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三章 잘못된 진결(眞訣) (5)
토초의 시신이 뇌옥 정중앙에 눕혀졌다.
촌장을 비롯한 오남 일녀가 토초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토초가 혈마를 재현시키려다가 오히려 혈마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런 일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절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는 거였다.
도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을까?
토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익히 짐작된다. 토초의 죽음을 본 사람은 홀리뿐이지만, 굳이 홀리에게 말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몸 상태를 살펴보면 죽은 원인이 단박에 파악된다.
진기가 일시에 흐트러졌다.
아니,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진기가 흩어졌다고 해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그런데 죽었다. 진기가 흩어지면서 목숨을 빼앗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
토초는 피의 흐름이 일순간에 멈췄다.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잃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런 일이 토초에게 일어났다.
“난 네가 토초와 같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서로 좋은 사이도 아니고, 원수처럼 으르렁대면서. 무슨 일로 토초에게 간 거지? 토초가 혈마 제련을 한 게 처음도 아닌데, 네가 딱 나타나자마자 토초가 죽었어. 이상하지 않아?”
이자가 홀리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언니를 죽였다는 거야?”
“구혼음소는 너와 토초만 알고 있으니까. 토초가 제대로 하고 있는데 네가 방해했다면……”
“뭣!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만!”
촌장이 버럭 소리를 질러서 이자와 홀리의 다툼을 막았다.
촌장은 오른손을 파르르 떨었다. 처음에는 떨림이 미약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진다.
촌장이 정말로 화가 났다.
이자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촌장이 정말로 화난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모두 나가. 나가 있어!”
촌장이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했다.
촌장은 홀리를 데리고 토초가 사용했고, 목숨을 빼앗긴 연공실로 들어섰다.
“앉아라.”
홀리는 의자에 앉았다.
연공실로 들어서려면 철문을 두 개나 거쳐야 한다. 철문 두 개를 닫아걸면 괴성을 지르지 않는 한, 바깥으로 음성이 새어나가지 않는다.
쿵!
촌장은 연공실 석문마저도 닫았다.
이제 연공실 안에서 나누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든 오직 두 명, 촌장과 홀리만 아는 비밀이 된다.
“말해봐라.”
촌장이 말했다.
“다 말했는데 뭘?”
“토초가 죽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말해봐. 넌 귀색혼령대법 장면을 훔쳐봤으니 혈마 반응도 봤을 것이고, 네가 말한 것 외에 직감이 있을 것 아니냐?”
“난 할 말 다 했어. 직감 같은 게 있으면 말했지. 그런데 정말 언니가 왜 죽었지? 구혼음소는 혈마를 조정하는 주문이잖아. 약한 것을 펼쳤을 때는 말을 잘 들었는데, 강한 것을 펼치니까 오히려 죽인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
홀리가 태연히 촌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촌장이 홀리 앞에 앉았다. 그리고 홀리를 빤히 쳐다봤다. 가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촌장이 결심을 굳힌 듯 눈을 찔끔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휴우! 좋다. 사실을 말해주지. 이번에 토초가 죽은 것은 혈마가 불안정해서다. 혈천방주에서 혈마를 만들었는데, 제대로 만들지 못했어. 그래서 강한 구혼음소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본다.”
“그렇구나. 그럼 호발귀였다면 통했다는 말이네?”
“통한다. 장담하지.”
홀리는 촌장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럼 이제 말해줘. 구혼음소, 유래가 어떻게 돼?”
“너도 알다시피 구혼음소는 삼대 촌장께서……”
“아! 제발! 거짓말은 인제 그만! 우리 선조가 구혼음소를 만들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몰라? 구혼음소가 어느 나라, 어느 부족 말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도대체 왜 구혼음소가 어디서 났는지 말해주지 않는 건데?”
“지금 너만 이리로 부른 것은 촌장으로서 명령하기 위해서다. 아비로써 편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너무 편하게 해준 것 같군. 그럼 이제부터는……”
“아!”
홀리가 손을 들어서 촌장의 말을 막았다.
“난 참 말을 안 들어. 언니처럼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언니한테 기대했던 거 아냐? 내가 호발귀를 마음에 두었는데도 계속 언니를 계속 밀어붙인 것은 언니가 말을 잘 듣기 때문이고. 난 정말 말을 안 들었나 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라. 네 푸념을 듣는 것도 마지막인 것 같으니.”
“뭘 새삼 봐주는 척해? 부녀지간은 끊어졌다며? 그래서 봉맥폐혈수까지 쓴 거 아냐? 그럼 처음부터 촌장 입장이었던 거고. 촌장으로서 어떤 명령을 할지도 알겠어. 난 음문촌 사람이니 당연히 따라야겠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말을 듣지 않잖아.”
슷! 턱!
홀리가 검을 풀어서 탁자에 올려놨다.
“그냥 죽여. 어차피 음문촌이 그리워서 돌아온 것도 아니고 구혼음소 유래를 알기 위해서 온 건데.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이를 갈았으니까 분근착골(分筋錯骨)도 이겨낸 거고.”
“후후후!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호호호! 목숨 가지고 위협하는 거야? 장난해?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아무리 밉다고 딸한테 분근착골을 사용하는 법이 어딨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날 호발귀 잡는 도구로만 보네? 그렇게는 못 해. 죽여. 죽을게.”
홀리가 편안하게 앉았다. 촌장을 보고 싱긋 웃기까지 했다. 손가락으로 검을 톡 쳐서 촌장 앞으로 밀었다. 빨리 죽이라고.
촌장이 말했다.
“협박이냐? 내 목숨으로 날 협박하는 거야?”
“이게 협박이 되거든. 언니가 죽었으니 이제 사람이 없잖아. 날 죽이고 다른 여자를 구해서 구혼음소를 알려줘. 앞으로 삼사 년 후에는 혈마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때는 언니처럼 실패하지 않게 혈마를 잘 만들기 바래.”
홀리가 피식 웃었다.
촌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홀리를 이용하려면 그녀가 원하는 것도 주어야 한다.
“음! 좋다. 그렇게 원한다면 들려주지.”
촌장이 일어서서 연공실을 걸었다. 홀리를 쳐다보지 않고 연공실 구석구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구혼음소는 혈마가 직접 혈마후에게 건네준 것이다. 혈마의 진결이야.”
홀리는 촌장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했다.
“그럼 구혼음소는 혈마를 노예로 만드는 게 아니네? 이거 혹시 자살 진결이야?”
“하하하! 역시! 호발귀와 지내더니 한마디만 해도 알아듣는구나. 하하! 맞다. 자살 진결, 맞아.”
촌장이 웃었다.
홀리는 호발귀가 혈마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매 순간, 혈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봤다. 호발귀는 그녀를 볼 때마다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이백 년 전 혈마가 제정신이었다면 그 역시 자신이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발귀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장 마지막 부분을 맡겼을 것이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주문, 구혼음소다.
혈마가 건넨 구혼음소는 거짓 진결이 아니다. 진짜 진결이다. 만약 이 진결을 호발귀가 집중해서 외웠다면 그는 즉시 숨이 끊어졌다.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한다.
“아! 이제 알았어. 언니가 왜 공격당했는지.”
홀리가 중얼거렸다.
제일단계 구혼음소는 자살 진결에 가깝다. 어떤 부분에서는 진짜 자살로 착각할 만한 주문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다.
혈마는 구혼음소를 자살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저항한 것이다. 죽을 생각이 없는데, 죽으라고 하니까 격렬하게 저항한 것이다. 명령을 내린 혈마후를 공격한 것이다.
혈마와 혈마후의 싸움은 권각의 싸움이 아니다. 생기를 부수는 싸움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생기 싸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기 싸움이라고 말한다. 음정이 깨진 것을 단전이 파괴된 것으로 오인한다.
사실, 단전이 파괴되면 진기가 흩어진다.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다. 여기까지는 원정이 깨졌을 때와 같다. 하지만 단전 파괴는 목숨을 해치지 않는다. 단지 힘을 쓰지 못하는 폐인만 만든다.
원정이 깨지면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힘이 사라진다. 장기를 움직이는 힘이 사라진다. 심장을 뛰게 하는 힘도 사라진다. 모든 힘이 사라지니 죽을 수밖에 없다.
혈마와 혈마후의 싸움은 이런 싸움이다.
“후후! 후후후!”
촌장이 쓴웃음을 흘렸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촌장도 이미 모든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 아니, 토초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모든 정황을 눈치챘을 것이다.
“촌장님.”
홀리가 촌장에게 ‘촌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럼 이제 진짜 구혼음소를 알려줘요.”
홀리는 늘 촌장에게 하던 말버릇 대신 깎듯이 존대했다. 아버지가 아니라 촌장으로 대한다는 뜻이다.
“뭐라고?”
촌장이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왜요? 꼭 귀신을 본 표정이네? 진짜, 진짜를 알려줘야죠?”
“진짜 구혼음소라니? 무슨 말이냐?”
“혈마가 혈마후에게 주었다는 구혼음소 말이에요. 그걸 알려주셔야죠?”
“그런 건 없다.”
“이거 왜 이러세요, 촌장님. 아! 지금 문득 생각난 건데, 어쩌면 제가 촌장님보다도 혈마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면에서?”
촌장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홀리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홀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고급 정보다. 음문촌이 지난 백 년 동안 혈마에 대해서 수집한 정보보다도 훨씬 정확하다. 그 어떤 정보도 홀리가 직접 겪은 경험보다 정확하지는 않다.
홀리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촌장님은…… 아니다. 세상은 혈마와 혈마후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요. 호호호!”
그녀는 전혀 서둘지 않았다. 촌장에게 건네는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뭘 잘못 알았다는 거냐?”
“언니는 어떤 구혼음소를 알았어도 혈마후가 되지 못했어요요. 혈마는 혈마후를 알아보니까. 언니는 난잡했어요. 혈마를 많이 만들어 냈잖아요?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이고.”
촌장이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홀리를 쳐다봤다.
“혈마후는 아무 여자나 되는 게 아네요. 혈마가 사랑하는 여자만 혈마후가 될 수 있어요.”
“……”
“혈마가 미치면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죠? 혈마후는 알아봐요. 완전히 미친 상태에서도 혈마후의 음성은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구혼음소를 남긴 거고.”
“음!”
촌장이 침음했다.
홀리가 하는 말은 촌장도 알지 못했다. 아니, 말을 듣고 있는 지금도 믿을 수 없다. 다만 토초가 죽는 순간부터 홀리가 칼자루를 쥐었다는 사실은 안다.
“알려주기 싫으면 안 알려줘도 돼요. 하지만 내가 외운 이 진결들은 아무 필요가 없어요. 이런 엉터리 진결로는 호발귀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해요.”
“음!”
촌장이 연신 신음만 흘렸다.
홀리는 촌장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계속 몰아친다. 자신을 이용하려면 사실을 토해내라고.
“생각해 보고 마음을 정하면 말해주세요. 촌장님.”
홀리가 할 말을 마친 듯 일어섰다.
“앉아라.”
촌장이 침중하게 말했다.
“벌써 결심이 서신 거예요?”
홀리가 다시 앉았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느닷없이 촌장이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홀리는 즉시 집중해서 새로운 구혼음소, 진짜 구혼음소를 외우기 시작했다.
먼저와 마찬가지로 진결은 같다. 하지만 음률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제이, 제일 구혼음소와도 다르다. 뭔가 사납고 강렬하다는 느낌이다.
‘이게 진짜일까?’
홀리는 촌장이 읊어주는 구혼음소 조차 믿지 못했다.
촌장이 가르쳐주는 구혼음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혈천방에서 내준 혈마가 아직 몇 사람 있다. 그들에게 구혼음소를 읊어주면 알아볼 수 있다. 진짜 진결이면 즉시 죽는다. 물론 생기가 작동하지 않는 혈마라면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인데, 그것까지 구분해 내지는 못한다.
혈천방은 어떤 식으로 혈마를 만들었을까? 생기를 알아내서 오염시키는 방식일까? 아닐 것이다. 생기를 볼 줄 알면 이용할 줄도 알게 된다.
혈천방에서 생기를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혈천방이 만든 혈마도 생기를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호발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겉모습이 비슷하고 일으키는 작용이 흡사하지만, 혈마와는 거리가 멀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마인이다.
결국, 촌장이 말해주는 구혼음소의 진위를 알아내는 방법은 없는 셈인가.
“사라 럼 로럼 루미리.”
“사라 럼 로럼 루미리.”
촌장이 읊고, 홀리가 따라서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