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十一章 혈미훈천(血味熏天) (5)
“앗!”
등여산은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귀를 기울였다.
아아…… 어아…… 어……!
이상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청죽진이 바깥소리를 희석하고 있다.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지 않고 대나무 소리에 섞어서 전혀 다른 소리로 개조시킨다.
“이거 비명? 맞아. 비명이야.”
등여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청죽진 밖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누구와 누가 싸우겠나. 호발귀와 혈천방이다. 아니면 호발귀와 혈마일 것이다. 호발귀와 음문촌일 수도 있다.
호발귀가 싸우는 것만은 확실하다.
안 된다. 한두 명과 싸우는 것은 괜찮겠지만, 다수와 싸우면 혈기가 치솟는다.
싸우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걱정하지는 않는다. 호발귀는 이긴다. 다만 싸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두렵다. 최소한 호발귀가 죽는 것이고, 최악은 혈마가 되는 것이다.
“으음!”
등여산은 신음을 흘리면서 청죽진 안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청죽진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손가락 하나 거둘 수 없다. 아니, 호발귀가 죽는 모습도 보지 못한다.
마음이 개미굴처럼 번잡해졌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침착해야 한다. 흥분은 진을 파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하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일부러 큰 숨을 몰아쉬었다.
청죽진이 일으키는 변화는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암기가 날아오는 것은 진짜다. 하지만 위험이 느껴지는 부분, 위험 요소는 반반일 것 같다.
‘진법을 형성하는 기본 구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빠져나가지 못해. 결국은 진법에 휘말리다가 죽어. 어떤 식으로 진이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
등여산은 눈을 감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다시 돌이켜봤다.
청죽진에 들어오고, 귀가 막혔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나무를 건드렸는데…… 진형이 변했다. 대나무를 건드리는 순간, 환상이 일어났다.
‘환법(幻法)!’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대나무를 건드리자 암기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대나무에 연결된 줄은 보이지 않는다.
줄이 없이 암기가 발사될 수는 없다.
대나무 속을 파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최대한 이용해서 줄을 설치했다.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진형이다.
“이런 진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중원에 몇 명 되지 않아. 누가 있을까?”
그녀는 청죽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진법을 상당히 많이 아는 편인데도 매우 생소하다.
근래에 창안된 진법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매우 오래되어서 사장되어 버린 진법이다.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구술로도 전해지지 않았다.
오직 그런 진법만이 그녀의 눈을 가릴 수 있다.
등여산은 여러 부분을 생각하면서 청죽진에 접근했다.
아으으……!
커어어어……!
비명으로 추측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등여산은 머리를 세차게 휘둘러서 비명에 대한 감각을 떨어냈다.
조급한 마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 청죽진을 뚫고 나가야 한다.
자신이 청죽진에 걸려들었을 때, 호발귀가 진 밖에 있었다.
호발귀는 그녀가 진에 갇힌 것을 봤다. 그렇다면 당연히 진을 뚫고 들어왔어야 한다.
진이란 걸려들면 뚫고 나가기가 힘들지만, 밖에서 들어오기는 무척 쉽다.
밖에서부터 대나무를 베어내면 된다.
호발귀는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진에 갇히자마자 호발귀에게 일이 생겼거나 진에 갇힌 것을 몰랐다.
“아!”
퍼뜩! 도천패와 당홍이 생각났다.
두 사람이 음고를 쫓아서 사라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들을 일부러 떼어낸 것이다.
두 사람을 떼어내고, 자신은 청죽진에 가둬놓고…… 호발귀를 요리한다.
혈천방은 호발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호발귀를 건드렸다는 것은 혈기를 자극해서 혈마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음문촌에서 귀색혼령대법을 시행할 수 있을까?
토초가 귀색혼령대법을 펼치고, 성공하면 호발귀는 토초 노리개가 된다.
하지만 토초가 귀색혼령대법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호발귀가 구혼음소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리고 죽은 자를 깨웠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나? 깨운 여인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짓이겼다. 깨운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다행히도 호발귀는 그녀를 알아봤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본 모습을 찾았다.
토초가 귀색혼령대법을 전개한다면…… 죽는다.
그 부분은 안심한다.
오히려 토초라도 구혼음소로 목숨을 끊은 호발귀를 깨워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호발귀가 살았으면 한다.
문제는 아무도 모르는 제 삼의 방법이다.
혈천방주는 토초가 호발귀에게 무너지는 것을 봤다. 그런 것을 봤는데도 같은 방법을 계속 고집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전혀 다른 방법이 있으니 이번 일도 시작한 것일 거다.
‘홀리,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네가 막아줘. 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네.’
등여산은 또다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계속 잡념이 일어난다.
이것저것 생각한다고 청죽진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청죽진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청죽진을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진법부터 마공관에서 읽은 진법까지 모두 떠올렸다.
상생(相生) 목생화(木生火)!
자연에서 불을 얻으려면 나무 두 개를 가져다가 마찰시키면 된다. 나무 마찰에서 불을 얻는다.
나무는 불을 일으킨다.
불은 물건을 태운다. 나무를 태운다. 활활 불태우고 나면 새까만 재가 남는다.
재는 흙으로 돌아간다. 화생토(火生土)!
대나무가 있다. 땅이 있다. 중간에 불만 없다.
나무로 불을 일으키고, 불로 나무를 태우고 재만 남게 한다. 그러면 청죽진은 소멸한다.
매우 간단한 이치지만, 이 속에는 염라 사자를 서너 명쯤 만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숨겨져 있다.
대나무를 태우면 청죽진에 설치된 암기가 일제히 발동된다. 그리고 불이 일어난 진원지를 향해 격발되면서 주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나무로 만든 진에 갇히면 누구든 불을 떠올린다. 그래서 불을 놓는다. 그리고는 목진(木陣)의 예상대로 암기에 걸려서 고슴도치가 되어 죽는다.
등여산이 생각해 낸 방법은 청죽진을 탈출할 수 있는 비책이 아니라 죽음으로 뛰어드는 망책이다.
‘할 수 없어.’
등여산은 눈을 떴다.
처음 겪는 진을 생각만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부상을 참작하고 계속 부딪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렇게 해서 진을 파해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겠지만 가능성이 없다.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상황도 아니다.
스읏!
등여산은 앉은 자리에서 땅을 파헤쳐 내려갔다.
온갖 암기가 이곳을 향해 몰아칠 것이다. 작은 암기도 있고, 창같이 무거운 중병도 날아온다. 비석, 비황 등등 예상하지 못한 온갖 암기가 날아올 것이다.
사실, 그런 공격을 받고 살아날 자신이 없다.
스읏! 스으으읏!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땅을 파 내려갔다.
화르르르륵! 화르르륵!
청죽진에 불이 붙었다.
바싹 마른 대나무에 불을 댕기자 마치 기름에 불을 던진 듯 확! 번져나갔다.
등여산은 토굴 속에 몸을 틀어박고 숨을 가늘게 몰아쉬었다.
대나무 숲에 불이 붙으면서 공기를 빼앗아갔다.
불길은 공기를 먹고 타들어 간다. 불길이 심한 곳은 숨을 쉴만한 공기가 남아 있지 않다.
‘숨 막혀!’
등여산은 최대한 숨을 참았다.
이런 점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치지는 않았다.
귀식대법은 인체의 감각을 극도로 저하시킨다.
불의의 사고가 닥쳤을 때, 반응이 늦어진다. 창에 맞아도 벌떡 일어나지 못한다. 몸에 불길이 붙어도 일단 진기를 정상 상태로 돌려놓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
숨을 참는 수밖에 없다.
쒜에에엑! 쒜에에에에엑!
사방 천지에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온갖 암기가 발원지를 노리고 터진다.
‘이제 시작이야.’
등여산은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 두 팔로 감쌌다.
수직으로 굴을 파고, 다시 옆으로 팠다. 그리고 그 안에 몸을 숨겼다. 입구는 대나무를 잘라서 덮었다. 큰 병기는 막지 못해도 작은 암기는 막을 것이다.
퍼억! 퍽!
암기가 대나무를 뚫고 내려와 바닥에 꽂혔다.
‘수리검. 비석.’
등여산은 토굴에 꽂히는 암기들을 쳐다봤다.
문득, 청죽진을 설계하고 설치한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혈천방에 기관토목술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천살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귀문에 설치된 기관진식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귀문이든 뚫고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게 모두 한 사람 솜씨라면……’
누굴까? 그는 혈천방이 결코 좋은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왜 이런 집단을 위해서 천재적인 재능을 허비하는 것일까? 좋은 일에 쓸 수도 있을 텐데.
이만한 재능이면 밝은 세상에 나가도 당장 이름을 얻는다.
파앗! 퍽퍽!
암기가 계속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기어이 등여산의 몸을 뚫었다.
타앙! 퍽!
수리검 한 자루가 먼저 꽂힌 수리검에 부딪혔다. 그리고 불쑥 퉁겨 오른다 싶더니 팔뚝에 콱 틀어박혔다.
“음!”
등여산은 신음을 흘렸다.
이미 토굴 바닥은 온갖 암기로 빼곡하다. 이후에 날아든 암기들은 수리검처럼 퉁겨 오를지 모른다. 유시(流矢)에 맞아서 절명하는 사람처럼 운 나쁘게 당하는 것이다.
타앙! 퍼어억!
또 한 자루가 정강이를 찢었다.
지금은 상처가 비교적 가볍다. 하지만 곧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 터질 것이다.
쒜에에엑! 퍼억!
등여산의 눈앞에서 기름 단지가 터졌다.
좁은 토굴에 하얀 유액이 흐른다. 암기들을 반질반질 적시면서 주르륵 흘러내린다.
‘위험!’
등여산은 즉시 신형을 솟구쳤다. 순간,
퍽! 화르르르륵!
그녀가 머물러 있던 토굴은 작은 불구덩이가 되어서 활활 타올랐다.
퍽퍽! 퍽퍽퍽!
표창, 비석, 유엽도…… 종류를 헤아리기도 귀찮다. 상당히 많은 암기가 벌떼처럼 날아와 육신을 강타했다. 온몸이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때, 그녀는 검게 보이는 구덩이를 발견해냈다.
토굴을 파면서 위로 던진 흙이 암기를 맞고 움푹 꺼져있었다.
그녀는 구덩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여전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등을 바깥으로 향한 채 구덩이에 푹 웅크렸다.
화르르르륵!
불길이 꺼져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혈을 하면서 몸에 꽂힌 암기들을 하나씩 빼냈다.
최소한 십여 개 이상이 몸에 꽂혔다.
대부분 가볍게 꽂혔지만, 옆구리, 등, 어깨에 꽂힌 암기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박혔다.
“하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쏟아냈다.
목진에 불을 질러서 살아난 경우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망책, 죽지 못해서 안달한 것이다.
그녀가 살아난 것은 천운이다.
‘호발귀!’
그녀는 퍼뜩 호발귀를 떠올렸다.
아아아악!
크아아악!
진이 걷히자 비로소 비명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암기를 뽑자마자 지혈도 마무리하지 않고 신형을 쏘아냈다.
쉬이이익!
그녀가 신형을 날릴 때마다 몸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