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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221화 (221/500)

第五十五章 비등(飛騰) (1)

사락! 사라락! 사라락!

홀리는 입고 있는 옷을 벗었다.

낯선 사내, 혈천방주는 의식하지 않았다. 사내가 아니고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옷을 벗으면 나신이 드러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수치심이라든가 이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그런 감정은 어떤 여유가 있을 때 느끼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절박하면 머릿속이 텅 비워진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 바란다.

‘일 단계 구혼음소로 안 될까? 멀쩡할 수도 있는데. 꼭 죽이지 않아도 되잖아. 귀색혼령대법, 하지 뭐. 그게 뭐 대단하다고. 그래, 일 단계로 하는 거야.’

마음의 결정을 귀색혼령대법으로 정하면 한결 상쾌해진다. 옷 벗는 손도 빨라진다.

“아냐. 그러다가 혈마가 되면? 안 돼. 여기서 끝내야 해. 호발귀는 결코 혈마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았어.”

생각을 죽이는 쪽으로 정하면 갑자기 손과 발이 무거워졌다. 옷 벗는 손길도 느려졌다.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달았다.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이겨낼 거야. 삼 단계도 조정하는 거야. 그런데 이겨냈잖아? 조정 당하지 않았어. 지금은 혼절 상태가 깊어서 삼 단계로 하면 일어날 것 같지 않고…… 일 단계. 그래, 일 단계로 가자. 이겨낼 거야.’

홀리는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토초와 같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그때는 내가 있었으니까 혈마를 죽일 수 있었지만, 혈천방주는 결코 호발귀를 죽이지 않아. 혈마로 이용할 거야.’

마지막 결정을 내려놓고도 또 번잡하게 생각한다.

호발귀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기 때문에 더 곤혹스럽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가슴 가리게도 풀어냈고, 마지막 비처를 숨겨주던 고의마저도 벗어냈다.

누르스름한 연기 속에서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는 알몸으로 누워있는 호발귀를 보았다. 마치 자신에서 어서 올라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녀는 침상 위에 올라갔다.

‘잠시만…… 잠시만 그냥 이대로……’

홀리는 사지를 큰 대자로 벌리고 누워있는 호발귀 옆에 누웠다.

딱딱하게 경직된 팔을 베고 몸을 호발귀에게 바싹 붙인 채 그의 가슴을 쓸었다.

‘이런 식으로 살을 맞대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리도 참 기구하네.’

호발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뜩 그녀의 손이 호발귀 심장에 닿았다.

검에 찔린 자국이 손바닥을 까칠하게 자극했다.

호발귀는 죽고자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자신 스스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진한 것이다. 이 검을 쓰기 전에 호발귀는 틀림없이 구혼음소를 읊조렸을 것이다.

한데 통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 정말 사력을 다 쥐어 짜내서 마지막 일 검을 심장에 꽂았다.

죽으려고 했구나.

홀리는 호발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홀리는 호발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호발귀를 보는 순간 ‘이 사람 참 편하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보내주고 싶다.

그래, 지금까지 잘 싸웠다.

혼절한 상태라서 구혼음소가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겠지만, 먹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죽으려고 했어. 혈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그래 보내줄게. 내 사랑, 내 낭군. 잘 가.’

홀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말 몇 마디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고 처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직도 이런 여린 감정이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물 같은 것은 애당초 말라버렸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눈물이 난다.

홀리는 호발귀 위에 몸을 겹쳤다.

“잠시만…… 우리 잠시만 이대로 있자. 편하게 해줄게.”

홀리는 호발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홀리는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유심히 지켜봤지만, 귀색혼령대법을 차분히 진행해 나가고 있다.

그녀가 호발귀의 귀에 대고 밀어를 속삭인다.

정사를 벌이기 전에 사전 작업을 한다.

아마도 망혼자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인식시키는 작업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래, 어서 해라. 꾸주 바흐 부이러 하수내 따 사루 칠……’

혈천방주는 사혼진령음을 외웠다.

혈마가 탄생하면 자신도 통제장치가 있어야 한다. 여차하면 호발귀가 홀리 둘 다 제거한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 그전에 홀리와 타협해서 좋게좋게 일을 풀어가야 한다.

홀리는 한 달에 열흘만 자신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철없는 소리다.

나중에 혈마의 힘을 알게 되면 욕심이 부쩍 커질 것이다. 음문촌장도 제 몫을 요구할 것이고.

‘삼 할. 삼 할은 떼어준다. 어차피 지금도 중원 삼분지 일은 내 것이니까. 최대 삼 할.’

혈천방주는 구수한 생각을 이어가다가 깜빡 졸았다.

“엇!”

혈천방주는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귀색무 속에서 졸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이거 독기가 장난이 아닌데?’

혈천방주는 눈을 부릅떴다.

음문촌의 귀색무는 자신이 판단하고 만든 귀색무와는 크게 다르다.

‘연기와 냄새. 틀림없이 독성을 찾아냈는데…… 이건 뭐지? 몸과 마음을 굉장히 나른하게 만들어. 정사를 벌이기에는 더없이 좋은 나른함이야.’

귀색무 속에는 혈천방주가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독이 담겨 있다.

이 독은 진기가 알아챌 사이도 주지 않고 몸속으로 스며든다.

옛날, 독의가 만들었다는 환혼몽(還魂夢)가 흡사하다. 환혼몽에 걸리면 어떤 고수라도 나가떨어졌다고 하는데, 귀색무도 그에 못지않다.

혈천방주는 자신이 귀색무에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이미 귀색무 독성에 당했다. 이곳에 들기 전에 나름대로 피독단(避毒丹)을 복용해서 죽지는 않겠지만, 나른한 즐거움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스르륵 잠이 쏟아진다.

혈천방주는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다가 다시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혈마가 탄생하기 직전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혈마 탄생을 지켜봐야 한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나른하게 쏟아지는 즐거움을 밀어낼 방도가?

혈천방주는 진기를 모아서 독기를 새끼손가락에 운집시켰다.

츠으읏!

독기가 모인다. 하지만 졸음은 모이지 않는다. 진기를 운기 하는 중에 깜빡 졸아서 운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귀색무가 너무 강력하다.

이것이 진정한 귀색무라면 혈천방이 가진 귀색무는 잘못 만들었다. 자신이 잘못 파악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촌장을 구슬려서 귀색무를 받아내는 게 빠를 뻔했군. 하기는 이제는 귀색무도 필요 없어. 저놈만 혈마가 되면 세상이……’

혈천방주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깜빡 정신을 놓았다. 그러다가 다시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또!’

고스란히 당했다.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진다. 그리고 이 졸음은 상당히 즐거운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졸음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기도 하다.

‘안 돼!’

혈천방주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누르스름한 연기가 가득한 석실을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걸어서라도 졸음을 쫓아 볼 생각이다.

홀리는 이미 옷을 벗고 호발귀와 나란히 누워있다. 끊임없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혈천방주의 귀에는 홀리의 나신도,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센 졸음이 밀려왔다.

그때, 혈천방주의 귀에 구혼음소가 들려왔다.

-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후후! 이제 시작했군.’

홀리가 드디어 구혼음소를 읊조린다.

‘그래. 어서 귀색혼령대법을 펼쳐. 어서!’

조금만 더 버티면 혈마 탄생을 볼 수 있다. 혈마가 일어서는 것만 보고 잠을 자도 된다. 아니, 그때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것이다.

그런데…… 구혼음소의 음률이 매우 귀에 익다.

‘가만! 이건……! 엇!’

혈천방주는 일이 매우 심하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즉시 침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알몸으로 누워있는 남녀를 쳐다봤다.

홀리가, 홀리가 정사를 벌이지 않는다.

두 남녀가 꽈리 튼 뱀처럼 얽히고설켜야 하는데, 너무도 반듯이 누워있다.

홀리가 호발귀를 꼭 껴안은 채 귀에 대고 구혼음소를 말한다.

“처 타마 뭘롱 닌비라.”

혈천방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이건! 사결!”

토초가 혈마를 길들일 때 사용하던 음률이 아니다. 미로진 철옥에서 홀리가 토했던 사결이다. 망혼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음률이다.

홀리가 귀색혼령대법 대신 사결을 택했다.

그녀가 호발귀를 죽이고 있다. 이백 년 전, 혈마의 진전을 이어받은 진짜 혈마를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 중이다.

“이 요망한……”

혈천방주는 진기를 모아서 홀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주먹에 진력이 담겼다. 하지만 곧 풀렸다. 죽을 듯이 쏟아지는 졸음이 진력까지 풀어낸다.

혈천방주는 이제야 비로소 어떤 일이 눈에 보였다.

귀색무!

미친 듯이 쏟아지는 졸음이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독의가 만든 환혼몽이다. 귀색혼령대법을 위한 귀색무가 아니라 자신을 노린 귀색무다.

혈천방주 같은 초절정 고수도 환혼몽은 견디지 못한다. 환혼몽은 오직 절정 고수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독의의 미혼약(迷魂藥)에 걸려들면 방법이 없다. 한잠 푹 자고 나는 수밖에. 그나마 죽이지 않고 목숨이라도 보전시켜 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다. 도천패와 당홍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들이 홀리와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호발귀의 혼절이 혼을 쏙 빼놓았다.

순간, 혈천방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여기 있으면 당한다!’

석실을 빠져나가야 한다. 이곳에서 쓰러지면 홀리에게 잡힌다.

온갖 고문이 가해질 것이고 지심옥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자신의 입으로 탈출 방법을 말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아니, 말해줘도 죽는다.

혈천방주를 위협해 놓고 목숨을 남겨둘 만큼 미련한 바보는 없다.

혈천방주는 석벽을 잡고 걸었다.

졸음이 쏟아진다. 좀 더 일찍 움직이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다.

방주는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잘끈 깨물었다. 그 고통으로 잠시 졸음을 이겨내고 걸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이 깜빡 떨어졌다.

“안 돼!”

혈천방주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번에는 아예 손목을 입에 물고 꽉 깨물었다.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혈천방주는 자신의 핏물을 먹으면서 가장 처절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귀문 시절이 생각난다. 귀무살이 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수련했다. 다른 자들은 이십 년이나 수련하고 사망 대장정에 나섰지만, 그는 방주 후계라는 이유로 오 년 만에 합류했다.

그리고 아흔아홉 명을 죽였다.

그가 귀무살 수련을 받은 것은 귀검조차도 모른다. 오직 그를 직접 키운 사부만 안다.

그때가 가장 처절했다.

혈천방주는 석벽을 잡고 걸었다.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으면서 걸었다.

드디어 원하던 석벽을 잡았다.

석실을 나가는 벽이다.

그는 손에 잡힌 석벽을 힘껏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르르릉!

석벽이 열렸다.

순간, 문밖에서 경계를 서던 무인들이 무심결에 돌아봤다. 그리고 피를 잔뜩 베어 물고 있는 혈천방주를 봤다.

“엇! 방주님!”

그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혈천방주를 부축했다.

“석문! 석문! 석문을 닫아! 빨리!”

수하들이 급히 석문을 닫았다.

구르르르릉!

혈천방주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석문 닫히는 모습을 봤다.

이제 석실 안에는 호발귀와 홀리만 남았다.

그나마 구혼음소를 읊는 중에는 한눈을 팔 수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혈천방주가 탈출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열어주지 마라…… 날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내버려 둬……”

혈천방주는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놓았다.

깊은 수면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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