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四章 사결(死訣) (1)
“혈천방주가 호발귀를 데려갔다.”
“뭐라고!”
홀리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였던 행동 중에서 가장 격양된 행동이다. 홀리의 지금 모습만 봐도 그녀의 속마음을 환히 읽을 수 있다. 그녀가 호발귀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겠다.
촌장은 홀리가 지하 토굴에서 죽어가는 동안, 호발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호발귀는 지금 어디 있어.”
“지심옥이라는 곳에 갇혀 있다.”
“지심옥이 어딘데?”
홀리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후후후!”
촌장이 홀리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홀리는 촌장이 웃자 안색을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호발귀’라는 말에 당장 촌장 대신 아버지를 택했다. 냉정함을 잃고 예전에 하던 그대로 촌장을 대했다.
칼자루는 홀리만 쥔 게 아니다. 촌장도 한구석을 잡고 있다.
“지심옥은 기관진 다섯 개로 둘러싸인 곳이다. 네 오빠가 뚫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지켜 보고만 있지. 아! 그리고 또 알아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
“뭔데?”
“이건 정말 몰랐던 건데, 혈천방에도 음문촌과 비슷한 진결이 있는 것 같아. 이건 추측이야. 하지만 그런 게 없다면 일부러 호발귀를 격동시켜서 혈마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겠지. 우리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촌장은 ‘독단’이라는 말을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럼 호발귀는 혈마가 된 거야?”
“아니. 이게 득인지 실인지 모르겠는데, 호발귀가 혈마로 변하지는 않았어, 혈마를 만드는 도중에 호발귀 그놈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아버렸거든.”
“심장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죽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정말 이상해. 호발귀 같은 놈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썼는데, 심장에서 비껴갔다네? 그래서 죽지 않았고? 이게 말이 돼?”
“그럼 지금은 잡혀있기만 한 거야? 몸은 괜찮고?”
“의식불명. 몸은 괜찮은데 깨어나지 못하고 있단다.”
촌장은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해주었다.
홀리가 촌장을 빤히 쳐다봤다.
“왜 이래? 무섭게.”
“뭐가 말이냐?”
“사실대로 말해주는 거. 이거 전에는 안 하던 거잖아.”
“그런가? 그랬다면 꽤 섭섭했겠군.”
촌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그렇구나. 호호! 깜빡 속을 뻔했네. 그럼 그렇지.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
홀리가 피식 웃었다.
토초가 죽는 순간, 음문촌이 혈마를 가질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홀리도 구혼음소를 알고 있고, 촌장의 딸이지만 이미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오래전이다.
사실, 촌장은 일곱 자식 중 홀리를 가장 아꼈다.
음문촌 여인답지 않게 강하면서도 예뻤다. 총명하기까지 했다. 성격도 강했다. 언니와 오라버니들을 눈 아래 깔아볼 정도로 잘났고, 도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음문촌을 배신했다.
음문촌이 지닌 열망을 알고 있으면서도 호발귀와 사랑에 빠져서 혈마 제련을 시도하지 않았다.
음문촌은 그녀에게 적어도 두세 번쯤은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혈천방 귀문을 없애면서 호발귀가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딴사람이 된 적도 있었다. 기적적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음문촌 관점에서 홀리는 믿을 수 없는 여자가 되었다.
그녀에 봉맥폐혈수를 쓴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어떻게든 제약을 가해 놓아야만 한다.
음문촌 입장은 언제나 분명했다.
토초가 혈마후가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토초는 뼛속까지 음문촌 사람이다. 음문촌을 위해서 혈마를 사용한다. 촌장 말에 거역하지 않는다.
토초가 혈마후가 되면 혈마가 지배하는 세상은 혈마후 것이 아니라 음문촌 것이 된다.
하지만 홀리는?
이 물음을 던지면 일단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지금 촌장은 봉맥폐혈수를 믿고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촌장이 알려준 구혼음소도 진짜일 것이다.
홀리가 구혼음소를 읊으면 호발귀는 죽는다.
정말 그렇게 될 경우, 음문촌은 혈마와 홀리를 모두 잃는다. 혈마는 구혼음소에, 홀리는 봉맥폐혈수에 죽는다. 홀리가 혈마를 죽인다면 무슨 낯으로 촌장을 찾아오겠나. 그녀는 혈마와 함께 봉맥폐혈수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촌장이 믿는 것은 따로 있다.
홀리의 사랑!
홀리는 어떻게든 호발귀를 살리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그러자면 최종 구혼음소를 쓰기 전에 이 단계, 일 단계 구혼음소를 쓸 가능성이 크다.
일단 혈마로 만들어보고, 그 후에 죽여도 늦지 않다.
일이 이렇게만 되면 딱 좋다. 홀리를 호발귀를 조정하고, 홀리는 촌장과 타협한다. 적당한 선에서 호발귀를 이용하고, 촌장은 홀리를 한 달에 한 번씩 치료해준다.
홀리가 봉맥폐혈수로 죽으면 혈마만이 남는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악마가 세상을 피로 물들인다.
홀리도 이런 점은 바라지 않을 것이니 호발귀를 두고 혼자 죽지는 못한다.
죽으면 둘 다, 살아도 둘 다.
토초가 죽은 지금 촌장은 후자에 모험을 걸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준다. 최악의 상황이라 봐야 호발귀를 잃는 것뿐이니 음문촌으로서는 손해 볼 게 없다.
홀리는 아버지가 지하 토굴에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말을 떠올렸다.
- 이제 부녀지간은 끊어졌다.
음문촌은 정말로 홀리를 혈마 제련 도구로 생각한다. 딸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독하네요. 정말.”
홀리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말도 다시 높였다. 촌장이 무척 낯선 사람으로 느껴졌다.
촌장이 홀리를 보며 말했다.
“난 손해 보는 짓은 안 해.”
홀리는 토초의 죽음이나 혈마에 대해서 형제들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토초가 죽을 때 왜 그 방에 있었냐는 물음에도 대꾸할 필요가 없다.
“모두 입 다물어.”
촌장이 한마디 했다.
사실, 형제들은 홀리에서 설명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지 모르지만, 홀리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모든 관계를 말끔히 지워버렸다.
형제들은 아직도 홀리가 토초 죽음에 관여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구혼음소가 혈마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모르는 까닭이다.
형제들은 혈마에 대해서 촌장 다음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혈마에 관해서 관심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구혼음소를 알지 못하는 한, 혈마를 이해하는 데는 제약이 많다.
구혼음소는 여인에게만 전수된다.
남자 중에서는 오직 촌장만이 알고 있다.
나중에 촌장이 후계자를 지명한 후에야 또 한 사람이 구혼음소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형제들은 상식선에서 생각한다. 구혼음소가 지닌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 막내가 하는 일을 잘 도와줘라. 지난 감정은 접어두고.”
촌장이 말했다.
형제들이 사나운 눈으로 홀리를 흘겨봤다. 다만 예전부터 사이가 좋던 육자만 싱긋 웃었다.
“먼저 밖에 상황부터 알려줘.”
홀리가 말했다.
“나는 말할 게 없다.”
이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 할 말이 없어.”
삼자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홀리는 혈천방 상황을 알고 싶은데, 모두 말을 해주지 않는다. 촌장이 옛일은 잊으라고 말했지만, 토초의 죽음에 일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홀리를 밉게 만들었다.
“아! 이거 왜들 이래? 혈천방 상황을 알고 싶지? 혈천방, 완전히 묵사발 났어. 혈마하고 대판 붙었잖아. 그러니 붕괴 직전이지. 원래는 혈천방도 이곳을 버릴 생각이었던 거 같은데. 호발귀가 쓰러지는 바람에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아.”
육자가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호발귀는 괜찮아?”
“모르지. 지심옥에 갇혀 있으니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몰라.”
“지심옥이 어디야? 안내해줄 수 있어?”
육자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인지 아는데, 꿈도 꾸지 마. 우리도 몇 번 들어가 보려고 했거든. 경계서는 놈들은 따돌릴 수 있는데, 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 옥문이 열리지를 않아.”
“기관?”
육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홀리는 등여산을 생각했다.
등여산은 기관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계집애 분명히 여기 있어.’
홀리는 확신했다. 호발귀가 혈천방에 잡혔는데, 호발귀와 도천패가 이곳을 떠날 리 없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다. 그들의 무공이 매우 높아서 형제들이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호발귀는 오는 내내 일행에게 생기격타를 했다.
당연히 진기는 급성장했다.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 되었다. 그러니 그들이 형제들의 눈을 피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은 어디까지야?”
홀리가 육자에게 물었다.
“이 산 전체.”
“그렇구나.”
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물어?”
“너무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맑은 공기 좀 쐬려고. 나 바깥에 나가본 지 오래됐잖아.”
홀리가 말했다.
“저거 이대로 내버려 둘 겁니까!”
이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동생한테 저거라니? 무슨 말버릇이 그래!”
촌장이 이자를 나무랐다.
그러자 이자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촌장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듯한 표정이다.
“앞으로 먼 길을 같이 가야 할 사이다. 최대한 도와주도록 해.”
“지금 먼 길이라고 하셨습니까?”
일자가 물었다.
“나보다는 너희들이 더 먼 길을 같이 가야 할지도 모르겠나. 어쩌면 차기 촌장을 명할 때도 입김을 불어낼지 모르지. 잘 보이도록 해.”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 좀 해라. 토초가 없잖아! 혈마를 만들 수 있는 계집은 제밖에 없어!”
촌장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홀리는 산길을 걸었다.
‘여기 머물러 있다면 분명히 나올 거야.’
홀리는 등여산이나 도천패가 나타날 것을 예상했다.
그들은 혈천방을 피해서 숨어 있다. 잠시 피하는 게 아니라 오래 피해있어야 한다. 그러면 혈천방을 피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일까? 혈천방이 음문촌에 내어준 땅, 바로 이 산이다.
등여산은 호발귀와 함께 이산에 온 적이 있다.
동굴을 통해서 지하 뇌옥으로 들어왔다. 지하 토굴까지 찾아냈고, 죽어가던 자신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호발귀가 준 생기가 아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미련하다니까. 이러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없고.”
호발귀를 생각하자 홀리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
툭!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그녀를 건드렸다.
홀리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봤다.
등여산이다. 그녀가 작은 돌멩이를 들어서 홀리를 향해 던진다. 지금도 또 던지려고 팔을 들어 올렸다.
“계집애.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
홀리는 등여산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쳤다.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몸은 많이 안 좋아 보여. 괜찮아?”
등여산이 홀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멀쩡해. 그건 그렇고. 너는 네 서방도 못 지키냐? 어떻게 혈천방에 잡혀가도록 내버려 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네.”
등여산이 말을 하면서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홀리가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두 여인은 한참을 껴안았다.
순간, 등여산이 바르르 떨었다.
“나 무서워서 죽겠어. 그 사람 죽으면 어떡하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 홀리니까 말할 수 있는 것, 등여산의 속마음이다.
호발귀가 혈천방에 잡혀가 있는 동안 혼자서 끙끙 앓았던 속앓이가 홀리가 보자 탁 터져 나온 것이다. 그만큼 호발귀는 홀리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여린 줄 알았어. 강한 척하기는. 이렇게 여리면서 나 없이 뭘 하려고.’
흘리는 말 없이 등여산을 꽉 껴안았다.
힘껏 껴안으면서 말했다.
“안 죽어. 걱정하지 마. 네가 죽게 하지 않을 거잖아. 나도 죽는 거는 용납하지 못하겠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너는 어때? 용납할 수 있어?”
“아니, 용납 못 해.”
“호호호!”
“풋!”
등여산은 그제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