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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203화 (203/500)

第四十一章 혈미훈천(血味熏天) (30)

“보고 드립니다.”

혈천방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악녀가 이제 겨우 한 곡을 탄주하는 중이다. ‘파부’라는 곡이 중간을 넘어섰다.

시간상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반향경이다.

향이 절반도 타지 않았는데…… 아무리 못해도 일향경은 넘겨야 하지 않나.

“말해라.”

혈천방주는 안으로 들어선 소귀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고, 듣고 싶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말이기도 했다.

“사당이……”

소귀도 보고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손실이 얼마나 되길래?”

“현재 육 할입니다,”

육 할이라는 소리는 명령을 받고 조처하기 위해서 나갔을 때는 팔 할 이상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오당 투입해.”

“네!”

소귀가 군 말 없이 대답했다.

파부가 중간을 넘어 마지막 부분을 향해 치닫는다. 아쟁을 타는 손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여인도 소귀가 하는 말을 들었을 터인데, 눈 막고 귀 막은 채 탄주에만 열중한다.

- 애아인사(哀我人斯), 역공지가(亦孔之嘉).

기파아부(既破我斧), 우결아구(又缺我銶).

우리 백성들 아끼는 마음, 매우 기쁘기 이를 데 없다.

내 도끼는 이미 부서졌고, 이까지 빠졌도다.

“그만.”

혈천방주가 손을 들어서 연주를 중지시켰다.

곧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러잖아도 조용한 대청이었는데 가는 연주 소리마저 그치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됐다. 오늘은 이만하지.”

“네.”

여인이 아쟁을 밀어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가녀린 손을 들어서 옷고름을 풀었다.

“오늘은 그것도 됐다.”

여인이 손을 멈칫거렸다. 하지만 방주의 뜻을 알고 곧 다시 고름을 동여맸다.

“그럼 소녀는 이만.”

여인이 아쟁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그때, 혈천방주가 생각난 듯 여인을 돌려세웠다.

“잠깐. 얼굴 좀 보자.”

여인이 몸을 돌려 혈천방주를 쳐다봤다.

“음! 그런 얼굴이었군. 예쁜 얼굴이야. 넌 이 길로 본방을 떠나거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 어디든 가서 두 번 다시 무림에 휩쓸리지 말고 편히 살아라.”

“방주님!”

여인이 혈천방주를 불렀지만, 방주는 이미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인이 잠시 혈천방주를 쳐다보다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방주의 뜻이 너무 확고해서 어떤 말로도 돌려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박! 사박!

악녀가 치맛자락을 끌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인에게는 평생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금을 줄 것이다,

한때는 혈천방주의 여인이었으니, 그 정도 대우는 받아야 한다.

‘내가 직접 봐야겠어!’

방주는 혈마록의 경고를 무시하고 싸움을 직접 보기로 작심했다.

자신이 혈마에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혈마를 잡으려는 사람인데, 잡힐 수야 있나.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여인을 떠나보내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결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혈마만큼은 잡을 생각이다,

스읏!

혈천방주는 검을 잡았다.

오늘은 검을 잡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혈마록의 충고를 무시하는 한이 있어도 혈마의 무공을 눈으로 봐야겠다.

쉬이이익!

혈천방주는 신형을 날렸다.

* * *

칼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한 사람이 쓰러졌다.

호발귀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농부가 해충을 집어내듯이, 양봉업자가 벌을 해치는 말벌을 잡아 죽이듯이 눈에 거슬리는 생명체를 말살시킨다,

그런데 해충을 잡아 죽인다는 것…… 이게 문제가 참 많다.

양봉업자는 기르는 벌들을 위해서 부지런히 말벌을 잡아 죽인다. 말벌 한 마리가 벌통 한 개를 망가트릴 수 있으니 눈에 불을 켜고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벌을 잡아 죽이는데 재미가 들려버린다. 날아다니는 놈을 잡았을 때의 손맛, 어떻게 죽일까 하는 고민이 짜릿한 쾌감을 불러온다.

말벌 잡는 재미가 있다.

잡은 말벌을 어떻게 죽일까 하는 파괴본능이 강렬한 쾌감을 일으킨다.

여기에 죄책감 같은 감정이 달라붙을 여지는 전혀 없다.

호발귀에게 혈천방 무인은 한낱 해충이다. 세상에서 소멸시켜야 할 흉물이다.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다.

나뭇잎은 초록빛이며, 땅은 회색 또는 갈색이다. 하늘은 푸르다. 밤에는 검다.

색깔은 계절이나 시기에 따라서 변하지만, 본연의 색깔을 띠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흔들리는 푸른 빛이 본연의 색깔을 흩트려놓는다.

어둠이 짙게 깔렸으니 세상이 온통 검은 빛으로 출렁거려야 하는데, 이상한 푸른 빛이 신경을 거슬린다.

호발귀는 푸른 빛을 꺼트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얼씬거리는 푸른 빛만 소멸시킨다.

생명을 빼앗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 죄책감인들 일어날 리 없다.

당연히 죽여야 할 것을 죽이는 것이고, 해악이 되는 것을 없애는 일이니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 생각. 그런 느낌으로 병기를 쓴다.

자연히 손에서 펼쳐지는 살수도 잔혹하다. 단숨에 푸른 빛을 꺼트려야 해서 거친 살수를 터트린다. 일격에 즉사하지 않으면 찜찜하다.

호발귀는 자신의 손속이 잔혹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을 가장 빨리 가장 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고 있으니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더 잔인하게 죽였을 것이다.

‘푸른 빛!’

그저 푸른 빛만 꺼뜨리면 된다.

쒜에에엑!

“커억!”

검이 머리를 가르면서 흘러내렸다. 피가 튀고 뼈가 갈라졌다.

굉장히 참혹한 죽음이다. 하지만 호발귀는 타인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무신경하다고 할까? 아니면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할까?

푸른 빛을 꺼뜨렸다는 것만 중요하지 어떤 식으로 죽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다.

퍼억!

호발귀는 죽은 자를 발로 걷어찼다.

* * *

혈천방주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삵이 노루를 잡는다. 재빠르고 날쌔고 난폭한 짐승이 약한 동물을 물어뜯는다.

삵이 와락 달려들어서 노루의 목을 물었다. 그리고 놓지 않는다. 노루가 발버둥 치지만 절대로 목줄을 놓지 않는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단단히 박고 죽을 때를 기다린다.

삵은 노루가 느끼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삵은 먹을 생각만 한다. 노루가 죽어야만 배를 채울 수 있으므로 빨리 죽기만을 고대한다.

어서 죽어라! 어서 죽어라!

호발귀를 보다 보면 문득 삵이 사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실질적으로 호발귀와 혈천방 문도들의 무공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진다. 그러니 삵과 노루가 아니라 호랑이와 토끼가 떠올랐어야 마땅하다.

호랑이가 와락 달려들어서 토끼를 잡는다.

매우 싱겁다. 당연히 잡을 만하고, 잡힐 만하다. 호랑이가 토끼를 노렸다면 놓치는 것이 더 신기하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대든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호발귀와 혈천방 무인들은 실제로 그만한 차이가 난다.

그런데 호랑이는 생각나지 않고 삵이 떠오른다. 쥐를 잡아먹는 삵이 아니라 제 덩치보다 열 배는 더 큰 노루를 물고 늘어지는 삵이 생각난다.

삵이 노루의 목덜미를 물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목뼈를 물고 늘어진다,

그만큼 호발귀가 잔인하다.

천화전을 나설 때 사당을 투입했다. 한데 어느새 오당이 투입되었고, 오당도 곧 무너진다.

‘이게 정말 맞나? 저놈, 혈마가 안 될 것 같은데.’

혈천방주는 회의가 치밀었다.

혈마록을 들춰보면 이런 식으로 혈마를 잡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발귀는 거침없이 살수를 쓰고 있다.

혈천방 무인들을 거침없이 죽인다. 전혀 미친 것 같지 않다. 손속이 매우 빠르고 정확하다.

이런 식으로 무인을 투입하는 데

는 한계가 있다.

‘팔당까지 팔백 명. 이거야 원.’

괜히 팔당만 죽고 끝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팔당이 이런 식으로 소진되면 혈천방은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팔당이 혈천방 전부는 아니다. 아직도 많은 힘이 비축되어 있다. 하지만 총 전력의 삼 할은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옛날처럼 다시 귀무살 체계로 돌아간다.

지금은 멀리 떠나보낸 귀검과 귀무살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원래는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귀무살 체계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써야 한다.

사실, 험한 일을 믿고 맡기기에는 귀무살만한 자들도 없다.

팔당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어야 했는데, 호발귀에게는 그야말로 종이호랑이나 마찬가지다.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귀무살에 전혀 손색이 없는데도.

팔당이 약한 게 아니다. 호발귀가 강하고 잔인한 것이다.

귀무살을 이 싸움에 투입했다 해도 팔당처럼 죽어 나갔을 게 틀림없다.

‘후후! 귀검, 약은 놈!’

귀검은 이런 싸움을 예상했을 것이다. 방주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니 호발귀를 순순히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는 쉽게 헤아린다.

그래서 미리 귀무살을 빼냈다.

‘내가 붙어도 저놈은 이기지 못한다. 지금 저놈은 하늘보다도 강해. 상대가 없어.’

팔당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데, 호발귀는 혈마가 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혈마가 되려면 더 잔인해져야 한다.

“후우!”

혈천방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당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퇴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로 육당이 들어섰다.

빠지는 자도 새로 투입된 자도 모두 겁먹은 표정이다.

혈천방도의 시신이 숲에 가득 쌓여 있다. 숲 곳곳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육신에서 잘린 팔다리가 멀리 퉁겨져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서 펄펄 날았던 동료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다.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작은 내를 이뤄서 졸졸졸 흘러간다.

이곳은 팔당 무인들이 잘 알던 숲이 아니다. 전혀 낯선 곳, 생지옥에 들어섰다.

이런 모습을 딱 한 사람이 만들어내고 있다.

“육당 투입합니다.”

소귀가 보고했다.

“쉬지 말고 몰아치라고 해.”

“저희가 몰아치지 않아도 호발귀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소귀가 무심결에 툭 말했다.

언뜻 들으면 혈천방주의 명령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투로 들리기도 한다.

혈천방주도 이번만큼은 무심히 흘려들었다.

“저,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봐야 할지?”

소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발귀는 지금 살인을 하고 있다. 호발귀가 살인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한다.”

“아! 그럼 호발귀가 손을 멈추게 되나요?”

“아니. 살인이 아니라 찢어 죽이게 되지. 지금은 병기를 써서 죽이지만, 곧 병기도 필요 없게 돼. 맹수처럼 마구잡이로 죽이는 거야. 아무 이유 없이.”

“음……”

소귀는 침음을 흘렸다.

호발귀는 지금도 악마다. 한데 지금보다 훨씬 더 지독한 악마가 된다는 말이지 않나. 지금은 사람 냄새라도 풍기지만 곧 인간의 틀을 벗어던진다는 말로 들린다.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혈마가 되는 전조증상이라도 있나요?”

“……”

혈천방주는 소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방주의 눈길은 호발귀를 쫓아서 살육 현장을 누볐다.

“소요귀명검법. 아직도 검법을 펼치는군. 음! 언제쯤에야 검법을 잃어버릴지.”

혈천방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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