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二章 상충(相沖) (4)
‘조금만 더!’
혈천방주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고 확신했다.
조금만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끝난다. 혈마가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후후후!”
혈천방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혈마를 통제하는 방법이 음문촌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혈천방에도 있다.
음문촌은 구혼음소, 귀색혼령대법을 사용한다.
혈천방에는 사혼진령음(死魂震靈音)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혈마가 음문촌에만 진결을 남겨주고 혈천방은 빈손으로 내보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혈마에게 음문촌은 혈마후의 본가다.
혈마가 생존했을 때, 음문촌 사람들은 바로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호위병 역할도 했고, 시종이나 하인 같은 역할도 충실히 했다. 다른 사람들이 혈마 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자신들이 혈마를 독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혈마는 곁에 충복을 두었다.
혈의검(血意劍) 소휘(召徽).
혈의검은 혈마의 뜻을 대신해서 검을 쓴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혈마의 뜻이 아니면 검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천살단 단주를 쓰러트리고도 혈마의 뜻이 죽이는 데 있지 않다면서 살검을 쓰지 않았다. 혈마가 제정신이었다면 죽이라고 했을 텐데도.
혈마가 숨을 쉬면 소휘도 숨을 쉰다.
혈마가 죽자, 소휘도 죽었다. 혈마가 자진하자, 소휘도 혈마 곁에서 자진했다.
혈천방 방주이자 그야말로 혈마의 충복이다.
혈마는 혈의검 소휘에게도 진결을 남겼다.
혈마후가 엉뚱한 생각을 할 것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정을 이기지 못해서 차마 죽이지 못할 경우를 염려했다. 그래서 예비로 혈의검에게 절대 진결을 남겼다.
절대 진결!
구혼음소를 진결이라 칭하고, 사혼진령음을 절대 진결이라고 지칭한다.
구혼음소는 혈마를 부드럽게 죽인다.
자기 죽음이 혈마후에게 고통이 되지 않게끔 편안한 죽음을 일으키게 만들어졌다.
혈마가 잠자듯 고요히 숨진다.
다만 이런 영향 때문인지 진결이 약하다, 열 번 중 한두 번은 이상증세를 일으킨다. 죽지 않고 단순히 혼절만 한다거나, 아니면 더 광분한다.
사혼진령음은 굉장한 고통을 수반한다,
일단 걸려들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발버둥 친다. 사지를 비비 꼬면서 비명을 쏟아낸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정도다.
하지만 확실하게 죽는다.
음문촌이 진결을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구혼음소가 다소 약한 진결이었기 때문에 변형시킬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혈천방에 전수된 사혼진령음은 변형이 안 된다.
어떤 식으로 변형시켜도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수없이 실험했고, 수많은 혈마가 죽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지하 뇌옥에 들어갔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자가 수만 명이다. 수만이 뭔가? 정말로 헤아리면 수십 만 명을 될 것이다.
혈마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조정할 수 없다.
혈마는 절대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진결이 있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정리할 수 있다. 검 한 번 쓰지 않고 죽인다.
혈마를 세상에 내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가짜 혈마는 천살단도 상대할 방법이 있다.
이백 년 전, 천살단은 진짜 혈마와 싸웠다. 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터득한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발전시켜도 혈마를 연구하는 것으로 안다.
가짜 혈마를 내보낼 경우, 천살단을 박살 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당장 전면전이 일어난다.
그때는 양쪽 모두 사활을 건 싸움이 된다.
혈천방은 아직 천살단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다. 물론 천살단 역시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러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노려보면서 치지 않는 것이다.
혈마만 조정할 수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데.
혈천방이나 음문촌에서 진짜 혈마만 만들어 냈다면 굳이 호발귀에게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솔직히 지난 이백 년 동안 누구도 혈마록을 해독해내지 못했다.
음문촌과 혈천방의 혈마는 이백 년 전 선인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혈마가 말하기를 이랬더니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
거기에 나날이 발전하는 무리(武理)를 가미시키면서 혈마를 만들어왔다.
혈마록을 해독하기는커녕 혈마록에 적힌 글자가 언제적 글자인지, 어느 나라에서 사용하던 글자인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진짜 혈마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호발귀는 진짜 혈마록을 수련한 진짜 혈마다.
이백 년 전에 존재했던 혈마의 모든 것이 호발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래서 호발귀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발귀에게 구혼음소를 읊는다? 사혼진령음을 쓴다? 이백 년 전의 혈마가 자신을 죽이라고 말한 진결인데, 그것을 대가 없이 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변형된 진결이 필요했다.
혈천방은 대략 백여 년 전부터 음문촌에서 구혼음소를 변형시켰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주시해왔다.
혈마가 알려준 구혼음소가 아니라 변형된 구혼음소다.
진결 내용은 똑같다.
혈천방도 음문촌도 진결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어떤 내용인지 풀이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조건 글자와 음률을 외우는 방식으로 전해졌다.
음문촌은 진결을 유지하되, 음률을 변형시켰다.
물론 이것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다. 해보고, 해보고, 또 해보고…… 음률 하나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적어도 천 명 이상이 죽었다.
살육을 역사를 거쳐온 것이다.
혈천방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진결이 너무 강해서 음률 변화가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진결만 들으면 멀쩡했던 혈마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래서 음문촌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하 뇌옥을 방문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겉으로는 진행이 어느 정도나 되었는지 물어보는 척했지만, 사실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지하 뇌옥을 아무 때나 찾아간 것이 아니다. 토초가 정사를 벌일 때만 찾아갔다. 지독한 독무 속에서 흘러나오는 구혼음소를 들으려고 간 것이다.
혈천방주는 두꺼운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음문촌장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미련한 놈들은 혈천방에 사혼진령음이 전해져온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변형점을 찾아냈다.
변형된 진결을 은밀히 만들어 낸 혈마에게 사용해 본 결과 예전처럼 피를 토하고 죽지는 않았다. 통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않았다.
호발귀를 잡을 때가 된 것이다.
호발귀를 잡아놓고, 철삭으로 사지를 묶어 놓고, 차분차분 연구하면 된다.
가짜 혈마는 동굴에 가둬놓고 만들었다. 사지를 묶어 놓고 혈기를 끌어냈다.
호발귀는 진짜 혈마이니 옛방식을 사용한다.
천명이든 이천 명이든 좋다. 계속 죽여라. 혈기를 있는 데까지 끌어낸 후 미쳐라. 넌 이백 년 전 혈마에 가장 근접한 놈이니, 이제 너 한 번 가지고 놀아보자.
혈마가 된 호발귀는 두렵지 않다.
혈마가 되기 전의 호발귀는 무공으로 제압해야 하지만, 혈마가 된 후에는 진결이 통한다.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지면 죽이면 된다.
“후후후! 계속 싸워라. 혈기를 끌어올려.”
혈천방주는 웃었다.
그런데…… 호발귀가 풀썩 쓰러졌다.
호발귀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가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혈마를 만들면서 이런 예는 없었다.
지금은 지하 뇌옥에 가둬놓고 혈마를 만들지만, 옛날…… 먼 옛날에는 옛 방식으로 혈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진행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놨다.
혈마가 싸우다가 쓰러진 적은 없었다.
혈기가 치솟는다는 것은 제방이 무너진 것과 같다.
물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둑이 터지니 고였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폭발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무공이나 정신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도천패처럼 힘이 센 자도 단숨에 휘말려 버린다.
혈마를 만드는 과정은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서 멈출 수 없다.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는다.
“저놈이 왜?”
혈천방주는 호발귀가 쓰러진 게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소귀!”
“네!”
“칠당을 투입해.”
“넷!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소귀가 대답했다.
소귀가 호발귀가 쓰러지는 모습을 봤다. 노인과 아녀자를 무참히 죽이더니 피식 쓰러졌다.
소귀도 이해가 안 되던 참이다.
“일단 저놈 상태를 살펴보고 싸우지 못할 것 같으면 공격하지 말라고 해.”
“네. 그런데 살아있으면…… 그래도 싸우지 말라고.”
“소귀, 넌 싸우지 못할 상태가 뭘 말하는지 몰라?”
“아닙니다!”
소귀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혈천방주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
호발귀가 땅에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죽은 듯이 널브려져 있다.
그때, 숲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숨을 죽인 채 숨어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어 호발귀를 쳐다봤다. 그중 몇 명은 손에 든 무기를 잡고 살짝 일어서기까지 했다. 무리라고 해봐야 몽둥이가 고작이지만.
그중 한 사람이 일어서서 살금살금 걸었다.
노인이다. 손에는 깨를 털 때 쓰는 도리깨를 들고 있다.
노인은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호발귀가 움직이면 즉시 도망칠 준비하고 살금살금 다가섰다.
노인이 호발귀를 네다섯 걸음 정도 남기고 멈춰 섰다.
슷! 툭!
노인은 도리깨를 들어서 호발귀를 툭 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나무 뒤로 숨었다.
호발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노인이 다시 기어 나와서 이번에는 조금 세게 도리깨를 쳤다.
쉿! 촤악!
깨를 털 때처럼 도리깨가 매우 힘차게 떨어졌다.
맨몸으로 맞았으면 상당히 아플 것이다. 한 대 맞자마자 정신이 퍼뜩 들어서 벌떡 일어나고도 남는다.
호발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탈! 탈이 났다!’
혈천방주는 눈을 부릅떴다.
굳이 칠당까지 투입할 필요가 없다. 이미 먹이로 내놓은 사람이 이상 유무를 확인해 주었다.
쉬이이익!
혈천방주는 즉시 신형을 쏘아냈다.
더 망설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호발귀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이런!”
혈천방주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야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심장에 꽂힌 검!
도대체 누가 호발귀 심장에 검을 꽂았나?
지금 호발귀가 죽이는 살마들 중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혹여 팔당 무인들과 싸울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무인들의 솜씨라고 믿겠다. 지금 주위에 있는 사람 중에는 검을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
혈천방주가 싸늘하게 물었다.
“저, 저 그게…… 스스로 죽었는데요.”
도리깨로 호발귀를 내리쳤던 노인이 말했다.
“스스로 죽었다고?”
“네. 갑자기 검을 반 토막 내더니 양쪽 허벅지에 하나씩 틀어박지 뭡니까. 그러다가 검을 뽑아서는 심장에. 저희도 깜짝 놀랐습죠.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노인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뒤늦게 소귀와 칠당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하지만 호발귀 곁에 혈천방주가 있는 모습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멀리서 포진만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혈천방주는 호발귀 목에 손을 대고 맥을 살폈다.
맥이 뛴다. 아직 죽지 않았다. 호발귀 같은 고수가 심장에 검을 박았는데, 숨이 붙어있다.
“호발귀를 옮겨라! 즉시!”
“네!”
소귀가 칠당 무인 두 명을 가리켰다.
그들이 재빨리 달려 나와 호발귀를 잡아 일으켰다.
“지금 즉시 의원에게 데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라고 해! 목숨 걸고 살리라고!”
“네!”
호발귀를 안아 일으킨 칠당 무인들이 함께 대답했다.
쉬이이잇!
그들이 나는 듯이 본당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