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十三章 잘못된 진결(眞訣) (2)
쒜에에엑!
도천패는 급하게 신형을 쏘아냈다.
혈천방 마을 사람들이 숲에서 나왔다. 무인이 나왔다면 지금처럼 조급하지는 않다. 싸움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나오니 이상하게도 더 급해진다.
“잘 보고 있지?”
도천패가 물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당홍을 철저히 믿어서 아무 말이 없으면 이상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당홍을 믿는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의식중에 조급한 마음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걱정하지 마. 잘 보고 있어. 너무 서둘지 마.”
당홍이 도천패를 다독였다.
쒜에엑! 쒜에에엑!
등여산은 정신없이 신형을 쏘아냈다.
호발귀를 찾아가는 길이 매우 힘들다.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은 시신, 시신, 시신이다. 혈천방도의 시신이 쫙 깔려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시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숲이 시신에 가려졌다.
바로 이 길이 호발귀가 걸어간 길이다.
이 많은 사람을 호발귀 혼자서 죽이면서 걸어갔다.
혈천방도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들었는지 시신이 무더기로 쌓여 있기도 하다.
호발귀가 시신 정리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혈천방도도 죽은 자들을 건드릴 시간은 없었다. 숲에 쓰러져 있는 혈천방도는 정확히 이런 형태로 무너졌다.
등여산은 호발귀가 겪었을 심적 부담, 그리고 다급함이 그대로 읽혔다.
‘혈기가 터졌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을 이 정도로 처참하게 죽였으면 이미 혈기가 터져도 백 번은 더 터졌다.
등여산은 비명 없는 정적이 아무래도 호발귀가 쓰러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만약, 혈기가 터졌다면 호발귀는 손 놓고 혈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미련한 사람은 틀림없이 구혼음소를 읊었을 것이다. 그리고 쓰러졌다.
주변 상황을 돌아보면 한참 싸우는 도중에 쓰러졌다.
그렇다면 혈천방도의 병기에 난자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구혼음소로 죽는 사람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을 격타한다. 검 수십 자루가 몸에 틀어박힌다. 호발귀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무엇을 할 수 있나.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나? 너무 급하다!
주르륵!
마음은 급한데 눈에서는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으면 안 돼!”
등여산은 눈물을 쏟아내면서 시신들을 지나쳐 갔다.
타앗!
눈앞에 누군가가 어른거렸다.
“죽엇!”
도천패는 다짜고짜 칼을 들어서 검은 그림자를 베어갔다. 순간,
“안 돼!”
당홍이 거세게 말했다. 아니, 그녀는 어찌나 급했는지 엉겁결에 도천패의 팔까지 후려쳤다.
퍼억!
당홍의 손이 정확하게 도천패를 가격했고, 도천패가 쳐낸 칼은 검은 그림자를 빗겨서 옆으로 뚝 떨어졌다.
물론 당홍이 팔을 쳐서 칼이 흘러내린 것은 아니다. 당홍은 도천패의 대력도강을 멈출 정도로 힘이 세지 않다. 진기 면에서도 훨씬 약하다.
‘안 돼!’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도천패는 있는 힘껏 팔을 바깥쪽으로 틀었다. 대력도강에는 전신 진기가 함축되어 있어서 중간에 멈출 수 없다. 계속 그어내면서 흘려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쒜에에엑!
대도가 아슬아슬하게 검은 인형을 스치며 지나갔다.
도천패는 칼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눈앞에 어른거린 검은 인형을 알아보았다.
“책사!”
“아! 보위! 언니!”
“호발귀와 같이 있지 않았어?”
“같이 있었는데, 전 진법에 갇혀서.”
순식간에 여러 말이 오고 갔다.
“호발귀! 호발귀는요? 호발귀 못 보셨어요?”
“못 봤어. 우리도. 방금 도착했어.”
새 사람은 말을 하면서 주위를 훑어봤다.
제일 처음에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할 광경이다.
‘이럴 수가! 어떻게?’
세 사람은 자신들이 혹시 잘못 보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눈을 끔뻑이기도 하고 비비기도 했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다시 훑어봤다.
노인이 죽어있다. 어린아이가 거의 몸이 두 동강 나다시피 갈려서 죽었다. 무공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은 아주 잔인한 칼을 썼다.
단순히 칼을 내리친 게 아니다. 일 검에 영혼까지 갈라버리겠다는 심산으로 검을 쳐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 사람들은 호발귀에게 당한 것 같다. 호발귀가 이 광경을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호발귀가 애꿎은 일반인들을 죽였다는 말인가?
“이럴 리가 없어!”
책사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뭔가 잘못됐을 거야. 이건 호발귀가 한 게 아니야.”
당홍도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입으로 한 말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호발귀가 한 거야! 왜 이런 짓을!
“잠깐만!”
등여산이 재빨리 시신들을 살피면서 움직였다.
도천패와 당홍은 등여산을 쫓아서 움직였다. 그녀가 무엇을 찾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작정 호발귀만 찾았다.
“찾았네. 여기! 여기서부터야.”
등여산이 말했다.
그녀가 말한 지점부터 무인과 일반인들의 죽음이 갈린다.
혈천방도들이 죽어있는 곳에 일반인은 섞여 있지 않다. 또 일반인이 죽어있는 곳에는 무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말한 지점부터 죽음이 확연히 갈린다.
“잠깐만!”
등여산이 무인들의 시신을 훑어 나갔다. 재빨리 사방을 휘돌면서 죽은 무인들을 뒤적거렸다.
“우리 지금 문주 놈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문주 놈이 보이지 않는데.”
도천패가 말했다.
“호발귀는 찾지 못해요. 이 싸움은 혈천방이 이겼어. 호발귀는 지금 혈천방 손에 있어요.”
등여산이 차분하게 말했다.
“뭐?”
“여기서 죽은 사람이 대략 사오백 명 정도 돼요. 전부 다 무인들이고, 처절하게 싸웠어요. 호발귀는 혈기가 일어났을 거고, 그때부터 혈천방은 무인 대신 일반인들을 투입했어요. 호발귀가 무인을 알아보지 못하니 일반인을 보내서 무인을 아낀 거예요.”
도천패와 당홍은 등여산의 말을 듣자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무인과 일반인의 죽음이 갈린 곳, 그곳에서 호발귀가 정신을 잃었다. 이성을 잃고 악귀가 되어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악귀처럼 검을 쓰는 모습은 쉽게 연상되었다.
“휴우!”
도천패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다가 사람들이 걸어가는 걸 봤어.”
당홍이 중간에서 만난 일반인들의 모습을 설명했다.
“따라오세요.”
쒜에에엑!
등여산이 신형을 날렸다.
등여산이 신형을 날린 곳은 일반인들이 마지막으로 죽어있는 지점이다.
“호발귀는 여기서 쓰러졌어요.”
등여산이 말했다.
“쓰러졌다…… 고? 그럼 호발귀 상태가……?”
도천패가 물었다.
당홍은 쓰러졌다는 말에 퍼뜩 구혼음소를 떠올렸다.
혈기가 치밀고, 실컷 싸우던 사람이 쓰러진다. 호발귀가 누군가에게 제압당하는 모습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니 쓰러졌다면 스스로 쓰러진 것이다.
역시 구혼음소다.
그런데 구혼음서를 일으켜서 쓰러진다는 것은……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소리다.
가사 상태에 빠졌거나, 아니면 완전히 죽었거나.
‘이거 굉장히 심각한데?’
당홍은 마른 침을 삼켰다.
등여산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생각할 것이다. 도천패만 함정에 빠져서 쓰러졌다고 생각한다.
등여산이 도천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호발귀, 구할 거죠?”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구해야지.”
“그럼 혈천방에 다시 잠입해야겠어요.”
“열 번 백번이라도 해야지. 따라와요. 내가 앞장설 테니까. 까짓거 가로막는 놈은 모두 베어버리지 뭐.”
“아뇨. 무턱대고 들어가는 건 도움이 안 돼요. 일단 혈천방을 아니까 차분히 가요.”
등여산이 눈빛을 반짝였다.
혈천방은 경계가 상당히 느슨하다. 원래는 매우 치밀했는데, 지금은 겨우 경계병을 세워놓는 정도다.
‘타격을 많이 받았어.’
이럴 줄 알았다. 숲에 거의 사오 백 명이 스러져 있다. 그만한 무인이 죽었다면 혈천방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경계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혈천방 같은 문파는 회복력이 대단히 빠르다. 아마도 한두 달이면 옛날처럼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주력 세력도 회복할 것이고.
혈천방에는 귀문이 있다.
원래는 귀무살을 충원하기 위해 만든 곳이지만 비상시에는 고급 무인을 제공받기도 한다.
“우리 어디로 가?”
당홍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등여산은 대답 대신 사방을 예리하게 쏘아보았다.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같다.
“호발귀가 잡혀갔다면 뇌옥에 있을 거잖아. 그럼 무인을 잡아서 족치는 게 빠르지 않아?”
“아뇨. 호발귀가 어떤 상태인지부터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무인을 잡아서……”
“저기로 가요.”
등여산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혈천방 무인 누구도 주시하지 않는 곳, 허름한 의원(醫院)이다. 혈천방 무인들은 이용하지 않고, 시녀나 하인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짐작된다.
“저기?”
당홍이 놀라서 되물었다.
“가요.”
쉬이이잇!
등여산은 이미 신형을 쏘아냈다.
호발귀가 쓰러졌다면 가사 상태일 것이다. 구혼음소를 펼쳐서 쓰러졌으니 틀림없이 가사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면 당황한 혈천방은 당장 의원부터 부른다.
호발귀 상태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의원이다.
물론 호발귀를 직접 치료한 의원이어야 한다. 호발귀를 보지도 못한 의원에게 호발귀 상태를 물어보는 짓은 아무리 우둔한 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혈천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상황이 다르다.
이런 곳은 의원이 몇 명 되지 않는다. 모든 의원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
덜컥! 덜컥! 덜컥!
의원은 약장을 마구 뒤지는 당홍을 보면서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뭐야? 이건 천남성이잖아? 이런 게 다 있네?”
당홍이 천남성 열매를 챙겨서 독주머니에 넣었다.
“하! 은방울꽃. 이것도 좋은 독이 되는데. 고마워서 어쩌지. 이런 거 가져가도 되나?”
말만 그럴 뿐, 은방울꽃은 이미 독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당홍은 약장을 뒤져서 독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약재를 챙기고 있다.
도천패가 의원 얼굴에 대도를 들이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호발귀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찔렀는데 죽지 않았다 이 말이지?”
“제가 치료한 게 아니라서.”
“네 말이 확실하냐는 거지!”
“확실! 확실합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거든요.”
“현재 의식불명 상태고?”
“그것도 얼핏 들은 말이라서. 호발귀를 치료한 의원에게 안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됐고. 아는 대로만 말해. 호발귀는 지금 어디 있어?”
도천패가 차갑게 물었다.
호발귀를 치료한 의원에게 안내한다? 매우 달콤하고 듣기 좋은 유혹이다. 하지만 그 말을 믿고 의원 놈을 따라가면 혈천방도를 만나게 된다.
의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뇌옥으로 끌려간 건 아는데, 어딘지는……”
등여산이 도천패의 칼을 살짝 밀었다.
의원에게 들을 말은 다 들었다.
의원들은 이 상황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의식불명을 두고 서로 의논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호발귀 상태를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호발귀는 살아있다. 그러면 됐다.
“언니 다 챙겼으면 가요.”
“어. 다 챙겼어. 이거 내가 가져가는데 불만 없지? 있으면 말해. 놓고 갈 테니까.”
당홍이 두둑해진 독주머니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네 네네. 가져가십쇼. 가져가셔도 됩니다.”
의원은 무조건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