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五章 비등(飛騰) (4)
‘홀리! 홀리!’
호발귀는 홀리를 봤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홀리의 목을 잡고 있다. 홀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홀리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는데도 목을 놓지 않는다.
‘안돼! 손을 놔!’
이상하다. 홀리를 잡은 손은 자신 것이 맞는데, 의식을 따르지 않는다. 손을 놓으라고 했는데도 손이 놓아 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더 세게 잡아간다.
‘안 돼. 손을 놔! 제발 손을 놔!’
꾸우우욱!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홀리의 목뼈를 부러트리겠다는 듯이 억세게 잡아갔다.
순간, 호발귀는 장진 스님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 색불이공 공불이색
겉모양에 집착하지 마라. 분해하라. 분해하고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다.
육신도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분리해 버리면 남는 게 없다.
몸 중에 땅의 요소는 피부, 뼈,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이 땅에 떨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몸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의 요소로는 피, 오줌이 있다. 그것도 몸이 아니다. 불의 요소인 체온을 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바람의 요소인 호흡, 피의 움직임을 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몸이 된다.
각기 분리하면 몸이 되지 않는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그런데 한군데로 모아놓으면 몸이다.
사대가 모이면 육신이 되고. 사대가 흩어지면 자연이 된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미탕.”
호발귀는 자신도 모르게 구혼음소를 읊었다.
홀리가 읊던 구혼음소가 아니다. 장진 스님이 구혼음소를 받아서 낭송하던 반야심경도 아니다. 음률을 완전히 분해한 다음 다시 조합한 자신의 구혼음소다. 순간,
스륵!
홀리의 목을 옥죄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스르르륵! 툭!
홀리가 석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호발귀는 급히 홀리를 안아서 일으켰다. 그리고 다 부서진 침상 위에 눕혔다.
“홀리!”
호발귀는 홀리의 가슴을 힘주어 눌렀다.
턱! 턱! 턱!
숨을 쉬게 해야 한다.
홀리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하지만 호발귀의 눈에는 그런 점이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도 알몸이다. 그런 점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홀리만 보였다.
살려야 한다! 살려야 한다!
그때 혈기가 치밀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불쑥 혈마가 튀어나왔다.
“크크크크크!”
입에서 괴소가 터졌다.
홀리의 가슴을 누르던 손도 일시에 경직되었다. 아니다. 가슴을 누르는 손이 흉기로 변한다.
우르르릉!
주먹에 구뢰마권이 모였다.
홀리를 후려치고 싶다. 가슴을 후려쳐서 가슴뼈를 박살 내면 어떨까?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매우 좋을 것이다. 사람 한두 번 죽여본 것도 아니지 않나.
“타악 투 파 비투 쏘……”
호발귀는 즉시 구혼음소를 읊었다.
보통 인간은 생기 작용이 매우 뛰어나다. 생기가 스스로 탁기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젊을 때는 이 작용이 활발하다. 젊은 사람은 보기만 해도 활기차다.
늙으면 이 작용이 쇠퇴해져서 탁기를 많이 허용한다. 몸은 약해지고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
생기격타가 이루어지면 생기는 오염된다.
노인이 탁기를 허용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한 탁기가 몸으로 밀려든다. 그것도 일시에.
오염된 혈기는 위로 상승하는 화(火)의 성질을 지닌다.
혈기는 불이 되어서 위로 치솟는다.
사람은 화가 나면 성질을 부린다. 화가 뇌를 마비시키고, 폭력성을 부른다.
오염된 생기는 화보다도 훨씬 강한 폭력성을 불러온다. 자제하고, 추슬러서 가라앉힐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더욱이 싸움 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화가 걷잡을 수 없이 터진다.
화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오염된 생기, 혈기는 다르다. 혈기는 생기를 계속 사용한다. 생기는 사용된 만큼 오염된다.
사용하고, 오염되고, 오염되어서 또 사용하고, 그래서 더 오염된다.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계속 화만 낼 수 없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쉬어주어야 한다.
혈기는 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잠잘 때조차도 혈기가 계속 작동한다. 잠자면서도 화를 내고 있다.
그러다가 한계치를 넘으면 인성을 잃어버리고 혈마가 된다.
사악한 마음이 일어난다거나 살인 충동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부분은 마음과 뇌의 영역이다.
생기의 영역은 아니다.
보통 사람은 광인이 되어도 혈마처럼 세상을 피로 물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생기를 이용하는 혈마 무공은 이래서 위험하다.
혈기가 치솟을 경우, 마음과 뇌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생기 자체가 오염되어서 뇌를 자극한다. 화가 치솟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파괴본능을 일으키고, 파괴본능은 살인 충동으로 이어진다.
호발귀는 혈마의 본질을 알았다.
구혼음소는 원정 혈기를 자극한다.
오염된 생기를 거칠게 후려친다. 성질을 잔뜩 돋워서 그러잖아도 화난 상태를 극한까지 끌어 올린다.
혈기를 뇌에 집중시킨다.
뇌에 집중!
뇌에 집중! 점점 더 강하게!
혈기의 집중이 한계치를 넘으면 뇌가 폭파된다.
위에 말한 한계치와 지금 말한 한계치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위에서 말한 한계치는 본성의 문제다. 구혼음소가 일으킨 한계치는 육신의 문제다. 도끼로 머리를 후려칠 때처럼 뇌의 혈관을 산산조각낸다.
뇌혈관이 깨알만큼만 터져도 뇌졸중이 되는데, 구혼음소는 뇌혈관을 절반 이상이나 터트려 버린다.
구혼음소가 뇌를 터트리는 게 아니다. 머리에 피가 밑도 끝도 없이 물리다 보니 뇌혈관이 터지는 것이다.
이것이 구혼음소의 역할이다.
혈기의 성질만 알고 있으면 구혼음소를 만들기는 쉽다.
홀리가 최종적으로 읊은 구혼음소는 혈기를 한없이 끌어올린다. 중간에 억제하는 장치가 없다.
이 구혼음소는 혼절한 후에도 여전히 작동한다.
혈기를 끊임없이 끌어당겨서 기어이 뇌를 터트린다.
혈마가 원하는 구혼음소다.
예전 구혼음소도 혈기를 급격하게 끌어올린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구혼음소를 읊다가 한순간 정신을 잃는다.
본인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혼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생기가 원정에 머물지 않고 흩어졌기 때문에 맥이 뛰지 않고 체온이 떨어진다.
죽은 것처럼 보인다.
한데 여기서 구혼음소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 점이 진짜와 다르다.
뇌에는 이미 비정상적으로 많은 혈기가 모여 있다. 이 혈기는 뇌 신경을 건드린다. 혼절해 있는 동안 한계치를 넘어서 혈마가 되어 버리고, 동시에 뇌 신경을 다쳐서 백치 상태가 된다.
이때부터 혈마후의 조정을 받는 혈마가 된다.
혈마가 혈마후를 알아보는 게 아니다. 백치가 되기 직전에 들린 음성을 따르는 것이다.
귀색혼령대법 같은 강렬한 방법을 동원하면 완전히 혈마후의 치마폭에 휘감긴다.
뇌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혈기가 모여 있다고 해도, 운 좋게 혈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뇌 신경도 다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호발귀는 생기격타를 수없이 했다. 그리고 혈기가 치솟으면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반쯤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서는 혈기를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정말 위험한 순간들이었다.
그 중 어느 한때라도 혈마가 될 수도, 바보가 될 수도 있었다.
원정에서 일어나는 혈기는 색(色)이다.
색에 집착하지 마라.
색(色)을 공(空)으로 전환한다.
혈기의 성질은 화(火)다. 위로 치솟는다. 막을 방도는 없다. 생기는 몸 전체에 퍼져 있으므로, 이 순간에는 몸 전체에 불이 붙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때, 장진 스님이 말한 분해가 시작된다.
불[火]을 따로 떼어낸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나 자신을 제삼자 입장에 놓고 불붙은 나를 지켜보면 된다. 그러면 불붙은 모습이 보이고, 불덩이만 따로 떼어진다.
구혼음소도 약간 도움이 된다.
진짜 구혼음소나 예전이 구혼음소는 여전히 독이다. 쓰면 안 된다. 대신 자신이 분해했다가 다시 조합한 구혼음소를 쓴다. 가결과 음률은 같지만, 전혀 다른 작용을 한다.
일단, 혈기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원래 있던 작용이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구혼음소가 홀리에게서 장진 스님으로,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전해지는 동안 무엇인가가 변했다. 가결이 변했거나 음률이 변했다. 본래 작용을 전혀 하지 못한다.
지금 그가 읊조리는 구혼음소는 아무 작용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도 구혼음소를 읊조린다. 그러다 보면 불붙은 혈마의 모습이 보인다. 불덩이만 떨어져 나간다.
떨어진 불덩이는 다시 세상 속으로 돌려보낸다.
본래 생기가 환원된다.
이러면 혈기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혈기는 다시 일어난다.
혈마 무공을 사용하는 한, 영원히 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혈마가 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호발귀가 가장 경계했다.
혈기가 치솟아서 혈마가 되는 일은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이런 일은 한 번 막았다고 해서 영구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일어나는 것도 일회성이고, 막는 것도 일회성이다. 언제든 틈만 나면 일어난다.
두 번째로 혈마가 되는 길이 있다.
이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부분인데…… 습관이나 만성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첫 번째가 급격하게 일어났다면 두 번째는 시간을 두고 느릿하게 일어난다.
혈기에 물드는 것이다.
혈기가 일어나면 즉시 내쫓는다. 하지만 그동안 악마적인 행동을 몇 가지 한다. 살인도 하고, 때릴 수도 있고, 무엇을 파괴할 수도 있다.
즉시 탁기를 몰아냈다고 해도 이런 일은 이미 일어난다.
이런 자잘한 일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그리고 만성으로 누적된 습관은 일상처럼 여겨진다.
살인이 평범하게 느껴진다. ‘또 실수했구나!’하고 넘겨버린다.
처음에는 한 명을 죽이지만, 나중에는 두세 명을 죽인다. 그것도 익숙해지면 십여 명을 죽여도 ‘실수’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다. 혈기를 버리고 다시 돌아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번째로 일어나는 만성적 혈마다.
살인을 계속하는 한, 경계하고 경계해도 언젠가는 혈마가 된다.
처음에는 적을 죽인다. 살인이 대수롭지 않다. 그러다가…… 길을 걷다가 이 사람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죽인다. 이런 일도 대수롭지 않게 될 것이다.
점점 악에 물들어간다.
혈마는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외우면서 계속 홀리의 가슴을 짓눌렀다. 홀리의 입에 입을 맞추고 공기를 불어 넣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카악!”
홀리가 숨을 급격하게 몰아쉬며 몸을 비비 틀었다.
‘살았다!’
일순, 안도의 한숨이 일시에 몰아쳤다.
얼마나 다행인가. 천만다행이다.
홀리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리고 호발귀를 쳐다봤다. 아니, 호발귀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귀신이라도 든 듯한 표정이다.
호발귀는 재빨리 그녀를 안았다.
다정하게, 하지만 꼭 힘주어 안았다.
“홀리, 나야.”
홀리가 바들바들 떨었다.
“나야. 혈마가 아닌 호발귀야.”
“저, 저, 정말, 정말 호발귀…… 야?”
흘리는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말을 하면서도 몸을 달달 떨었다.
사시나무가 이렇게 떨릴까? 몸이 부르르 진동한다. 살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호발귀는 홀리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혈마가 아닌 호발귀야. 맞아. 나야.”
홀리를 안고 한참을, 한참 동안을 호발귀라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