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96화 (196/500)

第四十章 혈마(血魔) 시동(始動). (1)

“정말 이대로 둬도 될까?”

호발귀가 차마 동굴을 떠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내가, 연인이, 이미 살을 섞은 남편이 다른 여인을 걱정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질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등여산은 호발귀의 모습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 자신도 홀리가 걱정되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참이다.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어쩌면 홀리가 호발귀를 살릴 수 있는 생명줄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머뭇거리면 더 떠나기 힘들어져. 가.”

등여산이 모질게 호발귀의 등을 떠밀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호발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호발귀는 홀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 또 그녀가 자신 때문에 남은 것도 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알고 있다.

호발귀는 홀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부인이 있다. 부인을 잃고 싶지 않다. 홀리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자칫 홀리의 마음에 더 불을 지를까 봐 우려한다.

“나중에. 나중에 다 좋게 해결될 거야.”

등여산이 말했다.

“그럴까? 저렇게까지 하는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바보야, 어떻게 마음이 정리되니? 상처를 어떻게 안 받아? 후유! 남자들은 참……’

“가.”

등여산이 호발귀를 떠밀었다.

호발귀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땅을 디뎠다.

쿵!

땅이 크게 울린다.

지하에 있는 홀리에게 전하는 인사다.

우리 간다. 꼭 살아나와.

멀리 사람들이 보였다.

“용케 막고 있네? 힘들 줄 알았는데.”

호발귀가 말했다.

“언니가 상당히 약아. 힘으로는 막지 못했을 거야.”

“꾀?”

“꾀라고 해도 음문촌장이 당할 정도면 상당히 강한 수야. 훗!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은데?”

호발귀와 등여산은 산 밑으로 향했다.

당홍과 도천패가 음문촌 사람들을 견제하고 있다.

음문촌 사람들이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당홍이 쇠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쇠 구슬이 부딪치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저거네. 저거로 견제하고 있어.”

등여산이 한눈에 상황을 눈치챘다.

“그런데 언니, 연극이 서투르네.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면 가짜라는 게 티가 나잖아. 조급한 게 보여. 저 쇠 구슬이 뭔지 모르겠는데, 진짜라면 조급할 리 없지. 가짜니까 조급한 거야. 아예 쇠 구슬을 굴리지 말고 가만히 들고만 있는 게 더 나을 뻔했어.”

호발귀가 등여산을 쳐다봤다.

“왜?”

“아니. 감탄해서.”

“풋!”

등여산이 웃었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당홍이 그제야 큰 숨을 토해냈다.

“휴우! 간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수고했어요.”

“혈마는?”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당홍도 활짝 웃었다.

호발귀가 다가오자 음문촌장은 한 걸음 물러섰다.

호발귀와 촌장은 서로를 마주 봤다.

“싸울까?”

호발귀가 검을 잡았다.

“아니. 싸울 이유가 없지. 이미 볼 일 다 끝난 것 같은데 싸우면 뭐 해. 얻는 것도 없이 피만 보는 싸움은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혈마를 노예로 만든다더니?”

촌장이 주위를 돌아봤다.

다른 사람은 없다. 혈마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만들다가 귀찮아서 죽여버렸어. 굳이 혈마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니까 필요 없더라고. 귀찮기만 할 것 같아서, 목을 쳐버렸어.”

호발귀가 태연히 말했다.

“후후! 그래? 나는 또 귀색혼령대법 외에 다른 수단이 있나 하고 궁금했는데.”

음문촌장이 말을 하면서 길가로 비켜섰다. 호발귀에게 지나가라고 길을 열어준 것이다.

저벅! 저벅!

호발귀는 태연히 음문촌장 곁을 지나갔다.

음문촌장은 정말로 호발귀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기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발귀가 촌장 앞을 지나갈 때, 촌장이 말했다.

“이거 아나? 아직도 나한테는 기회가 있다는 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 하지만 내 검이 뽑히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아. 다음에 이 검이 뽑히면 팔을 자르거나 배를 찌르는 선에서 그치지 않아.”

“하하하! 남이 들으면 선심 쓴 줄 알겠는데?”

“믿을지 모르지만, 선심 쓴 거야.”

“하하하! 그렇다고 치지.”

“그리고 음문촌은 혈마 수족이라는 점, 명심해. 언젠가 너희들을 거두러 오지.”

호발귀가 차게 말했다.

순간, 촌장과 다섯 사내의 눈가에 살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병기를 뽑지는 않았다.

혈천방은 다섯 겹의 벽이 있다.

첫 번째 벽은 혈천방 전체를 휘감고 있다. 혈천방을 지키는 무인들을 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실질적인 벽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벽은 집과 집으로 연결되어 있다.

집들이 방사형으로 둥글게 지어져 있다. 집 자체가 하나의 벽인 셈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벽은 실질적인 담장이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면 큰 전각이 십여 채나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혈천방주가 머무는 거처, 천화전이 있다.

호발귀는 곧장 천화전 대청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래도 적진인데, 이렇게 내놓고 걸어가도 되나?”

도천패가 신경 쓰이는 듯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숨어서 가도 발각돼. 이게 속이 시원하고 빨라.”

“좌우지간 네 놈 배포는……”

도천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옴? 형이라고 불러주니까 문주한테 막 놈이라고 불러대네? 이러면 곤란하지, 보위.”

“시끄러워! 이놈아!”

도천패가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호발귀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농담하고 있다. 그런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닌데,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다.

도천패와 당홍은 혈천방을 돌아봤다. 그래서 혈천방의 힘을 어느 정도는 짐작한다.

중원 무림에는 귀무살만 알려졌지만, 귀무살만큼 강한 조직이 두 개나 더 있다.

팔당과 후옥!

이대로 걸어가면 그들과 싸우는 것이 필연이다. 또한, 어느 쪽도 물러서지 못한다. 혈천방은 제집을 지켜야 하고, 호발귀는 사부를 찾아야 한다.

귀무살은 귀검과 약속했으니 호발귀만 준비하면 된다.

사부는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오직 혈천방주만 안다. 그래서 기필코 혈천방주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한다. 방주가 말을 하지 않으면 전쟁이 벌어진다.

호발귀는 전쟁할 생각이다.

혈천방을 싹 쓸어버릴 요량으로 걷는다.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당장은 호발귀가 유리할 것이다. 혈마 무공을 사용하면 거의 무적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혈기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호발귀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도천패나 등여산을 죽이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호발귀는 태연하기만 하다.

“책사, 우리 뭐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아?”

“계획요?”

“그래. 계획. 이렇게 간다고 해서 혈천방주가 순순히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혈천방주는 말해줄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직접 만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끄응!”

도천패가 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호발귀는 혈천방에 들어서지 못했다.

세 번째 벽까지는 들어섰는데, 네 번째 벽으로 향하는 도중 길이 막혔다.

수많은 사람들, 족히 삼사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호발귀를 향해서 다가왔다.

그들은 각기 농기구를 들었다.

낫, 호미, 삽…… 그나마 도리깨는 제법 병기에 가깝다.

도끼를 든 자도 있지만, 장작 패는 도끼라서 휘두르는 데 제한이 많다.

“저 사람들 뭐야?”

당홍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한눈에 봐도 무인이 아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다. 호발귀를 향해 걸어오기는 하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다.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면 피해야지, 왜 다가오나.

“위식전(餵食戰)이에요.”

등여산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서 말했다.

“위식전? 그게 뭔데? 뭘 먹는데, 위식전이야?”

당홍이 재빨리 물었다.

“저 사람들, 우리에게 주는 먹이에요. 그래서 위식전인 거죠. 우리 보고 죽이라는 거예요.”

등여산의 말에 모두 서로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똥 같은 소린가. 멀쩡한 사람을 죽이라고 보내다니.

“위식전은 아주 강한 상대에게 아주 약한 자를 들이미는 거예요. 가장 약한 자, 그것도 무공을 모르는 사람. 저 사람들은 혈천방에 있기는 하지만 무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대부분 일반 양민이에요.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보낸 거예요.”

“정말로 죽으라고 보냈다는 거야?”

“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은 소린지. 죽겠다면 죽이면 되지. 저것들, 나 혼자서도 쓸어버릴 수 있어.”

도천패가 칼을 뽑았다.

“맞아요. 그런데, 정말 죽일 수 있어요?”

등여산이 도천패를 쳐다봤다.

“죽일 수 있냐니? 내가 저까짓 것들을 죽이지…… 아!”

도천패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손을 들어서 자신의 이마를 탁 때렸다.

그렇다. 힘으로는 죽일 수 있다.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죽여봐라’하고 내몰면 말이 달라진다. 칼을 뽑을 수 없게 된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 저들을 벨 수 없다.

저들을 베는 순간 도천패의 칼은 혈도(血刀)가 된다. 살도, 마도, 악도가 된다.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도 사악한 칼이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없다.

무도(武道)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저들을 베지 못한다.

무공수련이 단순히 사람 죽이는 기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저들을 벤다. 사악한 자나 마음이 살기로 얼어붙은 자들 앞에 내밀면 당장 도륙된다.

위식전을 사람을 구분해서 구사하는 전술이다.

혈천방주는 호발귀가 양민들을 베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 판단이 옳은가?

“어떻게 할 거야?”

등여산이 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생각할 게 있어. 일단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해. 우리가 나가자마자 진식이 펼쳐질 거야. 지금처럼 쉽게 들어오지 못해.”

“저 사람들을 피하면 안 돼? 신법으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당홍이 말했다.

“위식전은 동원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최소한 일이천 명 정도는 밀어 넣어야 효과가 나와요. 혈천방 어딜 가든 저런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뭐야? 그럼 저 사람들만 베어도 안 된다는 거잖아? 일이천 명? 방주, 이놈의 새끼가 돌았나!”

앞에 있는 사람들만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아니면 물러나야 한다. 또 물러나면 혈천방주가 초빙하지 않는 한,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싸우면 안 되나? 혈천방에 팔당도 있고, 후옥도 있는데. 치사하게 왜 이런 수를 쓰지?”

도천패가 입맛을 다셨다.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뭐해? 가자고. 이건 이미 결정 났잖아? 어차피 베지도 못하는데 머뭇거리면 뭐 해.”

호발귀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번에 피하면…… 이건 아주 큰 약점이 돼. 혈천방주는 위식전을 또 써먹을 거야.”

등여산이 호발귀 옆에 바싹 붙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무림이 언제부터 이렇게 더러워졌지? 그리고 등매, 이건 등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잖아. 이번에는 당했다고 치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매가 생각해야지. 왜 나보고 생각하래?”

“뭐어?”

등여산이 호발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하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니까 귀엽잖아.”

호발귀가 등여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등여산을 살며시 잡아끌면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