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四章 사결(死訣) (5)
토초가 없으니 지하 뇌옥에 귀색무를 피울 이유가 없다. 굳이 토굴 안에 있을 까닭이 없다.
혈천방주가 내준 혈마는 아쉽지만 모두 숨을 끊었다.
홀리가 귀색혼령대법을 펼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홀리에게는 촌장의 명령도 안 먹힌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호발귀를 만나겠다고 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후후! 저기…… 소귀 맞지?”
음문촌장이 홀리에게 말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일자가 말했다.
촌장은 만들던 활을 던져버렸다.
어차피 혈천방에서 사람을 보내올 때까지 시간을 보낼 겸 해서 시작한 장난이다.
“가서 홀리 찾아와. 오늘 저녁 식사는 아마도 혈천방에서 해야 할 것 같군. 아주 맛있는 저녁이 되겠어. 그럼 어디 배에 기름기 좀 채워볼까? 하하하!”
촌장이 크게 웃었다.
홀리는 지하 토굴에 갇혔다가 살아난 후부터 일절 형제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촌장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혼자 숲을 돌아다녔다.
“우리 지난 오해도 풀었으니까 인제 그만 부녀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 너만 좋다면 난 괜찮은데.”
‘혈육은 어디 안 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붙였다 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홀리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뇨. 전 안 괜찮아요. 지금이 편하잖아요? 이대로 가요.”
“그래? 후후후! 그것도 괜찮고.”
“앞으로 그런 말은 꺼내지 마세요. 촌장님.”
촌장이 홀리를 힐끔 쳐다봤다.
홀리의 약점은 딱 하나뿐이다. 봉맥폐혈수가 아니면 홀리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
“혈천방에서 너무 오래 있지는 마라.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에 치료를 받아야 해.”
“치료에 너무 목매지 마세요. 혹시 알아요? 호발귀와 함께 죽을지. 아니, 호발귀를 살려서 촌장님부터 칠까? 딱 보름만 살기로 작심하면 뭐든 할 수 있는데.”
“후후! 그러고 싶으면 해야지.”
촌장이 웃었다.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있으면 붙잡는 게 사람이야. 넌 호발귀를 살리게 될 거다. 혈마후가 되어서 나타날 거야. 후후후!’
저녁은 화려했다.
혈천방주가 초대한 사람은 음문촌장과 홀리뿐이다. 단 세 사람이 식사하는데 무려 장정 스무 명이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음식이 차려졌다.
“본방 살림이 넉넉하면 좋을 텐데, 얼마 전에 난을 당해서.”
“그래도 호발귀를 잡지 않았습니까? 얻은 것에 비하면 혈천방이 잃은 건 새 발의 피죠.”
“하하하! 그게 아직 약으로 쓸 정도가 안되어서, 촌장, 홀리 소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뭐 그러시죠. 언제든지 쓰시라고 데리고 온 거 아닙니까. 필요하시다면 쓰셔야죠.”
음문촌장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때다. 묵묵히 식사하던 홀리가 불쑥 말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왜 촌장님께 말하죠? 내 의사가 제일 중요할 텐데?”
음문촌장은 즉시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혈천방주는 실눈을 뜨고 부녀를 쳐다보았다. 부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알아챈 것이다.
“그런가? 하하하! 실례했군. 넌 호발귀 여자, 무조건 살리는 쪽을 택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맞아요. 살릴 거에요. 하지만 내가 호발귀를 살리려는 목적은 그자의 여자라서가 아니라 혈마후이기 때문이에요. 지금부터는 그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죠?”
홀리는 호발귀를 ‘그자’라고 지칭했다.
혈천방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러면 생각이 달라지는데. 네가 호발귀 여자인 줄 알고 맡기려고 했는데, 여자가 아니라면…… 맡기기가 곤란하지. 호발귀 여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말이야.”
‘지겨워.’
홀리는 속으로 화가 났다. 이런 자들과 식사를 한다는 게 역겹기까지 했다.
혈천방주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말을 듣자, 등여산이 대뜸 말한 게 있다.
혈천방주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호발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식사하면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확신만 서면 오늘이라도 호발귀를 만난다.
딱 그 말대로다.
혈천방주는 식사하는 내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호발귀를 맡길까, 아니면 의식불명 상태일 망정 이대로 지속시킬까 고민한다.
혈천방주가 염려하는 것은 단 하나, 홀리가 죽음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도 귀색혼령대법을 펼칠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다.
‘확신. 좋아. 심어줄게.’
“호호호!”
홀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매우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인 웃음이랄까? 한 맺힌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혈천방 소식이 정말 엉망이네요.”
“우리가 좀 그렇지. 하하!”
“호발귀는 책사 남자예요. 이미 책사하고 깊은 관계인데, 거기까지는 정보를 못 받으셨나 봐요?”
“그랬나?”
혈천방주는 옅게 웃었다.
혈천방은 거기까지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홀리의 말에 음문촌장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촌장도 등여산과 호발귀가 깊은 관계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오히려 홀리가 깊은 관계인 줄 알았다.
홀리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호발귀만 바라봤는데, 그자는 날 버렸어요. 그자에게 나의 존재는 혈마가 되기 직전에 죽여줄 수 있는 도구라는 것. 이렇게 되면 내가 호발귀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은 혈마로 만드는 방법뿐이죠?”
“그렇군.”
“방주님도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히려 걱정하셔야지. 제가 호발귀를 혈마로 만든 다음 혈천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궁금하지 않아요?”
“하하하! 네가 잠시 잊은 모양이구나. 나 역시 혈마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 말이야. 하하하!”
혈천방주가 웃었다.
드디어 확신을 얻었다. 혈천방주의 표정에 웃음기가 띄워진다. 편안한 웃음이다.
“조건이 있어요?”
“혈마를 만들기도 전에 조건부터 요구하나?”
“제가 호발귀를 혈마로 만들면 한 달에 열흘, 한 달에 열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와 혈마만의 시간을 줘요. 열흘 동안은 어떤 요구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거면 되나?”
“그거면 돼요.”
“한 달에 열흘. 좋아!”
혈천방주가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음문촌장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촌장은 홀리의 목숨을 쥐고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듣기만 했다.
* * *
저벅! 저벅! 저벅!
혈천방주가 앞서서 걸어가고 홀리가 뒤따라 걷는다.
“드디어 들어가네.”
당홍이 말했다.
‘기어이 혼자 보내네. 미안!’
등여산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홀리가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안타까웠다.
홀리는 죽음의 길로 들어가고 있다
홀리는 귀색혼령대법을 펼치지 않는다. 호발귀는 혈마가 되느니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 실제로 자살을 택했다. 홀리가 그런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저 길은 죽음의 길이다.
호발귀도 죽고 홀리도 죽는다.
당홍이 독을 만들어 주었다.
호발귀 상태를 보고 살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사용하라고 주었지만,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홍이 준 독은 쓰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문 열어.”
혈천방주가 말했다.
혈천방주는 밀마도 필요 없다.
그르르르릉!
석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을 삼킨 커다란 입구가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 사람이 사라졌다
“우리 언제까지 있을 거야?”
“나올 때까지.”
“그래. 그러자.”
당홍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 위에 숨어서 석문을 주시했다.
홀리는 최소한 한두 시진 안에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하루 이틀 만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며칠이 걸리더라도 나오기만 했으면 좋겠다.
아주 긴 기다림이 될 것이다.
* * *
홀리는 호발귀를 봤다.
호발귀는 발가벗겨져 있었다.
몸에 등창이 생길까 봐 시종이 계속해서 마른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근육이 굳지 않도록 팔다리 운동도 시켜주었다.
혼절해 있지만 가장 편안한 모습이다.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처럼 여러 사람에게 시중을 받아보기는 처음일 것이다.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대접 잘 받으니 좋아?’
홀리는 호발귀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두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가 조금이라도 서툰 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홀리는 호발귀의 맥문을 짚었다.
홀리가 의원보다 진맥을 더 잘할 수는 없다. 진맥이라면 의원이 훨씬 낫다. 그런데도 그녀가 직접 진맥한 것은 티끌만 한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서였다.
먼지 한 톨만 한 희망이라도 있으면 구혼음소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홀리는 탄식했다.
그녀는 호발귀에게서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호발귀의 맥박이 매우 부드럽게 뛰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지 못했다.
호발귀는 의식불명 상태다.
어째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여기서 헤어나오게 할 수 있는지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홀리가 말했다.
“귀색혼령대법을 펼쳐야겠어요. 나가 주세요.”
“나가는 건 곤란하지.”
혈천방주가 말했다.
“귀색혼령대법을 펼친다고 말했는데요. 호발귀와 정사를 벌어야 하는데 바로 앞에서 보겠다고요?”
“우리 이걸 정사로 생각하지 말고 일이라고 생각하자고. 사실 일이잖아. 혼절한 사람과 정사를 나누면서 흥분이 될 리도 없고. 아! 그리고 난 고자라서 아무 느낌도 없어.”
혈천방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귀색혼령대법을 펼치려면 귀색무를 피워야 하는데, 괜찮죠?”
“아! 그거. 피독단……”
“피독단은 없어요.”
홀리가 혈천방주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혈천방주는 석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바로 귀색혼령대법을 진행했다.
등에 지고 온 자루에서 사발과 덤불처럼 생긴 약초를 꺼냈다. 그리고 횃불을 가져와서 약초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약초가 타들어 가면서 누르스름한 연기를 피워냈다.
순간, 굉장한 악취가 석실에 번졌다. 생선 썩는 냄새, 고기 부패하는 냄새, 머리카락을 태우는 냄새…… 온갖 악취가 한꺼번에 확 일어났다.
“너희는 나가!”
혈천방주가 석실에 있는 의원과 소동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코를 움켜잡다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혈천방주는 나가지 않았다. 아예 의자를 가져와서 호발귀가 누워 있는 침상 옆에 놓고 앉았다.
혈천방주도 귀색무에 관해서 연구했다.
귀색무가 혈마를 만들 때 필요한 성분을 제공하기 때문에 혈천방도 준비를 해놨다.
귀색무는 독연(毒煙)이다. 누르스름한 연기가 빡빡한 수세미로 살을 문지르듯 강한 자극을 준다. 멀쩡한 사람은 울긋불긋 두드러기가 일어난다.
또 악취는 혈기를 건드린다.
혈마의 들끓는 성정을 유지한다.
혈천방주는 귀색무를 많이 맡아봤다. 혈천방이 귀색무를 만들 때, 직접 지휘까지 했다.
사락! 사르락!
홀리가 옷을 벗었다.
그래도 혈천방주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두 눈 부릅뜨고 홀리를 쳐다본다.
홀리의 알몸을 쳐다보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여체에 눈길을 돌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홀리가 엉뚱한 행동을 할까 봐 감시하는 것이다.
혈천방주는 호흡을 매우 느리게 유지했다.
귀색무를 최대한 천천히 흡입하면서 견뎌낸다.
진기를 이끌어서 몸 안으로 스며드는 독기를 왼손 새끼손가락에 밀어 넣는다.
‘어서 빨리 귀색혼령대법을 펼쳐야지!’
혈천방주는 냉철한 눈으로 홀리를 쏘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