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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198화 (198/500)

第四十章 혈마(血魔) 시동(始動). (3)

호발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혈천방이 코앞에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주변이 적막했다.

등여산 외에 다른 생기는 읽히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남는 시간을 얻었다. 이번 기회에 차분히 생기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사실, 호발귀는 다른 모든 일을 제치고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혈천방을 벗어나는 것조차 뒤로 미루고 자신만의 시간을 얻고 싶었다.

등여산이 마련해 준 시간이 오히려 고맙다.

지하 동굴에서 홀리에게 생기격타를 할 때…… 생기가 오염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생기격타를 했지만, 혈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홀리가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혈기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다.

죽은 사람에게는 진기도, 생기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를 치료하면서 한 가지 더 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은 분명히 몸 밖으로 유출되었다. 비록 홀리의 살갗을 뚫지 못하고 다시 튕겨 나왔지만, 일단 몸 밖으로 유출되었다가 거둬졌다.

생기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타인의 몸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오염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 홀리를 살려야 한다는 심정에서 역천금령공을 있는 대로 끌어냈지만, 전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역천금령공을 일으켜서 혈기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홀리도 죽었고, 또 자신의 손과 홀리의 단전이 바짝 밀착된 상태이기도 했다.

역천금령공이 몸에서 몸으로 흘렀다.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오염되지 않았나?

사실이 그렇다면 역천금령공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혈마 무공이 혈기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혈기가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오염이 된다.

이 부분만 해결하면 역천금령공은 마공이 아니라 정공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이 된다. 혈마의 오명을 벗기고 천하제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혈마가 행한 일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혈마가 한 일은 그대로 남아있되, 혈마 무공이 뒤집어쓴 오명만은 벗겨낼 수 있지 않을까?

호발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심상(心象)과 마주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염주를 굴리면서 불호를 외웠다.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불경을 외우다가 마무리를 지으면 ‘아미타불!’하고 불호를 외운다.

“혈마에게 항상 불만이 많아. 왜 혈마록 따위를 남겨서 엉뚱한 사람을 고생시키는 거야.”

호발귀가 말했다.

“큭큭! 혈마가 혈마록을 남겼다고? 아미타불.”

호발귀는 장진 스님의 말에 고개를 돌려서 그를 쳐다봤다.

“내가 불경을 써서 후인에게 넘겨주면, 내가 불경을 남긴 건가?”

“혈마록을 혈마가 쓴 게 아니야?”

호발귀가 놀라서 물었다.

단 한 번도,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도 혈마록을 혈마 외에 다른 사람이 남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쪽에서 해가 뜬다. 맞지?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 맞지? 이런 건 아무도 써놓은 사람이 없어. 그런데 내가 글로 써놨다면, 내가 찾아낸 건가? 동쪽에서 해가 뜨는걸?”

“말장난할 기분 아냐.”

“많이 컸다. 스님, 스님 하면서 뭐라도 하나 배우려고 안달할 때가 엊그제였는데.”

“혈마록이 정종 무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때?”

“뭐가?”

“정종 무공이냐고.”

“하늘은 참 묘해. 오늘처럼 맑은 하늘만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잔뜩 찡그린 얼굴도 보여주거든. 태풍도 몰고 오고, 불볕더위도 보여주고. 그럴 때마다 사람이 상해. 도가 지나치게 보여주면 많은 사람이 죽어. 홍수, 가뭄, 기아, 질병. 그럼 하늘은 정도인가, 마도인가. 구분할 수 있겠어?”

“……”

호발귀는 대답하지 못했다.

“혈마 무공.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 그거 안 쓴다고 다 죽나?”

“쓰고 싶지 않아도 흘러나오고 있잖아.”

“궁지에 몰렸군.”

“괜찮아. 구혼음소가 있으니까. 난 조심할 게 없어. 혈기가 조심해야 해. 작게 일어나면 죽었다가 깨어나지만, 크게 일어나면 안 깨어나. 같이 죽어.”

“킥킥킥! 형체도 없는 혈기를 협박하는 거야?”

“아니, 스님을 협박하는 거지.”

“나를?”

“스님이 크게 화를 내면 죽음에서 안 깨어나는 수가 있어. 그러니 화 좀 조절하라고. 크게 일어나지 말고, 적당히 일어나.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서 깨어나 볼 테니까.”

“아미타불! 내가 괜히 기어 나와서는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 듣네. 그놈의 혈기 타령은 그만하고 오랜만에 혈마 팔공이나 구경하자. 눈요기 좀 하자고.”

장진 스님이 염주를 굴리면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호발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혈마록에 기재된 무공은 모두 아홉 개다.

혈마록 표지에 투골지가 찍혀 있다. 표지를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투골지를 심어서 음각했다.

혈마록 안에는 심공 세 개, 도법 두 개, 검법 두 개, 권법 하나가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심공 두 개는 몸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귀화미요공부터 무정삼절까지 여섯 개만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이령귀화도 손끝에 모았다.

탁!

귀화미요공이 터진다. 순간적으로 불빛이 번쩍! 빛나면서 눈앞에 캄캄해진다. 시력을 빼았는다.

마영심도 십칠 식, 혈천도법, 소요귀명검법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스읏! 쉬이이잇! 타악!

검이 허공을 휘젓는다.

쉬잇! 퍼억!

호발귀는 검을 나무에 깊이 꽂았다. 동시에 주먹 쥔 손으로 구뢰마권을 펼쳤다.

꾸르르르릉!

주먹을 휘두르는데 우렛소리가 울렸다.

“후우!”

호발귀는 무공을 모두 펼친 후, 깊은숨을 토해냈다.

혈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무공을 펼친 것이 아니다. 심상 속에서 상념으로 펼쳤다. 그러니 역천금령공을 마음껏 사용했지만 생기는 쓰이지 않았다.

짝! 짝! 짝!

장진 스님이 손뼉을 쳤다.

“좋네. 잘 배웠어. 어디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어. 너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사부도 없이 이걸 다 깨우치냐?”

“스님이 도와줬잖아.”

“그래도 인간 탈을 썼다고 은혜는 잊지 않는 거야?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건 왜 보자고 한 거야? 볼 거면 차라리 생기를 보는 게 낫지 않아? 생기격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는 게 훨씬 흥미로울 것 같은데.”

“네가 펼친 혈마 팔공 중에 혈마 무공은 딱 두 개야. 역천금령공과 혈천도법. 나머지는 다 주워온 거야. 알지?”

“신경 써야 할 일이야?”

“신경 써야지. 그것들을 괜히 주워온 줄 알아? 다 이유가 있어서 주워온 거야.”

호발귀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장진 스님이 말하는 이 부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실, 혈마 무공은 팔공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 요즘 들어서는 혈천도법 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귀화미요공도 생기를 알기 전에는 자주 사용했지만, 지금은 쓸 이유가 없다.

생기를 누르는 것이 시각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호발귀도 장진 스님이 보자고 해서 오랜만에 혈마 팔공 전부를 펼쳐봤다.

그런데 이 무공들이 모두 필요해서 모은 것이라고?

“칼을 쓰는 데 도법 두 개, 검법 두 개가 있을 필요가 있나? 혈천도법 하나면 되지.”

“그렇군.”

“심공은? 심공이 세 개나 있을 필요가 있어? 귀화미요공은 장난질을 치니까 그렇다고 치고, 역천금령공은 진공이니까 있어야 하고, 이령귀화는? 넌 지금 이령귀화를 마지 못해서 쓰고 있잖아. 역천금령공과 균형을 맞추느라고.”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무정삼절, 구뢰마권 같은 무공은 영 겉돌아. 일부로 쓰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 이게 어떻게 필요하다는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쓰는 사람이 찾아야지. 나는 필요해서 모았다는 사실만 말해주는 거야. 이건 역사적 진실이니까. 하하! 역사적?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조금 더 말해줄 수 없어?”

“말해줄 것이 없는데? 이건 개인적인 편차가 심한 거라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지금 한 말도 이해하기 힘든데 개인적인 편차까지? 정말 아무런 언질도 안 줄 거야?”

“언질이야 주지. 혈마는 혈기에 휘둘렸는데, 넌 벗어났어. 혈마에게는 구혼음소가 없었고, 넌 있고. 이건 굉장한 차이거든. 여기서부터 혈마와 넌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거야. 그러니 앞으로 벌어질 일은 나도 잘 몰라.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염주를 굴리면서 불호를 외웠다.

“혈마록 무공을 다시 한번 점검해 봐. 다시 살펴봐서 나쁜 건 없잖아? 아무래도 뭔가는 얻겠지.”

팟!

장진 스님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잘 사용해 보라고?’

장진 스님은 한 번도 무공을 잘 쓰라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장진 스님의 모든 입김은 생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혈마 무공을 이해시키고 지도하면서도 생기를 느끼고, 사용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오늘은 혈마 팔공 이야기만 했다.

속이 너무 커져서 겉이 부실하다는 말로 들린다.

내공은 강해졌는데, 강한 내공을 사용할 도구가 약하다는 뜻인 것 같다.

예전에 비해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사실, 무공은 지금도 충분하다. 생기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무적이다.

굳이 혈마 팔공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장진 스님이 나타난 것이다.

현재 자신은 참회동을 나섰을 때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그 강함은 생기격타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무공이 깊어지거나, 내공이 강해진 게 아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가장 크게 발전한 것은 생기격타다.

장진 스님은 너무 생기격타에 의존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령귀화가, 구뢰마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부분을 찾으라고 한다.

‘말할 거면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이건 어떻게 만났다 하면 더 답답해져.’

장진 스님을 만난 김에, 오랜만에 혈마록을 떠올렸다.

혈마록 여덟 권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연히 보게 된 혈마록이 이제는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다.

혈마록도 구혼음소와 같다.

사용하기는 하는데, 글자가 어떤 뜻을 함유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다 못해서 혈마록에 쓰인 글자가 어느 시대, 어떤 나라의 글자인지도 모른다.

무작정 외우고 사용한다.

글을 모르는 무식쟁이가 ‘포목점(布木店)’이라고 쓰인 글을 봤다. 사람들이 포목점이라도 읽어서 자신도 그렇게 읽는다. 포목점에서는 옷감을 판다.

“아! ‘布木店’ 깃발을 내건 곳은 옷감을 파는 곳이구나!”

호발귀가 딱 그와 같은 모양이다.

혈마 무공이 정공이냐 마공이냐 하는 물음에 장진 스님은 처처행(處處行)으로 답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착한 행동을 하면 선행이고, 나쁜 짓을 하면 악행이다. 선행과 악행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거지에게 돈을 주면 거지는 나를 선자로 볼 것이다. 그다음 거지에게 뜨거운 물을 쏟아부으면 천하에 다시 없는 악마로 본다.

두 거지가 만나면 한 명은 선자를 한 명은 악마를 말한다.

나는 선자인가, 악마인가.

질문 자체가 어리석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기에서 하나의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두 거지는 선자를 혹은 악마를 찾아간다. 다른 거지에게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다가 두 인물이 사실은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도 주고, 뜨거운 물도 끼얹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선행은 단박에 묻힌다. 악행만 돋보인다. 그 순간부터 선자는 사라지고 악마만 남는다. 돈을 준 것도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보기에 혈마 무공은 분명히 마공이다.

무림의 등식은 매우 간단하다. 이것저것 다 고려해주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그때다. 환청인 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함정이야!

등여산이 뭐라고 말한다. 얼핏 들었지만, 함정이 어떻고 하는 말로 들린다.

츠읏!

호발귀는 상념에서 빠르게 깨어났다.

조금 더 혈마록 속에 침잠해 있고 싶었는데, 느낌이 상당히 좋지 않다.

호발귀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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