에 맞는다는 말뜻 몰라? 해석해 줘?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소린데.”
“후후!”
호발귀는 홀리 손을 잡고 뇌옥 밖으로 나왔다.
혈천방주는 혈천방에서 전해지는 진결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혈마를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니 또다시 호발귀를 자극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호발귀를 자극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말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하지만 혈천방주가 하는 자극은 사람이 죽는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죽는다.
“촌장이 홀리에게 가르쳐 준 진결, 혈마후로 만드는 진결이 아니라 혈마를 죽이는 진결이야. 내가 그 진결을 이겨내고 살아났거든. 그래서 이제 어떤 구혼음소도 두렵지 않아.”
“그런가?”
혈천방주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촌장을 만나면 전해달라고. 앞으로 내 앞에서 구혼음소를 읊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되었든 베어버린다고. 혈마를 만들거나, 이용하려는 자들은 모두 벤다고.”
“직접 전하지 그래.”
“만나면 죽일 것 같아서.”
호발귀는 진결에 대해서 건드렸다.
그래도 음문촌 진결에는 인정이 담겨있다. 혈천방 진결은 오직 죽음만 유도한다.
그런 진결을 읊었다가 혈마가 죽지 않는다면? 그때는 호발귀가 아니라 혈마를 상대해야 한다.
호발귀는 혈천방주에게 일종의 위협을 한 것이다.
앞으로 혈마를 시험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일으키지 말라고. 시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고.
애꿎은 혈천방 무인들의 죽음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다.
저벅! 저벅!
호발귀는 홀리 손을 잡고 걸어갔다.
혈천방주는 호발귀를 잡지 않았다.
‘혈마가 됐다 이거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길을 열었다면 다른 사람도 이용할 수 있는 것. 어디…… 진짜 혈마의 무공 좀 볼까? 후후!’
혈천방주는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