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九章 첩심인(貼心人 : 허물없는 친구, 애인) (5)
호발귀가 벽으로 걸어갔다.
앞에는 흙벽이 가로막고 있다. 동굴이나 뇌옥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흐음!”
호발귀가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왜?”
“안 보여.”
“생기가?”
“아까는 보였었는데, 내가 잘못 봤나?”
호발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발귀가 보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귀안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사람 몸에서 빛이 나오는 모습을 느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알맞다. 원정에 관해서 설명을 들은 사람도 이해하기 어렵다.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차이다.
“다시 잘 봐봐.”
호발귀는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안 보여. 잘못 봤나 봐. 하긴 여기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있었다면 벌써 등매에게 발각되었을 거 아냐.”
“그 말 칭찬 아냐.”
“어? 난 칭찬인데?”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칭찬으로 들을 수 있는데, 네가 말하면 약 올리는 거밖에 안 돼.”
“나는 그런 뜻이……”
“호호호! 다시 한번 잘 살펴봐. 네가 잘못 봤을 리 없어.”
이 순간, 등여산은 다른 생각을 했다.
호발귀는 확실히 생기를 봤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었다. 그러니 생기가 끊긴 것이다. 이것 외에는 호발귀가 찾지 못할 리 없다.
그런데 주변에는 시신이 없다.
이곳에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방금 사람이 죽었다.
호발귀가 주위를 샅샅이 훑어대는 동안, 등여산은 손으로 흙벽을 더듬었다.
흙벽은 흙벽일 뿐이다. 아무 이상이 없다.
문득, 등여산의 눈에 병기대가 들어왔다.
무인이 있는 곳에 병기대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곳에 병기대가 있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 음문촌 사람 중에 병기를 병기대에 놓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기관이네.’
등여산은 병기대를 슬쩍 밀어봤다.
드르륵! 쿵쿵! 드르르륵!
병기대가 옆으로 밀려나며, 광장 바닥에 작은 구멍이 뻥 뚫렸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밀실이 드러났다.
호발귀와 등여산은 서로를 쳐다봤다.
“사람이 있어?”
등여산이 물었다.
“아니. 텅 비었어.”
호발귀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뭐 하는 곳인지 보기나 하자. 동굴에 또 밀실까지 마련한 게 영 이상해.”
등여산이 벽에서 횃불을 집어 불을 밝혔다.
두 사람은 흙을 깎아서 만든 계단을 밟으면서 천천히 지하 밀실로 내려갔다.
“엇!”
등여산은 지하 밀실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여인을 찾아냈다.
여인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 더러운 가마니 위에 짐승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투성이다.
‘방금 죽은 여자가 이 여자야.’
등여산은 여인에게 다가가서 산발한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올렸다. 그리고 횃불로 얼굴을 비춰봤다. 순간,
“앗! 홀리!”
등여산이 횃불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홀리를 와락 안아 일으켰다.
“홀리! 홀리!”
등여산이 홀리의 뺨을 마구 때렸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꽤 울렸는데도 홀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등여산은 급히 홀리의 목동맥에 손을 대봤다.
동맥이 뛰지 않는다. 이미 피부가 차갑게 식어간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등여산은 망연히 호발귀를 쳐다봤다.
등여산이 홀리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호발귀는 호릴 곁에 와있었다. 그리고 홀리를 살폈다.
호발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홀리에게서 생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완전히 빠져나갔다. 마지막 큰 숨이 쉬어졌다.
홀리는 죽었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해봐.”
“……”
호발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홀리만 쳐다봤다.
홀리는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 도움만 잔뜩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떠났다.
“자!”
등여산이 홀리를 호발귀에게 내밀었다.
“살려봐. 너도 독의에게서 독술을 물려받았잖아. 그걸로 어떻게 해보던가, 생기격타라도 해봐.”
물론 등여산도 답답해서 한 말이다.
독섬칠공이나 생기격타는 산 사람에게나 통한다. 죽은 사람은 격타 자체가 안 된다.
그래도 해볼 생각이다. 등여산이 말하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독술과 생기격타밖에 없다.
‘독은 소용없어. 생기격타도 통하지 않아. 하지만 해봐야지.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호발귀는 홀리를 받아서 안았다.
홀리의 단전에 손을 얹고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츠으으읏!
진기가 일어났다.
역천금령공은 순수 단전 진기다. 다만 단전 진기를 일으키면 원정이 따라온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은 원정이 보존되는데, 호발귀만 같이 움직인다.
‘곧장 원정을 친다!’
이런 방식은 혈마를 상대할 때나 사용했던, 지극히 위험한 공격 방법이다.
생기로 원정을 치면 원정이 파괴된다.
혈기가 파괴되고, 생기가 밀려 나간다. 산산이 흩어진다. 그리고 쉽게 회복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홀리 상태는 매우 위급하다.
방금 숨이 끊어졌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는 것이지, 죽은 지 일다경만 넘었어도 공격 자체가 안 된다.
스으으읏! 터엉!
생기가 원정을 쳤다.
생각한 그대로다. 생기가 딱딱한 나무토막을 친 듯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튕겨 나왔다.
스읏! 투웅! 스으으읏! 투웅!
호발귀는 연속해서 생기격타를 일으켰다.
홀리의 단전이 뒤흔들렸다. 생기가 관통하면서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순간, 호발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혹시……?’
호발귀는 즉시 역천금령공으로 일어난 진기를 독섬칠공의 운행 경로로 보냈다.
독섬칠공 전물기(傳物氣)를 정반대로 펼치면 독을 흡수하는 흡물기(吸物氣)가 된다.
츠으으읏!
진기가 흡물기가 홀리의 단전에 달라붙었다.
홀리의 진기를 흡수한다. 딱딱한 나무토막에서 수분을 쥐어짜 내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다. 그런데,
츄우우우웃!
흡물기를 따라서 한 줄기 기류가 빨려들어 왔다.
“커억! 컥컥! 커어억!”
홀리가 격한 기침을 쏟아내면서 큰 숨을 들이켰다. 들이쉬고, 쏟아내고, 들이쉬고…… 배 속에 있는 오물을 토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연신 큰 숨을 쏟아냈다.
홀리는 상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홀리는 우습게도 일자가 퍼트린 귀색무에 당했다.
홀리는 사지가 묶여서 갇혀 있었다. 피독단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온전히 귀색무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홀리는 한 가지를 더 보탰다.
단지 귀색무만 들이켰다면 혼절은 했을망정,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귀색무는 혈마에게만 작용한다. 그런데 왜 홀리에게 작용했을까?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홀리는 아무도 없는 밀실에 갇혔다.
온종일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다. 육신은 흠씬 두들겨 맞아서 성한 구석이 없다.
외롭고 쓸쓸하다.
홀리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최근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호발귀와 함께 움직였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구혼음소를 알려준 일도 행복했던 일 중에 하나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구혼음소를 읊었다. 노래 부르듯이 알지 못할 말들을 토해냈다.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처럼 좋은 방법도 없다.
이때, 귀색무가 흘러들었다. 귀색무 독기와 구혼음소가 결합하면서 홀리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홀리는 일시적으로 호발귀와 똑같은 상태에 떨어졌다.
완벽한 죽음!
홀리가 눈을 뜨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홀리는 눈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지 한참 동안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손을 꼭 잡고 있는 등여산을 찾아냈다.
“네가 어떻게 여길?”
홀리의 음성에는 기운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 있어? 지금 몸은 어때?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등여산이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그때, 홀리가 눈을 돌려 호발귀를 쳐다봤다. 이제야 호발귀를 봤다.
홀리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두 눈이 안도로 가득 찼다.
“멀쩡하네?”
“나가자.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등여산이 홀리를 안아서 일으켰다. 그런데 홀리가 일어서지 않으려고 버텼다.
“안 돼. 나 여기 놔둬. 난 여기 있어야 해.”
“왜!”
등여산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 냄새가 달라. 이제 여자 된 거야?”
등여산이 일시 대답하지 못했다.
“계집애. 내가 그토록 먼저 가지려고 했는데. 축하해.”
“그런 말은 나가서 해. 네가 나가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끌고 나갈 거야.”
등여산은 정말로 홀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때 홀리가 등여산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구혼음소 유래, 알아야 하잖아.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호발귀, 음고도 통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쨌든 멀쩡하니 됐고. 발작을 그대로지? 구혼음소 유래, 아버지가 알고 있어. 내가 알아내서 말해줄게. 그거 아니면 희망이 없어.”
“홀리, 너!”
“계집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감격하지 말고. 사실 내가 옆에 있으면 너희 입맞춤하는 것조차 눈치 봐야 하잖아. 나도 그런 꼴 보기 싫어.”
홀리가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등여산은 홀리를 쳐다봤다. 한참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녀 역시 홀리의 귀에 입을 바싹 붙이고 나직이 속삭였다.
“음문촌 사람들, 나족(那族) 맞지? 나족은 일부다처제야. 넌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하잖아. 익숙하지 않은 건 나야. 살아나와. 살아나오면 호발귀 나족 만들어 줄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나, 너니깐. 괜찮아.”
등여산이 속삭임을 마치고 홀리를 쳐다봤다.
중원에서 일부다처는 흔한 일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걸인이 구걸하는데 처와 첩이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흔하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평생 일부일처로 지낸 사람도 많다.
나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내는 무조건 처첩을 많이 거느려야 한다. 부족 자체가 워낙 씨가 귀해서 자식이 잘생기지 않기 때문에 만든 고육지책이다.
촌장도 부인 일곱 명을 얻어서 자녀 일곱 명을 낳았다. 한 사람이 한 명밖에 낳지 못했다.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홀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약해빠져서는.”
“이게 원래 음문촌 방식이야. 혼날 건 다 혼났고 아버지가 오면…… 끄응! 음문촌 사람이 돼야지. 어쩌면 너와 검을 맞댈지도 몰라. 그럴 바에는 지금 벨래?”
홀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호발귀는 묵묵히 홀리 앞에 앉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큰 빚졌네.”
“그런 말 가장 듣기 싫은데. 어쩐지 다정하게 군다 했어.”
“또 만날지 몰라서. 난 네 친구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
“연락하면 달려와 줄 거야?”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반드시.”
“힘든 부탁일지도 모르는데?”
“넌 내게 생명을 줬어.”
“그 말도 듣기 싫다. 난 정도 듬뿍 줬는데, 그건 안 보이지?”
“……”
“호호호! 걱정하지 마. 됐어. 악착같이 살아나가서 널 볼 거야. 됐지? 이제 가.”
호발귀가 홀리의 전에 손을 댔다.
“안 돼! 지금 또 역천금령공을 쓰면 혈기가……”
“거부하면 생명이 위험해. 살아나야지. 그러니 거부하면 안 돼.”
타악!
생기격타가 이루어졌다.
푸른 빛이 일렁거리자, 그녀의 몸에서 탁한 기분이 일시에 터져나갔다.
홀리는 맑고 청량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사흘을 굶었다. 하지만 활력이 넘친다.
생기격타는 어떤 보약보다도 뛰어나다.
“꼭 살아!”
호발귀는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연속해서 생기격타를 일으켰다.
홀리는 회복시켜주고, 전신에서 탁한 기운을 몰아내 준다.
등여산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호발귀는 매우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러면 또다시 혈기가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구혼음소를 일으켜야 하고, 또 잠시 목숨이 끊어진다.
죽어야 한다.
조금 전에 귀색무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했는데, 또 그 상태로 빠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홀리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회복시켜야 한다.
홀리가 사르르 눈을 감았다.
“나 졸려. 이제 잘래.”
생기가 너무 충만해지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전신에서 혼탁한 기운이 밀려 나가면 일시 나른한 상태가 찾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 수면하게 된다.
호발귀는 얼굴을 홀리의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꼭 살아. 알았지!”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나갈게.”
홀리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