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五章 비등(飛騰) (5)
“다행이야. 돌아왔네. 돌아왔어. 살았어.”
홀리는 떨지 않았다.
음성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나 돌아왔어. 하지만 언제든 혈마가 될 수 있어. 나도 내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지 못하겠네.”
“괜찮아. 돌아왔으니까.”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나가야지?”
“아니. 조금만 있어 줘. 나 지금 너무 편해.”
“그래.”
호발귀는 무심히 말했다. 그리고 다소 편해진 마음으로 홀리를 쳐다봤다.
순간, 호발귀는 그제야 홀리가 나신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순간적으로 호발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홀리를 안고 있는 손도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얼굴은 홀리를 쳐다보지 못하고 맞은편 석벽을 쳐다봤다.
홀리는 당장 호발귀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녀가 더 힘껏 껴안았다.
이번에는 상황이 반대로 되었다.
“나 놓고 갈 거야?”
“아니.”
“그럼 안아줘.”
“홀리, 그게……”
“나 슬프게 할 거야?”
“그게 아니라.”
“난 항상 널 내 남자라고 말해왔어. 내 마음은 알고 있지?”
“홀리. 나와 책사, 이미 부부야. 난 이미 한 여자의 남자……”
“호호호! 그걸 걱정하는 거야? 그건 걱정하지마. 나와 책사의 문제니까, 내가 풀면 되지? 그것보다 나 지금 알몸이야. 여기서 일어서면 수치라는 거 알지?”
“호, 홀리.”
홀리가 호발귀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호발귀를 눕히며 위로 올라탔다.
“넌 어떻게 여자가 먼저 입맞춤을 하게 만드냐?”
홀리가 호발귀의 입에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까마득한 혼탁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음고와 구혼음소가 빠진 귀색혼령대법이다.
“어쩌면 그 순간에도 책사를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홀리가 투덜거렸다.
“휴우!”
호발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여인을 책임져야 한다. 이미 한 여인의 사내인데, 정말로 등여산을 사랑하는데……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호발귀의 마음은 긴 한숨과 함께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 이렇게 슬프게 만들 거야?”
“아니. 미안. 정말 미안.”
호발귀는 홀리를 꼭 껴안았다.
등여산을 사랑한다. 홀리는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다. 이 두 부분은 비교될 수 없다. 모두 책임져야 한다. 홀리를 아껴야 한다.
“내가 싫진 않지?”
“절대.”
“그럼 나와 같이 있을 때는 나만 생각해 줄 수 있지?”
“당연히 그럴 거야.”
“등여산이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래도 책임져야지.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질 거야. 이해해달라고 사정할 거고.”
홀리는 등여산과 나눈 비밀 이야기를 호발귀에게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호발귀 앞에서 나눴지만, 호발귀는 듣지 못했다. 두 여인 만의 비밀이다.
“책사가 끝내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야?”
“난 너도 책임져야 하고, 책사도 책임져야 해. 그러니…… 양해가 될 때까지 혼인을 미뤄야겠지.”
“그 일 때문에 떠나가면?”
“두 여인을 택한 건 내 잘못이니까. 목숨이 주어진다면 죄를 빌면서 살아야겠지.”
“호호호! 혈마도 그렇고 책사도 그렇고 모두 약해빠져서는. 난 뭐 신선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 ‘그러면 네가 떠나주라’ 라던가. 뭐 그런 말.”
“넌 참 짓궂어.”
“그런데 몸은 괜찮아? 가슴에 검이 깊이 박혔잖아. 정신없는 상태에서 그 난동도 부렸고.”
“참 빨리도 묻네.”
“어머! 그랬나?”
홀리가 생글생글 웃었다.
호발귀는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안고 있으니 좋다.”
“정말로?”
“그래. 좋아.”
“지금 좋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지?”
“그냥 좋다는 말.”
“아니. 네가 바람피우면 널 죽일 사람이 두 명이 있다는 거야. 더는 한눈팔면 안 돼!”
“이거 참 이기적인데?”
“뭐! 그럼 한눈팔겠다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내가 혈마는 못 죽일 것 같지?”
“아니. 아니. 아니!”
호발귀가 급히 손을 저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여자일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여자다.
호발귀는 홀리를 안은 채 말했다.
“나는 혈마가 뭔지를 알아냈어. 이백 년 전 혈마도 혈마 무공의 위험성을 알았을 거야. 그러면서도 사용한 거고. 나도 이 무공을 계속 사용할 거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구혼음소는 통하지 않는다면서?”
“날 죽이지는 못하지만, 혈기는 제거해줄 수 있어. 계속 사용해 봐야지. 아까 내가 무서웠다면서?”
“내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무서웠다고 할까?”
“그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어.”
“이제는 안 무서워. 돌아올 거잖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안 믿어. 그러니 꼭 돌아와. 혈마가 돼서 영혼이 저승에 잡히더라도 꼭 돌아와. 이 땅에는 널 기다리는 사람이 최소한 두 명은 있어. 너한테 몸을 의탁한 사람, 네가 책임질 사람들이야. 우리 눈에 눈물 나게 하지 마.”
호발귀는 홀리를 쳐다봤다.
“여기 위험하다며? 일어나자고 하면 화낼 거야?”
홀리는 이곳이 지심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등여산이 말해준 사멸강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살길은 없고, 오직 사로만 존재하는 진이다.
혈마도 뚫고 나갈 수 없는 절대 진, 죽음의 진이다.
그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아마도 호발귀가 누워있던 석실은 사멸강진 최고 중심처가 아닐까 추측한다.
딛고 있는 석실 바닥이 밑으로 뚝 떨어진다.
이 밑에는 칼날이 수북이 꽂혀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체는 꼬치를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 후, 초염독이 쏟아진다. 살과 장기를 녹여버린다.
마지막은 기름과 불이 대미를 장식한다. 고열로 뼈까지 태워서 한 줌 재로 만든다.
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빠져나가야지.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홀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홀리가 벗어놓았던 옷을 찾았다.
호발귀가 쇠사슬로 석실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놔서 옷도 넝마가 되어 버렸다.
발로 짓밟히고, 쇠사슬을 맞아서 찢긴 곳이 많다.
그래도 홀리는 옷이라도 입을 수 있다. 문제는 석실 안에는 호발귀 옷이 없다는 거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남자뿐이고, 호발귀의 경우에는 옷이 필요 없어서 아예 벗겨놓았다.
호발귀와 홀리는 석실 구석구석을 뒤졌다.
호발귀가 쇠사슬을 휘두르면서 석벽에 균열이 갔다. 그래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석벽 안쪽이 보인다. 모두 흙이다.
독수가 쏟아지고, 기름까지 퍼부으려면 천정에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쇠사슬에 균열 난 곳으로 들여다봤을 때는 천장 역시 흙이 보일 뿐이다.
사방이 찢기고 갈라졌는데, 독수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석실 바닥도 전혀 이상 없다.
“여기에 뭔가를 설치한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제일 진법가야.”
호발귀가 말했다.
“그건 책사도 인정했어. 사멸강진을 설치한 것만으로도 천하제일 진법가라고.”
홀리도 석벽을 살펴봤다.
석실을 탈출해야 하는데, 빠져나갈 방도가 전혀 없었다.
“책사가 빠져나가는 방법은 말 안 해줬어?”
“방주를 잡으라고 했는데, 난 여기서 죽을 생각이었거든. 그래서 방주가 나가는 걸 보면서도 내버려 뒀지. 잡아서 뭐해. 그것보다는 구혼음소를 완성하는 게 낫지.”
“큰 빚을 졌네.”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
“다음부터 그런 말 하면 죽여! 세상에 자기 부인한테 빚졌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 미안.”
“또!”
“알았어. 그럼 현실적인 것. 방주가 언제쯤 깨어날까?”
“환혼몽은 혈천방주 같은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만든 독이거든. 상당히 강해. 대략 이틀 정도는 깨어나지 못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귀색무가 옅어진 걸 보니 반나절?”
“그럼 일단 하루는 여유가 있는 셈이군.”
호발귀가 말했다.
석실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혈천방주가 빠져나갈 때, 어떻게 출입하는지 방법을 지켜봤을 텐데.
“아무것도 못 찾았지?”
홀리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발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석벽을 쏘아보면서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하필이면 이런 진에 갇혀서.”
홀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해? 안 나갈 거야?”
호발귀가 말했다. 호발귀는 이미 그녀가 들어왔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나갈 방법을 찾은 거야?”
홀리는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하하! 홀리. 설마 내가 투심문 문주라는 사실도 잊은 거야? 나는 혈마라는 말보다 투심문 문주라는 말이 더 듣기 좋은데.”
“아! 투심문! 내가 내 낭군이 투심문 문주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네? 호호호!”
홀리가 반색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어떻게 찾았어? 어떻게 나갈 수 있는데?”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급히 물었다.
“이렇게.”
호발귀는 석벽에 손을 댔다. 그리고 꾹 눌렀다.
구르르르릉!
석벽이 묵중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이동했다.
“아! 열린다!”
홀리가 활짝 웃었다. 순간,
그르르르르……!
호발귀는 석벽이 열리는 소리 외에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무엇인가 착착 맞춰지는 소리…… 지극히 작은 소리지만 똑똑히 들었다.
홀리는 태평하다. 아마도 이 소리를 못 들은 것 같다.
순간, 호발귀는 홀리 옆구리를 낚아챘다.
“왜?”
홀리가 엉겁결에 매달리며 물었지만, 호발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해줄 틈조차 없었다.
터엉!
생기가 치솟는다. 혈마 무공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양강지공 역천금령공이 일어났다. 동시에 손에 묶인 쇠사슬로 허공에 원을 크게 그렸다.
휘이이이익! 파라라라랑!
쇠사슬에서 광풍이 일어났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전면에서 철창 수백 자루가 쏘아졌다.
쎄에엑! 파아앙! 쒜에에엑!
장창은 기관으로 발출되었다. 강력한 용수철로 퉁겨져서 인간이 던진 것보다 열 배는 강하다. 장창의 무게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날아오는 거리가 짧다.
따앙! 땅땅땅! 따아앙!
쇠사슬이 연신 장창을 쳐냈다.
장창은 굉장히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호발귀는 장창이 날아오는 기세보다도 더 거세게 광풍을 일으켰다.
“크크크! 크크크큭!”
당장 호발귀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역천금령공을 절정으로 일으켰다.
단전 진기가 원정으로 스며들어서 생기를 빨아들였다. 예전의 역천금령공은 단전 진기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무공이든 생기와 접촉한다.
무공을 전개한다는 것은 생기가 끊임없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다는 뜻이다. 나갈 때는 푸른 빛이 쏘아지지만, 돌아올 때는 혼탁한 기운을 품고 들어선다.
탁기는 혈기로 변한다.
이미 혈기에 길든 몸, 혈기의 통로가 완성된 호발귀는 당장 혈마가 되어서 혈기를 터트린다.
쒜에에에에엑! 파파파팡!
철창이 거칠게 튀어 석벽으로 튕겨 나갔다
호발귀 발밑, 석실 바닥은 휘둘러지는 쇠사슬에 의해 움푹 파였다.
호발귀는 이제 역천금령공이나 이령귀화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동안 이걸까 저걸까 하던 무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혈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이 맑고 환하게 드러났다.
“크크큿! 크크크큿!
호발귀가 연신 괴소를 터트렸다.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늑대의 울부짖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