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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217화 (217/500)

第五十四章 사결(死訣) (2)

“좀 어떠냐?”

“똑같습니다.”

“달라진 점은 없고.”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야 할 텐데.”

혈천방주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원래 생기라는 것은 진맥한다고 잡히는 게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기로 타통 시켜봐도 알아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살아있으면 생기가 있는 것이고, 활력이 넘치면 생기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호발귀는 생기가 존재한다.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호발귀의 생기는 보통이다. 활력이 넘치지도 않고, 축 늘어지지도 않았다. 조용하고 정순하다.

그러면 혈기는 남아있는가?

호발귀는 여전히 호발귀인가, 아니면 혈마로 변했나?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른다. 이것은 호발귀가 깨어나 봐야 알 수 있다.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혈천방주가 중얼거렸다.

“언제쯤 깨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나?”

“죄송합니다.”

의원이 고개를 숙였다.

“음!”

혈천방주가 신음을 흘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매우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검에 찔린 상처는 벌써 아물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으려면 멀었지만, 정신을 잃고 있으니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저 진맥하다가 생각난 건데, 정확한 건 아니라서 말씀드리기 그렇습니다만……”

의원은 혈천방주에게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듯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말했다.

“말해봐. 뭐가 되었든.”

“지금 호발귀 상태를 보건대, 아마도 본인 스스로 의식을 안에서 걸어 잠근 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의식 봉인인데, 사람이 워낙 슬프면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마음을 닫는 수가 있는데, 호발귀는 그게 의식 쪽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후후!”

혈천방주가 웃었다.

그건 아니다. 의원도 혈마 상태에 대해서는 장님 문고리 잡는 격으로 더듬거리고 있다.

혈천방주가 호발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하나 묻지. 살려고 하는 욕망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부딪히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네?”

의원이 고개를 쳐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겠다는 마음과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야겠다는 마음. 이 둘이 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이 말이다.”

“그건.”

의원이 말을 잊지 못했다

의원이 못나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한다. 천하의 석학도 이 부분에서는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다.

“호발귀는 안으로 의식을 가둔 게 아니다. 하나는 살려고 했고, 하나는 죽고자 했다. 이 두 가지가 충돌을 일으켜서 의식불명 상태가 됐어. 치료하는 데 참고로 해.”

혈천방주가 웃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의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알기는 쥐뿔!’

혈천방주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의원에게 말해주었지만, 자신이 말한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반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별 것 없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살고자 해도, 누군가 옆에서 손발을 묶어놓고 칼로 푹 쑤시면 죽는다.

살고자 하는 마음이 무슨 필요가 있나.

살고자 하는 마음은 칼에 찔린 상태에서 버려진 것처럼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이를 악물고 버티는 힘을 말하는데, 극악한 환경에서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호발귀는 그 살고자 하는 마음이 몸을 뚫고 들어오는 검까지 비키게 만들었다.

호발귀가 느끼는 생기와 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혈천방주는 고개를 돌렸다.

“등창 생기지 않도록 잘 돌보고.”

“네.”

지심옥 안에서 호발귀와 함께 숙식하는 시종이 공손히 대답했다.

“홀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심옥에서 나오자마자 소귀가 다가와 보고했다.

“홀리?”

“음문촌장의 딸입니다.”

“알고 있어. 후후! 촌장도 늙었군. 옛날 같았으면 벌써 땅에 묻었을 텐데.”

“일단 천화전 밖에서 기다리고 했습니다.”

“왜? 안에서 기다리고 하지?”

“방주님도 안 계신 데, 외인을 집무실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너무 과민해. 그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하하!”

혈천방주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음문촌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것은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호발귀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어.’

더욱이 홀리는 호발귀와 눈 맞은 사이지 않나. 잘 이용하면 좋은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

“가자.”

혈천방주는 지심옥에서 느꼈던 답답함을 떨쳐버리고 기분 좋게 걸었다.

“홀리라고 해요. 이름은 들어보셨죠?”

“홀리.”

혈천방주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좀 민감한 질문인데.”

“네.”

“누가 진짜 호발귀 여자야? 천살단 책사와 너 중에.”

“혈천방은 어떻게 파악했어요?”

“하하! 내 밑에 있는 애들은 싸움밖에 할 줄 몰라. 남녀 사이를 보는 눈이 젬병이야, 젬병. 줄창나게 들려오는 이야기가 호발귀에게 두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뿐이야. 그래서 뭐, 도대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하네?”

“풋! 재미있네요.”

“호발귀 여자가 누군지 말 안 해줄 건가?”

“살아서는 책사, 죽어서는 나. 됐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책사와 나, 둘 다 별거 없다는 소리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얼굴빛이 안 좋네? 촌장한테 호되게 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딱 죽지 않을 만큼 당했죠.”

“그래서 지금은 어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아니면은 정신을 차렸나?”

“그게 중요해요?”

“글쎄. 그럼 뭐가 중요할까?”

“호발귀를 깨우는 게 중요하겠죠.”

“하하하! 단도직입으로 핵심을 찌른다. 좋군. 들은 대로 성격이 화끈해. 그럼 나도 묻지. 깨울 수 있나?”

“음문촌에 구혼음소가 네 개 있어요.”

“……”

혈천방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라는 중이다.

‘구혼음소가 네 개?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토초가 혈마를 제련할 때, 그녀가 토하는 구혼음소를 자세히 들었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하 뇌옥을 뻔질나게 찾아간 이유가 구혼음소를 듣기 위해서다.

토초는 읊은 구혼음소는 하나였다.

옆에서 보면 얼핏 들은 것 같지만, 혈천방주는 소이구혼공(騷耳句魂功)을 지니고 있다. 시장 장터에서도 한 사람 음성만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

홀리가 말을 이었다.

“구혼음소로 혈마를 조정할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어요. 이건 몰랐죠?”

“혈마를 죽이는 건 내 계획에 없는데?”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네요. 방주님이 어떤 혈마를 만들든 내 앞에 서면 죽는다는 말이었는데. 손가락 하나 안 대고. 이 입만 나불거리면 죽어요.”

파팟!

혈천방주의 감각이 독사처럼 곤두섰다.

촉음악감각술(觸音握感覺術)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의 음성에서 진파(振波)를 찾아낸다. 음성의 떨림을 읽는다. 눈동자의 움직임도 살핀다. 몸가짐도 주시한다.

상대방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면 거짓을 말하는지 참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홀리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혈마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할 때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이전 음정도 이전 음성과 같았다.

혈천방주가 말했다.

“방금 한 말, 증명할 수 있나? 말만 번지르르한 것은 하도 많이 봐서. 막상 시켜보면 아무것도 못 하더라고.”

“혈마를 조정하려면 몸을 섞어야 하는데. 아시죠? 귀색혼령대법. 그건 제가 싫어요. 전 곧 죽을 놈과 몸 섞지 않아요. 그러면 남는 건 죽이는 건데, 남는 혈마 있어요?”

“하하하! 역시 화끈해. 도무지 거침이 없어.”

혈천방주가 크게 웃었다.

“그럼 일단 구경부터 하지. 혈마를 말만으로 죽일 수 있는지. 혈마는 없고, 음문촌에 제공하던 망혼자(亡魂者)는 있는데. 망혼자도 가능할까?”

“가능하죠.”

“아! 그러고 보니 차 한 잔 주지 못했는데, 괜찮겠지?”

혈천방주가 일어설 채비를 갖췄다.

“괜찮아요. 가죠.”

홀리가 먼저 일어섰다.

혈천방주는 홀리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일 층, 이 층, 삼 층.

각 층간 계단이 서른 개다. 층간 높이가 상당히 있다.

또 각층에는 적어도 서른 명쯤 되는 무인들이 눈을 번뜩이며 지켜서 있다.

힘으로 뚫고 내려가려면 적어도 예슨 명과 부딪쳐야 한다.

지하 삼층으로 내려서자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다른 것은 일절 보이지 않고 복도만 보였다.

혈천방주가 앞장서서 걸었다.

“여긴 구십구미로진(九十九迷路陣)이라고 하는데, 길을 잃으면 헤어나오지 못해. 벽 두께가 넉 자야, 넉 자. 저쪽에서 고함을 질러도 안 들려. 그러니 한 번 삐끗하면 이 안에서 죽는다는 거지. 하하하! 잘 따라서 와.”

“네. 따라가고 있어요.”

홀리는 길을 외워보려고 했다. 하지만 굽이를 두어 번 돈 후에는 곧 생각을 바꿨다.

‘여긴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해. 횃불까지 꺼지면 칠흑 같은 어둠이 덮일 거고.’

혈천방주는 거의 백여 장 정도를 걸은 후에야 철문으로 막힌 밀실 앞에 도착했다.

밀실 앞에는 무인 두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철문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용하지?”

“네.”

“너무 조용해서 책 읽기 딱 좋아. 연공하기 좋고. 가끔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여기 와서 쉬곤 해.”

혈천방주가 철문 앞에서 섰다.

방주는 직접 열쇠를 꺼내서 철문에 채워진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철컥! 구르르릉!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혈천방주가 안으로 들어가서 손수 횃불을 밝혔다.

“문을 따고, 불을 밝히고…… 이런 건 수하가 하지 않나요?”

“내 말을 흘려들었나 보군. 여긴 미로진이라니까. 개나 소나 다 들어오면 그게 미로진인가? 이 길은 나만 알고 있지. 한 번 삐끗하면 아무도 못 나가. 하하하!”

혈천방주는 은연중에 협박했다.

너도 못 나갈 수 있다는 뜻이 말 속에 담겼다.

“아!”

홀리는 횃불에 비친 사람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사람이 쇠밧줄에 묶여 있다.

혈천방주가 혈마를 망혼자라고 말했는데, 왜 그런 용어를 사용했는지 알겠다.

쇠밧줄에 묶인 사람은 넋이 빠져나간 바보라고 할까? 눈동자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쇠밧줄에 묶인 채로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사람이 들어오고 불이 밝혀져도 쳐다보질 않는다.

영혼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이게 음문촌에 제공한 상태야. 물론 음문촌에 제공할 때는 혈기를 일으켜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상태로 만들어서 보내는데, 그건 별거 아니고.”

“몸은 멀쩡하죠?”

“그럼. 사지육신 멀쩡하고 혼만 빼놓은 상태지.”

“그렇군요.”

“이 상태로 힘들 것 같으면 말해. 못해도 괜찮으니까. 음문촌 촌장 여식이니까 망혼자를 봤다고 해도 문제 될 것 없고. 미로진은 빠져나가게 해줄 수 있으니까.”

그때, 홀리가 불쑥 물었다.

“혈천방이 가진 진결은 뭐라고 불러요?”

“뭣!”

“어멋! 놀라신 거예요? 설마 음문촌이 그 정도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실 텐데.”

“후후후! 너 잘해야겠다. 자칫하면 여기서 뼈 묻겠어.”

혈천방주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아직 대답 안 주셨는데. 뭐라고 불러요?”

“사혼진령음.”

“음! 구혼음소. 사혼진령음. 먼저 방주님이 사혼진령음을 써보시겠어요? 망혼자가 죽는지.”

“아니, 사양하지. 네 솜씨나 보자.”

“그러죠.”

홀리가 활짝 웃었다.

혈천방주는 망혼자에게 사혼진령음을 사용해 봤다.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었다.

사혼진령음도 진정한 혈마가 아니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구혼음소로 망혼자를 죽일 수 있다고 하니까 반신반의하며 미로진으로 데려온 것이다.

“시작할게요.”

홀리가 망혼자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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