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二章 상충(相沖) (3)
“아이고! 나리! 저희가 어떻게 싸웁니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노인만 있는 게 아니다. 아녀자도 있다. 어린아이도 보인다.
도대체 어린아이를 전쟁터에 몰아넣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이건 말도 안 된다.
숲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손에는 빗자루, 방망이, 곡괭이 같은 일상용품을 들고 있지만, 무엇이라도 손에 쥐고 있을 뿐, 싸우고자 하는 투지는 전혀 읽히지 않는다.
혈천방에서 잡일을 하던 사람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등 떠밀려 숲으로 왔다.
소귀가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싸우라고 하지 않았다. 잘 숨기만 해.”
“아이고! 저희가 어떻게 숨습니까? 날고 기는 무인들도 펑펑 나가떨어지는데. 나리, 제발 목숨만 살려줍쇼. 지금까지 혈천방을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 않습니까.”
노인이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땅을 파고 숨어라.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도 살 수 있다.”
거짓말이다.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호발귀는 어디에 숨어 있던 다 찾아낸다.
실제로 땅을 파고 숨은 무인도 있었는데, 단칼에 베였다.
소귀가 말했다.
“절대 싸우지 말고 숨바꼭질만 해. 어디에 숨든 자유다. 저놈이 지나친 후에는 도주해도 좋다. 도망가는 것까지 모두 용납한다. 단, 너희를 지나친 후에 움직여라.”
“정말 도주해도 되나요?”
소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도주’라는 말에 희망을 얻었다. 그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는 팔당 무인들이 말해준다. 아니, 말해줄 수도 없다. 대부분 죽었으니까.
“충고 하나 하자면 숨을 쉬지 마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어. 그러면 살 가망성이 높아진다. 또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소리를 지르지 마. 절대적으로 숨기만 해.”
소귀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숨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잘 숨으면 너희 중 한두 명쯤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에서 끝난다. 그것도 매우 운이 좋으면.
소귀가 이번에 한 말은 진심이다.
이들이 살기를 바란다. 한두 명이라도 살아남기를 고대하면서 숲으로 보낸다.
이들이 어디로 숨든 호발귀 눈은 벗어나지 못한다. 팔당 무인들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들이 무슨 수로 도주할까. 그래도 어떡하나. 이런 거라도 가르쳐 줘야지.
“가라!”
소귀가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 * *
드디어 한계다.
‘아! 내가 또!’
호발귀는 정신을 수습했다.
정신을 똑바로 유지한다는 것이 또 깜빡 놓쳤다. 눈을 감은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눈을 뜰 때부터는 생각난다. 정신이 들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구나 하는 자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깜빡깜빡 정신을 놓고 있다.
‘이제는 힘들어.’
호발귀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정신이 있지만, 어느 순간에 놓칠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체, 의식이 없는 채 사람을 죽인다.
의식 없는 사람이 휘두르는 칼을 상대하지 못한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기를 찾고 소멸시키는 싸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미탕 호……’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살 수 있는 희망이 단 일 푼이라도 있다면 구혼음소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틀렸다. 혈천방이 마치 자신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는 양 거칠게 몰아붙인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도 이를 악물며 달려든다.
혈기가 치솟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지금이 호발귀를 제거할 기회라는 것을 안다. 혈천방 무인들은 죽음이 두려울 것이다. 뒤에서 혈천방주가 조정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살 수 있는 희망이 단 일 푼도 없다.
등여산이 와 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못한다. 달려올 수 있었으면 벌써 왔다.
도천패, 당홍…… 마찬가지다. 오지 못한다.
‘피틴 투 키루 하 기루차……’
구혼음소를 읊자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곧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번 나락은 예전의 나락과는 다르다. 미치광이가 되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이다.
“크크크크!”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호발귀가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잔인하고 괴팍한 웃음소리다. 정말로 자신이 이렇게 웃었는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틀림없이 자신이 흘린 소리다.
‘안 돼!’
혈기에 신경을 쓰는 순간, 정신이 분산되었다.
구혼음소가 잊히고 다시 혈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푸른 빛이 눈앞에 일렁거렸다.
‘안 돼!’
쒜에에에엑!
호발귀는 푸른 빛을 향해 달려갔다.
쒜에에엑! 퍼억!
검이 살을 파고들었다.
“으아악!”
누군가 비명을 토해낸 것 같다. 꿈속에서처럼 어렴풋이 비명이 들려왔다.
순간, 호발귀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또 정신을……’
비명은 꿈에서 들은 게 아니다. 현실에서 터졌다. 오히려 자신이 꿈속에 있었다.
스읏!
호발귀는 죽은 자의 몸에서 검을 빼냈다.
한데, 뭔가 이상하다. 검을 빼내면서 흘깃 쳐다보았는데, 무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호발귀는 눈을 끔뻑이면서 검에 베인 사람을 쳐다봤다.
노파!
자신의 검이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목을 파고 들어갔다. 빗장뼈를 가르고 가슴뼈까지 베어냈다.
할머니가 일그러진 얼굴로 쓰러진다.
주름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작은 동체가 땅에 쓰러져서 퍼득거린다.
“이게 무슨!”
호발귀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돌아봤다.
숲에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다. 하지만 예전에 봤던 사람들이 아니다. 전혀 생소한 사람들이다. 노인, 여자, 어린아이……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죽어 있다.
“이, 이, 이게……”
호발귀는 너무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들을 정말 자신이 죽였나? 이 사람들은 무인이 아니다. 무공을 모르는 양민이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호발귀는 비로소 혈마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이게 혈마가 앞으로 할 일이다. 상대방이 무인이든 양민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죽인다는 생각도 없이 죽인다.
혈천방, 음문촌이 이걸 바라고 있다.
“으으!”
호발귀는 거센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이제는 구혼음소도 믿을 수 없다. 구혼음소를 읊는 중에 정신이 분산되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어떻게 하나?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핫!”
호발귀는 고함을 터트리면서 들고 있던 검을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날 하나는 왼쪽 허벅지에, 반 토막 난 검은 오른쪽 허벅지에 박았다.
푹! 푹!
검이 허벅지에 꽂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검이 허벅지를 찔렀는데 통증이 없다.
충격이 너무 커서 아픔조차 잊었나?
호발귀는 검자루를 잡고 밑으로 쭉 그어 내렸다.
허벅지가 갈리면서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후후후!”
호발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는 아무 탈도 없다. 지극히 정상이다. 몸도 정신도 현재만큼은 깨끗하다.
하지만 분명히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호발귀는 왜 통증이 일어나지 않는지 원인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면 또 정신을 잃는다.
숨어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확실히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숲에 숨어 있는데 너무 엉성하다. 숨소리도 크게 들리고, 겁을 집어먹었는지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풀잎까지 들썩거린다.
혈마가 아니더라도 저들을 찾아서 죽이는 것은 장난 거리다.
호발귀는 혈천방주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만약 혈천방주가 눈앞에 있었다면 혈기를 참지 못하고 당장 푸른 빛, 생기를 꺼트려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팔당 무인들을 퍼부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무인이다. 언제든 검에 맞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또 죽일 준비도 했다. 죽이는 것과 죽는 것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다.
그들을 죽인 것은 과도하기는 했지만, 무인의 처사에 속한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정신을 잃으면 숨어서 벌벌 떠는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어린아이도 있고, 여인도 있는데 누구를 죽인다는 생각도 없으니 살수도 잔인할 것이다.
호발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일을 벌였다. 남 탓을 하지 못한다. 자신이 바로 인간이 아니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미탕 호 아 피우……”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소리 내 읊었다.
또 정신을 잃을까 봐 한 자, 한 자 뚜렷이 되새기면서 외워나갔다. 암송에 정신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제는 등여산이 와서 살려주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깨어나기 싫다. 이대로 죽고 싶다. 누구든 죽음을 방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츠으으읏!
호발귀는 몸속 깊은 곳에서 붉디붉은 혈기가 일어나는 것을 직감했다.
생기는 원래 푸른빛이다. 한데 얼마나 혈기에 짓눌렸으면 붉은빛으로 변했을까?
생기가 다시 탁기를 밀어내고 푸른 빛으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붉은빛을 지닌 채 목숨만 끊어가 줬으면 좋겠다. 몸도 정신도 같이 죽는 것이다.
“취저 처 타마 뭘롱 닌비라 가마러……”
구혼음소가 중반부를 넘어섰다.
다른 때 같으면 정신이 꿈속으로 떨어지는 듯 가물가물해진다. 그것이 정상이다.
호발귀는 아무 느낌도 받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지금은 혈기가 너무 강하다. 예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혈기에 접하고 있다. 이토록 강렬하고 자극적인 혈기는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스루파 나후 사라 럼 로럼 루미리……”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읊조리면서 피식 웃었다.
혈기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얼마나 하찮은 노력이었나.
죽으려고 한 적도 있다. 그것 역시 혈마 무공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저지른 무지다.
문득, 혈마 무공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거대한 굴레라는 생각이 든다.
자진하기 위해서 구혼음소를 읊조리고 있지만, 죽음이 찾아올 것 같지가 않다. 틀림없이 중간에 혈마 무공이 끼어들어서 방해할 것이다.
모든 노력이 허사다.
장진 스님과 나눴던 대화도 헛된 짓이다. 한때나마 혈마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 혈마는 혈마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자신은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희망도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몸속에 깃들어 있는 사악한 힘은 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방법은 확실하게 죽는 것이다.
“투나 산 타마 기루하 터미……”
구혼음소를 계속 외우면서 허벅지에 박힌 검을 끄집어냈다.
쒜에에엑! 쒜에엑!
숲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자, 저쪽에서 또 무인들을 내보냈다.
무인들을 치다가 정신을 잃으면 다시 빼낼 것이다. 그리고 양민을 앞세울 것이다.
혈천방주는 확실히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다.
“크크크!”
호발귀는 괴소를 터트렸다.
구혼음소가 다시 깨졌다. 그리고 전신이 붉은 혈기로 휘감겼다.
무인이 살기를 뿜어내면서 달려든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상대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자신 스스로 괴소를 듣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반 토막 난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푹! 찔렀다.
역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낯선 감각이 몸을 뚫고 들어섰다는 느낌만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꿈속에 빠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