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二章 상충(相沖) (1)
역시 예상대로 호발귀는 진밖에 없다. 그녀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호발귀가 그럴 사람인가?
호발귀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아아악! 아악! 크아악!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진다.
누군가가 죽는다. 문제는 비명이 끊이지 않고 계속 터진다는 점이다.
저런 비명이 터지려면 호발귀가 끊임없이 살수를 써야 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죽인다. 한 생명을 끊자마자 다른 사람을 또 죽인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전개되는 살수!
이런 싸움은 혈기를 극한으로 끌어낸다. 호발귀 자신도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구혼음소를 믿고 버티다가 끝내는 무너진다.
등여산은 호발귀의 앞길이 환히 보였다.
‘안 돼!’
그녀는 매우 조급했다.
지금 당장 호발귀를 싸움판에서 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성을 잃을 것이고,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발귀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비명이 들리는 곳까지 질주하지 못했다.
신형을 멈춰 세웠다. 진기를 돋구고 검을 잡았다. 예리한 눈으로 앞을 쏘아봤다.
한 사람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그는 품에 검을 품었다. 고개를 떨궈 땅을 쳐다보고 있는데, 싸늘한 검기가 물씬 풍겨온다.
귀검!
귀무살과 함께 사라졌던 귀검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귀검이 왜 나타났을까?
등여산이 귀검이 앞을 가로막은 진의를 알 수 없어서 즉각 검을 쳐내지 못했다.
그녀가 빠르게 물었다.
“왜 앞을 막는 거죠?”
“후후! 혈천방의 천살단을 막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묻나.”
‘억지까지.’
등여산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천살단에서 방출당했다는 사실은 전 무림이 알고 있다. 천살단에서도 본단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책사에 대한 모든 권한도 앗아갔다.
현재 그녀는 천살단과 어떠한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다.
귀검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천살단을 들먹거린다.
등여산을 막겠다는 심산이다.
“절 막을 셈이군요. 제가 계속 가겠다면 어디까지 막을 거예요?”
귀검이 자신의 검을 툭! 쳤다.
“죽여서라도 막겠다? 절대로 보내지 못하겠다는 뜻인데, 이유가 뭐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본방은 혈마를 추종한다.”
“알아요.”
“방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지금 혈마 탄생이 눈앞에 있다. 그러니 협조해야지.”
“혈마가 탄생하면 무림이 피바다로 변해요.”
“혈마가 탄생하지 않았을 때, 무림은 혈천방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혈마가 탄생하면 그 반대가 되는 것일 뿐. 천살단 입장에서는 피바다라는 말이 맞지만, 우리로서는 전세 역전이다. 우리 소망대로 되는 것이지.”
“귀검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원래 이런 사람? 어떤 사람?”
“혈천방이 중원 장악에 뜻이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중원을 장악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무공으로 장악한다는 게 귀검 입장 아니었나요?”
“혈마가 그런 쪽이다.”
“정신 잃은 꼭두각시가요?”
“혈마가 정신 잃은 꼭두각시라면 내 손으로 벤다. 그때가 되면 죽이기보다는 당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죽이는 데 일조하지. 하지만 난 혈마가 정신을 잃는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혈마는 최고의 마인이지 꼭두각시가 아냐.”
“당신은 혈마를 몰라요.”
“그럴지도.”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스읏!
등여산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귀검의 상대가 아니다. 귀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호발귀밖에 없다. 하지만 뚫고 나가야 한다. 귀검이 강하다고 해서 호발귀가 혈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설화팔극검이군.”
“맞아요.”
“검 끝이 차가워. 눈송이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싸우지 않을 거면 비키세요?”
“차가움 속에 부드러움. 설화팔극검을 절정으로 이끌었군. 이 정도 검공이면 태산파 장문인을 능가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귀검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생기격타!’
등여산은 생기격타를 떠올렸다.
호발귀는 혈천방으로 오는 동안 거의 매일 생기격타를 시전했다.
생기격타는 생기를 죽일 수 있다. 혈마에게 사용했던 방법인데, 줄 끊은 꼭두각시처럼 펑 나가떨어진다.
다른 효능도 있다.
생기격타는 진기를 북돋아 준다.
단순히 진기를 강하게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진기 증강법, 일회성 진기 증진법은 무림에도 많이 있다. 약물로도 가능하다.
생기격타는 단전을 넓힌다.
진기를 거둘 수 있는 그릇을 크게 만들어 준다. 당연히 더 많은 진기가 모인다. 또 진기를 정화한다. 나쁜 기운을 소멸시키고, 강건한 진기만 모이게 한다.
생기격타가 정도로 활용되면 진기가 급상승한다.
생기격타의 도움을 받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짧은 기간에 그녀를 비롯한 도천패, 홀리, 당홍이 모두 초상승 고수로 변모했다.
호발귀와 함께 있으면 하루가 다르게 무공이 발전한다.
스릉!
귀검도 검을 뽑았다.
등여산의 무공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직도 귀검에게는 어리게만 보인다.
귀검은 전임 살단주 오택골을 죽일 정도로 강하다.
오택골이 패배했다고 해서 강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오택골도 사람인 이상 질 수 있다. 그가 죽었다는 것, 반야호신공을 무너트렸다는 점이 놀라운 것이다.
“경고하지. 설화팔극검을 쓰면…… 죽어.”
귀검이 살의를 분명히 했다.
등여산은 좀처럼 검을 쓰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단박에 뚫고 지나가고 싶은데, 도저히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를 공격하든 당한다.’
귀검의 무공은 밖과 속이 다르다. 밖은 허점투성이인데 속은 꽉 차 있다. 밖에서는 검을 흘려보내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이 생명을 끊는다.
그렇다고 귀검이 먼저 공격해오지도 않는다.
귀검은 등여산을 죽일 생각이 없다. 다만 호발귀에게 다가가는 것만 막는다.
예전의 귀검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공격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 더욱이 검을 맞댄 상황까지 갔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공격하지 않는 것은 호발귀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귀검 나름대로 의리를 지키는 것이거나.
등여산은 귀검에게 막혀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 * *
육당도 무너진다.
팔당 중 여섯 개가 초토화되었다. 뒤로 물린 자들을 끌어모으면 당 하나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패배를 경험한 자들이라서 투지가 사라졌다.
“육당도……”
“안다.”
혈천방주는 소귀의 보고를 막았다.
자신이 직접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보고가 필요한가.
‘여전히 초식을 펼치고 있어.’
호발귀가 예상외로 질기게 버틴다.
벌써 인간적인 모습을 지우고 악마가 되었어야 한다. 인간 시절에 배웠던 초식 같은 것은 말끔히 잊고 오직 혈마의 본성에 따라서 검을 써야 한다.
호발귀는 아직도 초식을 구사한다.
완벽한 혈마로 들어서지 않고 인간 시절에 익힌 무공을 사용한다.
아직은 인간이다.
혈천방주는 절망을 느꼈다.
호발귀 상태가 이렇다면 칠 당을 투입해도 마찬가지가 된다. 순식간에 초토화될 뿐, 호발귀를 혈마로 이끌지 못한다. 혈마가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지 않나.
“팔당은 아직이냐?”
“네. 저쪽도 무공이 상당해서 결판 짓기가 쉽지 않다는 보고입니다.”
팔당은 도천패와 당홍을 죽이러 갔다.
그들 백 명이라면 끈 떨어진 두 명쯤은 간단히 요리할 줄 알았다. 한데 백 명이 두 명에게 발이 묶여 버렸다.
그나마 청죽진은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청죽진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는데, 목진을 불태웠다는 것은 암기 세례를 각오했다는 뜻이다.
등여산은 심하게 다쳤거나 죽었다.
그녀가 살았다면 벌써 현장에 도착했어야 한다. 아직도 모습을 비치지 않는 것은 탈이 났기 때문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다.
이제 호발귀만 혈마로 변하면 되는데…… 저 정도로 단시간에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혈기가 치솟아야 하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미쳐야 하는데.
“음!”
“방주님, 칠당을……”
“가만!”
혈천방주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호발귀의 무공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병기를 들고 무작정 휘두르는 것인지, 초식에 근거한 살법인지 구분해야 한다.
‘일단 해보자!’
혈천방주의 눈가에 기광이 번뜩였다.
호발귀의 무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본능적으로 검초를 펼치는 것 같다. 초식을 펼치고 있지만, 초식 자체가 본능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의식으로 집중시키셔 펼치는 검초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칠당을 투입할 필요가 없지.’
호발귀는 자신에게 죽는 사람이 무인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은 무조건 죽일 뿐이다.
이것은 혈마록의 경고와 일치한다.
호발귀가 살인할 때, 모습을 드러내면 위험하다고 했다. 누구든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 말, 무인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어.’
어린아이, 노인…… 무공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위험해진다.
호발귀는 일정 부분까지는 상대를 분간해냈다. 무인만 골라서 살법을 펼쳤다.
지금은 아니다. 무조건 죽인다.
“방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누구든 상관없어. 어린아이, 노인, 여자. 모두 모아서 투입해.”
“네? 방주님 그들은……”
소귀는 말을 잇다가 뚝 그쳤다.
혈천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혈천방도의 가족이다. 또는 혈천방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가뜩이나 마인 집단이라고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마당인데, 그런데도 기꺼이 와서 일해주었으니 고마운 사람들이다.
방주는 그들을 호발귀에게 던지려고 한다.
“어차피 여기는 끝났어. 귀무살이 떠났고, 팔당이 무너졌다.”
혈천방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칠당과 팔당이 남았다지만…… 아! 또 있지. 뒤로 빼낸 놈들. 그놈들을 쓸어모으면 백 명 정도 되나? 백 명은 넘겠군. 그러면 삼당 정도 건재한 셈인데.”
혈천방주의 음성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차가웠다.
“겨우 삼백 명. 그것으로는 본방이라고 할 수 없지. 이곳을 유지하지 못할 바에는 최대한 이용하는 거야. 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 것도 아니었잖아?”
“알겠습니다.”
소귀가 허리를 숙였다.
한 마디만 더하면 목에 칼이 날아올 것 같았다.
숲에서 팔당을 죽이는 호발귀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혈천방주도 정상은 아니었다.
팔당 대신 무공을 모르는 민간인을 투입한다.
‘휴우!’
소귀는 속으로 한숨을 뿜어냈다.
“일기천살(一機千殺) 혈마변용(血魔變容).”
혈천방주는 혈마록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천살이란 천 명을 죽인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숫자 일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숫자,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천 명일 수도 있고, 이천 명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만 명 넘게 죽여야 혈마변용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혈천방주는 그 숫자를 사오백 명 정도로 추산했다.
무공이 강한 자들이 악착같이 달려들면 사오백 명으로도 능히 만 명 분량을 채울 수 있다.
귀무살과 버금가는 고수를 팔백 명이나 키워놓고도 천살단을 공격하지 않고 대기시켜 놓은 이유가 바로 혈마에 있다. 그들은 혈마를 탄생시킬 재물이다.
혹자는 팔당 팔백 명이면 무림을 제패하기 충분하지 않냐고 말한다.
어림도 없다.
저들은 데리고 나가면 지금 숲에서 벌어지는 일과 흡사한 일이 벌어진다. 절정 고수 한 명에게 백 명, 이백 명이 죽어 나간다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감당하지 못한다.
팔당 팔백 명보다 혈마 한 명이 낫다. 확실하다.
‘팔당으로 안 된다면…… 어디…… 천 명을 줄 테니 해봐. 천 명으로도 안 되면 만 명을 줄 것이야. 후후!’
혈천방주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