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202화 (202/500)

第四十一章 혈미훈천(血味熏天) (2)

“음!”

혈천방주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이거야 원.’

집무실에서 보고만 받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싸움을 직접 보고 상황판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혈마록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다.

나가면 죽는다.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호발귀는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위험하지 않다. 진짜 위험은 호발귀가 혈마로 둔갑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 혈마액살료지상유활저적생명체(血魔扼殺了地上有活著的生命體).

- 수야불능거절혈마진력(誰也不能拒絕血魔眞力).

- 임하무인(任何武人), 임하병기(任何兵器), 재혈마전쌍수합십(在血魔前雙手合十), 등대사망(等待死亡).

혈마는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시킨다.

혈마의 힘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어떤 무인도, 어떤 병기도 혈마 앞에서는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죽음을 기다리는 순한 양이 된다.

혈마록의 경고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지금까지 호발귀가 지나온 발자국을 보면 혈마록의 예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경고대로 진행되고 있다.

혈마 탄생이 멀지 않았다.

혈마를 조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어쨌든 혈마는 탄생한다.

그래서 집무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보고만 받았다.

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나가지 않았다.

지금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죽는다.

호발귀 눈에 띈 자는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지금은 절제력을 가지고 검을 쓰지만, 곧 고삐 풀린 맹수가 되어서 날뛸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날뛰고 있는 것은 난폭한 것도 아니다. 진짜 난폭한 검은 곧 나온다. 미친개가 사람을 물어뜯는 정도는 어린애 장난 거리밖에 안 될 정도로 잔인해질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도 호발귀를 당해낼 적수는 없다.

혈천방주도 자신 없다.

호발귀는 괴물이다. 지금은 이 세상 어떤 자도 이기지 못한다. 왜? 호발귀는 혈마이니까.

“자! 연주 하나 더 듣지.”

혈천방주는 웃는 얼굴로 악녀(樂女)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어떤 연주를 들려드릴까요? 두보(杜甫)의 춘망(春望)을 들려드릴까요?”

“아니. 그건 너무 구슬퍼. 전쟁만 해도 슬픈데, 혈육에 대한 그리움까지 보태면 견딜 수 없지. 다른 거 없나?”

“이백(李白)의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는 어떠세요?”

“그것도 쓸쓸해.”

혈천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좀 다른 거 없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선곡이 마음에 안 들어?”

“죄송합니다.”

“좀 뭐 밝고 웅장하고. 그런 거 없어?”

“파부(破斧)는 어떠세요?”

“파부? 그걸로 해봐.”

혈천방주가 의자에 몸을 깊이 눕혔다.

째앵! 쟁쟁! 재애애앵!

아쟁이 울리기 시작했다.

반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병사들이 불렀던 노래가 아쟁으로 되살아났다.

‘으음!’

혈천방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때 같으면은 연주에 심취했을 것이다.

아쟁을 탄주하는 악녀의 부드러운 옥수를 봤을 것이며, 풍성한 가슴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곧 침상에서 펼쳐질 운우지락을 생각하며 들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솔직히 아쟁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재앵! 쟁쟁! 재애애앵!

귓가에 귀찮은 소음만 가득 번진다.

‘이게 맞아떨어져야지 되는데. 안 그러면 피해가 너무 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놓아주는 게 나았을지도…… 어쨌든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니.’

혈천방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피식 웃었다.

* * *

‘후웁!’

들이쉬는 숨도 내쉬는 숨도 최대한 억제한다. 숨을 쉬면 악마에게 발각될 것 같아서 숨조차 억제한다. 진정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스읏!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무인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났나?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피에 흠뻑 젖은 혈인이 뚫어지게 쳐다본다.

“으!”

무인은 너무도 섬뜩한 모습에 깜짝 놀라서 잠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 상대방이 혈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은 괴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단지 싸움을 싸움을 하다 보니 온몸이 피로 얼룩졌을 뿐이다.

“이이익!”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손 놓고 죽느니 최대한 발악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더 강했다.

무인은 즉시 검을 떨쳐냈다.

쒜에에엑!

철검이 정확히 혈마의 목을 노리고 내리쳐졌다.

한데 그가 내리친 검은 간단한 손가락 움직임에 퉁! 퉁겨졌다.

혈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전신 내력을 전부 쏟아내서 쳐낸 검이 너무도 쉽게 밀려났다.

순간, 혈마의 다섯 손가락이 쭉 펴졌다. 손가락 한 마디가 관수(貫手)로 변해서 가슴을 쳤다.

혈마는 병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관수가 심장을 곧장 꿰뚫었다.

쒜에엑! 퍼억!

손이 살을 찢고 들어온다.

창이나 검으로 찌른 것처럼 사정없이 살을 찢었다. 그리고 심장을 꿰뚫었다.

“아아아악!”

혈천방 무인은 비명을 처절하게 토해냈다.

호발귀는 무인이 들고 있건 검을 낚아챘다.

“큭큭큭!”

숲에 푸른 빛이 곳곳에서 일렁거린다. 빛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부터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쉐에에엑!

호발귀는 숲을 향해 빼앗은 검을 던졌다.

퍼억!

방금까지 파랗게 피어나던 빛이 뚝 꺼졌다.

생기가 소멸하였다.

“큭큭큭!”

호발귀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이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섰다. 자신이 어떤 살상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혈마 무공을 마음껏 펼칠 뿐이다. 주저함도 없고 거침도 없다.

구혼음소도 쓰지 않는다.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 혈마가 태어난 순간에 구혼음소를 떠올려야만 즉시 죽음에 이르는데,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혈마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이것은 그가 생각한 싸움이 아니다.

중간에 깜빡깜빡 정신이 돌아오기는 한다. 그때라도 구혼음소를 읊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부터 살피게 된다. 그러다 보면 기회를 놓친다.

혈천방 무인들은 끊임없이 다가선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죽고, 공격해도 죽으니 이왕이면 검이라도 써보고 죽으려고 한다.

저들을 상대하다 보면 구혼음소를 떠올릴 틈이 없어진다.

혈천방 무인들을 상대하는 것도 호발귀의 의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 푸른 빛이 일렁거리는 모습만 봐도 당장 불빛을 꺼트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치민다.

그 생각을 좇아가면 틀림없이 혈마 본색이 드러난다.

또 정신을 잃고 혈천방 무인들을 죽인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죽이기만 한다.

휘이이잉!

거대한 바람이 숲을 향해 휘몰아쳤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면 곧이어 비명도 터진다. 그리고 손에 묵직한 울림이 전해진다.

손에 도끼가 들려 있다.

이 도끼는 누구에게서 빼앗은 것인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손에 들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도끼가 들려 있고 한 사람을 내리찍는 중이다.

퍼억!

도끼로 머리를 쪼개자마자 곧바로 또 다른 푸른 빛을 향해 냅다 내던졌다.

꽈지지직!

도끼는 요란한 소리를 울리면서 혈천방 무인의 몸통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도끼를 맞은 자는 가슴뼈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멀리 나가떨어졌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호발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 즉시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했고, 죽음 너머에까지 다녀온 적도 있어서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정신이 어둠 속으로 똑 떨어지면 죽음이다.

죽기까지가 두려운 것이지 죽음이라는 요물은 너무 순식간에 다가오고 힘들지도 않다.

여기서 자신 스스로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혈마가 되면 호발귀는 죽고 엉뚱한 놈만 살아서 이 세상을 피바다로 만든다.

‘죽어야 한다!’

혈천방 무인들, 이만큼 죽였으면 됐다. 이제 죽자.

‘처러카 미이 개자오라 도미 조 소이나……’

구혼음소를 읊조리는 중에 이마 정중앙을 노리고 화살이 날아왔다.

“빌어먹을!”

호발귀는 쌍심지를 확 곤두세웠다.

왜 날 방해하는 거야! 왜 죽고자 하는데 죽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방금 화살을 날린 놈이 누구야! 어떤 미친놈이 화살을 날렸어! 너희 혈마가 누군지 몰라!

혈마가 되면 너희 다 죽어! 병신같은 새끼들아!

쒜에엑! 터억!

호발귀는 날아오는 화살을 잡았다. 그리고 왼쪽에서 출렁거리는 푸른 빛을 향해 표창 던지듯 내리꽂았다.

슈욱!

옆구리를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호발귀는 오른손 손등으로 검배를 쳐올렸다. 그리고 손목을 홱 돌려서 상대방의 손목을 낚아챘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 삼마돌각수가 정확하게 상대방의 검든 손을 움켜잡았다.

상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손목을 비틀어서 검의 방향을 바꾸려고도 했다.

하지만 검은 이미 호발귀의 손으로 옮겨졌다.

어느새 펼친 천변마라수가 검을 낚아채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상대를 향해 검초를 떨쳐내는 중이었다.

퍼어억!

검이 상대방이 배에서부터 가슴 위로 쭉 그으면서 올려 쳐졌다.

푸른 빛이 꺼졌다.

병신 새끼들! 너희도 덤빌 거잖아! 빨리 와! 빨리 와서 날 죽여보란 말이야!

“아아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내질렀다.

어떤 병기로 누구를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 모르겠다.

“큭큭큭! 큭큭큭!”

호발귀는 먹이를 찢어먹는 늑대처럼 헐떡거렸다. 숨소리, 눈빛, 행동…… 모든 것이 정상 범주를 넘어섰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달렸다.

“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안 돼! 구혼음서! 구혼음서를 놓치면 안 돼! 죽어야 해. 더는 못 버텨!’

이 순간, 호발귀는 명확하게 알았다.

혈마록을 수련한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혈마록에 기재된 사악한 힘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감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구혼음서? 어림도 없다.

사악한 힘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데, 구혼음서는 너무 길다. 구혼음서를 읊조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혈마가 되어서 날뛰고 있다. 구혼음서를 모두 읊조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예전에는 구혼음소를 읊조리면 정신이 똑 떨어졌다. 죽었다.

아직 혈마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혈기가 치밀었고, 자신 스스로 악마가 되어간다고 의식할 정도로 심성이 잔인해지는 것을 감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혈마는 아니었다.

그때는 혈마와 인간이, 혈마와 호발귀가 공존했다.

호발귀라는 인간이 사라지고 혈마만 남게 될 때, 구혼음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이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혈마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지금 호발귀가 겪고 있는 과정은 그 누구도 건너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이미 이백 년 전에 혈마가 한 번 지나간 길이지만, 그는 아무런 언질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아니다! 그는 분명히 언질을 남겼을 것이다. 정신이 깜빡깜빡 돌아올 때마다 무엇인가 한마디씩 흘려놨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음문촌으로 넘어가서 귀색혼령대법이 되었다.

또 다른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혈천방에 남아있다. 혈마가 죽은 지 이백 년이 되었지만, 혈천방이 아직도 혈마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혈천방도 혈마를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큭큭큭큭!”

호발귀는 또 괴소를 흘렸다.

호발귀는 사라지고 혈마가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