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四章 사결(死訣) (4)
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여산의 얼굴에 실망의 표정이 드리워졌다. 도천패나 당홍도 실망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내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혼자 사멸강진으로 들어가지 않은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홀리가 말했다.
“표정들이 왜 이래. 내가 나타난 게 무척 싫은가 봐?”
“무슨 말이 그래!”
“호호! 농담. 농담.”
“어떻게 됐어?”
등여산이 거두절미 본론부터 물었다.
“혈천방에 있는 건 사혼진령음이라는 건데, 명세는 몰라. 함부로 쓰지 않는 걸 보면 치명적인 게 분명해. 호발귀에게는 혈마가 되든 안 되든 치명적인 해가 될 거야.”
“음! 이제 이해되네. 그래서 그 많은 수하를 죽이면서 혈마로 만들려고 한 거네.”
당홍이 미간을 확 찡그렸다.
“혈천방주는 일단 사혼진령음부터 사용할 생각인 것 같아. 어쨌든 날 부르긴 할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계집애, 너는? 뭔가 좀 찾았어?”
홀리가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등여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억지로는 못 들어가. 들어갈 길이 없어.”
등여산은 사멸강진에 관해서 설명했다.
“들어갈 때는 허락 받아야 한다고 치고, 그럼 나올 때는? 안쪽에 기관장치가 있지 않을까?”
“있어도 못 찾을 거야.”
“그렇겠지? 그럼 끝났네.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결론 내. 괜히 머리만 아파.”
홀리가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지심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러니 기다리자. 서둘지 말자.
“안에 들어가서 일을 벌이면, 혈천방주를 낚아채. 그렇지 않으면 안에서 죽어.”
등여산이 말했다.
“내가? 호호! 얘가 날 너무 높이 보네. 내가 무슨 수로 혈천방주를 낚아채. 그건 못해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어. 호발귀, 절대로 혈천방에 안 줘.”
“아니 낚아챌 수 있어.”
당홍이 말했다.
“내가 재밌는 독 하나 만들어볼게. 지금 당장 들어가지 않은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네. 그동안 준비하면 돼. 홀리, 넌 혼자가 아니야. 네가 안에서 잘못되면 우리도 잘못돼. 결코, 너 혼자 보내지는 않아. 잠깐만 기다려.”
당홍이 급히 지필묵을 꺼내서 급히 약화제를 적어갔다.
“이거 좀 구해줘.”
그녀가 홀리에게 약화제를 내밀었다.
“이게 무슨 독인지 모르겠지만, 이 약초들을 달라고 하면 금방 눈치챌 텐데? 어차피 우리가 구할 수는 없고, 혈천방에 손을 내밀어야 하니까.”
“호호호! 그래서 약화제가 세 개잖아.”
“……?”
홀리가 이해할 수 없는 듯 당홍을 빤히 쳐다봤다.
“앞에 적은 것은 음허화왕(陰虛火旺)을 다스리는 약제야. 음양의 기운이 깨져서 양기가 위로 올라가는…… 에이, 간단히 말하면 남자가 헛불 낼 때 쓰는 거야. 헛불인지도 모르고 괜히 정력이 강해진 줄 알고 깝작대다가는 복상사(腹上死)해.”
“허엄!”
도천패가 듣기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 자기는 내가 보살펴 주잖아. 마음 놓고 해도 돼.”
“어험! 험!”
“킥! 귀여워.”
당홍이 도천패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홀리와 등여산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도천패를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홍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중간에 쓴 것은 오로불절(惡露不絶)을 치료하는 데 써. 애 낳고 난 다음에 자궁에 오로가 남아있을 때 생기는 병이 있어. 그때 쓰는 거야.”
“난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도천패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하지만 곧 당홍에게 잡혀서 주저앉고 말았다.
“후반부에 작성한 것은 명문화쇠(命門火衰) 신정부족(腎精不足)…… 어려운 말 필요 없고, 쉽게 말하면 여자들 성욕이 저하되었을 때 쓰는 거야.”
“켁!”
등여산이 사레들린 듯 목을 잡고 헛기침을 했다.
“이거 뭐 전부 이상한 거뿐이네?”
홀리도 미간을 찡그렸다.
“맞아. 그 약화제 대로 약초를 가져오면 내가 추릴 거야. 내가 만들려는 독이 그 안에 다 있거든. 그걸 주면 어떤 의원도 의심하지 않고 약재를 내줄 거야.”
“하! 정말 이런 거로도 독이 만들어지나?”
도천패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약화제를 훑어봤다.
“왜 이런 종류만 적었냐 하면…… 혈마후가 혈마를 만들 때 어떤 과정을 거친다는 것쯤은 이미 다 알잖아. 남녀 간에…… 그러자면 이런 약재들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
“알았어요, 언니. 구해올게.”
홀리가 약화제를 품에 넣었다.
“지내는 데는 괜찮아?”
“괜찮아. 편안한 동굴을 찾았어. 당분간 음문촌에 염려하지 않고 질 수 있을 것 같아.”
“잘 됐다. 그럼 나 갈게.”
홀리가 등여산의 손을 잡아주고는 일어섰다.
홀리가 산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너무 쓸쓸해 보여.”
등여산이 홀리를 보면서 말했다.
“너희 둘, 한 남자 두고 싸우는 사람. 맞냐?”
당홍이 물었다.
“싸워요? 왜요?”
“이거는 먼 나중 얘긴데, 누구 한 사람은 호발귀를 양보해야 하잖아. 너희를 보면 서로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그면서도 또 서로 아끼는 것 같아.”
“그래요?”
“쟤한테 양보할 거야?”
“아니요.”
“그렇지? 그러면 쟤를 너무 심하게 염려하는 거 아냐?”
“호호호! 염려하면 안 돼요?”
등여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웃었다.
지하 토굴에서 등여산이 홀리에게 한 말은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 홀리와 등여산만의 비밀이다. 나중에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적어도 호발귀가 혈마 위험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는 비밀이다.
“얘들이 지금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네.”
당홍이 등여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히며 쳐다봤다.
* * *
쉬이잇!
혈천방주는 홀리가 떠나자마자 즉시 미로진으로 돌아왔다.
망혼자가 말 몇 마디에 죽었다. 비록 구혼음소를 읊었을지라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자신이 직접 눈앞에서 감시했지만, 그래도 알지 못하는 속임수를 썼을 수 있다.
철컥! 철컥!
철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섰다.
철문 안에는 망혼자가 지극히 편안한 모습으로 숨져있다.
홀리와 함께 떠날 때에 비해서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철컥!
그는 재빨리 망혼자의 철갑을 풀어냈다. 그리고 망혼자의 옷을 벗겼다.
망혼자는 죽었다. 확실히 죽었다.
옷을 벗기는 동안 손끝에 사자(死者)의 차가운 기운이 여실히 전해져 왔다.
혈천방주는 망혼자의 몸에 횃불을 비추며 타살 흔적을 찾았다.
홀리가 손을 썼다면 매우 섬세한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접촉한 손과 어깨를 유심히 살폈다.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망혼자의 손은 넋을 잃은 지 꽤 오래된 탓에 여인처럼 부드럽다. 강한 탄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외부 흉기에 찔린 흔적은 전혀 없다.
휘이!
혈천방주는 즉시 망혼자를 어깨에 들춰 맸다.
의원 다섯 명이 벌거벗은 사내를 꼼꼼히 살폈다.
혈천방 본단에는 의원이 다섯 명 있다. 오로지 본단 무인들만 전담하는 의원들이다. 그래서 특히 창상(創傷)이나 진기 엉킴 같은 내상에 능통하다.
그들 다섯 명이 모두 부검에 참여했다.
“독살은?”
“없네.”
“타살 흔적은?”
“없어.”
“다시 한번 볼까?”
의원들은 사내를 다시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구멍 하나하나를 헤아릴 정도로 꼼꼼히 봤다.
“난 없는데.”
“나도.”
의원들이 모두 개인 의견을 말했다.
그들 다섯 명은 외부적인 상처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그럼 이제부터 부검을 시작하지. 내가 칼을 잡을 건데, 이의 있으면 말하고.”
“이의가 있을 리 있나. 하게.”
쭈우욱!
호발귀를 살피던 의원이 소도를 들고 사내의 배를 쭉 갈랐다.
빨간 피가 왈칵 쏟아졌다.
다른 자가 뼈 자르는 가위를 가지고 가슴뼈 정 중앙에 댔다.
“잘라.”
우두둑! 두둑! 우둑!
가슴뼈가 잘려나갔다.
의원들은 그 가슴뼈를 자른 상태에서 멈추고, 오장육부 상태부터 살폈다.
간, 폐, 심장, 위장, 신장……
다섯 명이 침묵 속에서 살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기록했다.
장기를 살필 때는 외관부터, 색깔 변화, 형태 변화까지 유심히 관찰한다. 나중에 장기를 떼어냈을 때는 무게도 계량한다. 모든 부분을 살핀다.
이런 부검에서 한 사람이 의견을 피력하면 다른 의원도 덩달아서 의견이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침묵 속에 부검을 시행한다.
“이상 없습니다.”
최종 보고다.
“아무 이상도 없단 말이냐?”
“네.”
“다섯 명 모두 공통된 의견이야?”
“네.”
“개별적으로 이상 소견을 말할 사람?”
의원들이 침묵했다.
“사인은?”
“피가 막혔습니다.”
“피? 조금 더 자세히.”
“피가 막혀 혈류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핏줄 속에 혈전이 많이 생긴 거로 봐서는 한참 동안 정체됐던 것 같습니다. 심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심장은 깨끗했습니다.”
“말이 안 되잖아. 심장에 이상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심장은 깨끗해? 이게 말이 되나?”
“사실입니다.”
“사실이겠지. 사실일 거야.”
혈천방주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렇게 되면 정말 구혼음소를 믿어야 하나?
구혼음소가 단지 주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점을 믿어야 하나?
혈천방주는 의원들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할 말이 없다는 사람을 붙들어 놓고 백날 추궁한들 무슨 필요가 있나.
혈천방주는 미로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철컥!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홀리가 죽인 자와 똑같은 모습의 망혼자가 쇠밧줄에 묶여 있었다.
망혼자는 벽에 등을 기대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저벅! 저벅!
혈천방주는 망혼자에게 다가가서 홀리가 했던 그대로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나 혈천방주다. 알지?”
망혼자는 대답이 없다. 안다. 언제나 대답이 없다. 홀리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따라서 한 것뿐이다.
혈천방주는 홀리가 했던 그대로 망혼자의 두 손을 잡았다.
“우리 이제 만났구나. 서로 알고는 있었는데 먼 길을 돌아와 이제 만났어.”
‘이게 무슨 짓인지.’
혈천방주는 속으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꾸주 바흐 부이러 하수내 따 사루 칠.”
혈천방주는 사혼진령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혼진령음은 구혼음소보다 훨씬 강렬하다. 구혼음소는 편안한 죽음을 주지만 사혼진령음은 즉각적인 죽음을 일으킨다. 단박에 뇌를 후려친다.
그런데 망혼자가 반응이 없다. 조용하다.
“사시 미다 하 무으저 아르사 라처.”
혈천방주는 변형된 사혼진령음이 아닌 원래의 사혼진령음, 이백 년 전부터 전해온 진결을 읊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구혼음소는 여인이 읊어야 한다. 하지만 사혼진령음은 정반대로 남자가 읊는다.
혈의검 소휘는 남자다.
남자만이 말할 수 있는 진결이다.
망혼자는 죽지 않았다.
망혼자는 혈기만 북돋우면 바로 혈마로 변한다. 물론 귀색혼령대법을 거쳐야 한다. 단순히 넋을 잃은 정도만은 아니다. 혈마에 가깝게 조련되었다.
혈마가 되는 길로 들어선 자에게는 구혼음소가 통한다고 봐야 한다.
“후우! 그럼 할 수 없지. 아깝지만 호발귀를 나눠 쓰는 수밖에.”
혈천방주가 한숨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