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91화 (191/500)

第三十九章 첩심인(貼心人 : 허물없는 친구, 애인) (1)

날이 밝아온다. 동녘에서 해가 뜬다.

호발귀와 등여산은 지붕 위에 앉아서 혈천방을 내려다봤다.

등여산은 호발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붉은색을 뿌리면서 치솟는 태양을 쳐다봤다.

남의 방파에서, 적대적인 관계인데도 태연히 지붕 위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다.

혈천방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데도 일절 무인을 보내지 않는다. 호발귀가 혈천방주를 찾아올 수밖에 없으니,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심산이다.

혈천방주는 자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혈마도 없고, 이미 쓸만한 수는 다 썼는데 무슨 수가 남았을까?

도천패로부터 혈천방 상황은 전해 들었다.

팔당이 있다. 그리고 후옥이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혈천방은 매우 차분하다.

겉으로는 손해를 많이 보는 것 같다. 형편없이 막 뚫리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일절 동요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불안감이 읽히지 않는다.

“혈천방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어.”

호발귀가 말했다.

“보위 님이 다 돌아봤다잖아. 미심쩍은 데라도 있어?”

등여산이 말했다.

“내게는 귀안(鬼眼)이 있잖아.”

호발귀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귀안이라는 말은 호발귀가 만든 말이다. 보통 사람은 생기를 보지 못하는데, 호발귀는 본다. 간혹 무당 중에 귀신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데, 꼭 그런 눈을 가진 기분이다.

“사람들 생기는 똑같다며? 어떻게 찾으려고?”

“사부님은 못 찾지. 사부님은 혈천방주를 만나야 하고, 그 전에 찾을 게 있어서.”

“홀리나 해자수?”

“두 사람도 못 찾아. 혈마.”

“아!”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의 기운은 사람과 다르다. 먼저 나타났던 혈마는 사람과 같았다. 하지만 대청에서 본 네 명은 분명히 달랐다. 푸른 빛이 아니라 희뿌옇고 칙칙한 빛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일단 혈마부터 죽여야겠어. 모두 여섯 명 죽였으니까 네 명 남았어. 열 명 만들었다고 했지?”

“그렇게 듣기는 했는데, 혈마는 찾을 수 있겠어?”

“혈마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어. 굉장히 탁했거든. 혈마부터 제거하면 방주가 써먹지도 못할 거고.”

등여산이 고개를 내둘렀다.

“이미 혈마를 썼는데 실패했잖아. 그러니 또 혈마를 쓰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에는 이번에는 기관진식(機關陣式)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기관진식?”

“대청에 설치되어 있을 거야.”

그렇구나. 이번에 방주가 사용할 것은 기관진식이었구나.

“가. 혈천방을 돌아본다며? 혈마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자고. 사부를 찾으면 더 좋고.”

등여산이 먼저 일어섰다.

네 사람은 혈천방을 걸어갔다.

그들은 아예 숨지 않았다. 변복도, 변장도 하지 않았다. 음습한 곳으로 은밀히 이동하지도 않았다.

버젓이 대로를 활보했다.

“이렇게 다녀도 되나?”

당홍이 불안한 듯 말했다.

적진에 들어와서 길 한복판을 걷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간혹 네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침입자임을 알아본 듯 경계심을 띄운다. 하지만 공격하지는 않는다.

공격이 금지되어 있다.

물 좀 먹읍시다. 물을 준다.

밥 좀 먹읍시다. 열 냥이요.

물은 공짜, 밥은 열 냥이다.

닭 한 마리 먹읍시다. 열 냥이요. 소고기 한 근 주쇼. 열 냥이요.

모든 음식이 전부 열 냥이다. 원래 가격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팔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너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빨리 방주를 만나러 와라!

혈천방주가 네 사람을 채근했다.

호발귀는 커다란 저택 뒤쪽 가산에서 음침한 기운을 감지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생기를 본 것이 아니다. 혈마에게서 느꼈던 혼탁한 기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산 중턱에서 호발귀를 잡아끌었다.

“보위는 덩치가 너무 커서 안 되겠어. 여기서 좀 쉬고. 책사는 나하고 산에 좀 올라갔다 오자고.”

호발귀가 말했다.

“첵사? 이미 합궁까지 했으면서 책사가 뭐야, 책사가? 아이고! 정 없어. 계속 책사라고 부를 거야.?”

당홍이 눈을 흘기며 질책했다.

호발귀는 못 들은 척 딴 곳을 쳐다봤다.

등여산이 재빨리 말했다.

“가산에 뭐가 있어?”

“몰라. 하지만 은밀히 살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호발귀는 귀안에 의지해서 움직인다. 그가 말하는 귀안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느낌이다. 호발귀의 느낌은 보통 사람들이 육안보다 훨씬 정확하다.

“가자. 등…… 매.”

호발귀가 힘들게 말했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

등여산이 재빨리 물었다. 하지만 답은 듣지 못했다.

호발귀는 이미 이 장 앞을 쏘아가고 있었다.

호발귀는 혈마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게 등여산에게는 딱히 좋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음고가 없다.

호발귀가 다시 죽음으로 떨어지면 깨울 방도가 없다. 이제는 본인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특히 혈마를 죽이자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은 보나 마나다. 구혼음소를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청에서 벌어진 일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잠깐!”

호발귀가 기어이 작은 동굴을 찾아냈다.

동굴은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평탄하게 쭉 이어졌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이르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호발귀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등여산이 바짝 뒤를 따라붙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등여산이 코를 찡긋거렸다.

익숙한 냄새! 아니, 잊을 수 없는 냄새!

“귀색무. 혈마가 여기 있어.”

두 사람은 동굴에 경계를 세우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어떤 사람도 매우 강한 피독단을 복용하지 않는 한, 귀색무를 맡으면 혼절한다.

굳이 경계를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등여산은 재빨리 피독단을 꺼내서 복용했다.

호발귀는 피독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독섬칠공은 이미 귀색무를 흩어내고 있다.

벽에는 횃불이 걸려있지만 불도 밝히지 않았다. 계단 밑에 누가 있을지 모른다. 괜히 경각심을 돋울 필요가 없다. 어둠에 익은 눈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두 사람은 한참을 내려간 끝에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사방에 굴이 뚫려 있다.

“사람이 있어?”

호발귀는 등여산이 묻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의 이목은 이미 동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귀안이 불을 밝혔다. 칙칙한 혈기를 봤다.

호발귀는 마치 자신이 주인이라도 된 듯 익숙하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크크큿! 크크크큿!”

동굴 안은 뇌옥이다.

가장 먼저 철창이 보인다. 철창 안에 발가벗은 사내가 사지를 묶인 채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크크큿! 크크크큿!”

사지를 묶인 사내는 호발귀가 나타나자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쇠밧줄을 부수기 위해서 사지를 움직이는데, 아주 필사적이다. 천적을 알아본 것일까?

호발귀는 철창으로 가서 자물쇠를 잡았다.

간단한 자물쇠다. 굵기만 굵었지, 풀기는 쉽다. 투심문도에게는 장난 거리다.

스읏! 투툭!

자물쇠는 철사 두 개로 간단하게 열렸다.

철창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생기를 끌어내서 사내의 원정을 두들겼다.

터엉!

“끼아아아아악!”

사내가 괴성을 지르면서 펄쩍 뛰었다.

“후욱!”

호발귀도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물러섰다.

생기격타로 혈마를 잡을 수 있다. 혈마는 혈기가 상당히 강해졌다. 생기격타를 하자, 거침없이 퉁겨버린다. 이미 외기를 감지할 정도까지 발전했다.

“괜찮아?”

등여산이 놀라서 달려와 부축했다.

괜찮지 않다. 혈기가 들썩거린다. 혈마가 천적을 알아봤듯이, 자신도 적을 알아본다.

츠으읏!

운기도 하지 않았는데, 역천금령공이 일어선다.

“으음!”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풀어내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진기를 끌어내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호발귀를 부축하고 있던 등여산은 울상을 지었다.

호발귀가 혈기를 일으키고 있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뭐하러 생기를 쓰나. 그냥 검으로 목을 잘라버리면……

‘검!’

그녀는 호발귀를 내려놓고 재빨리 혈마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검을 뽑아서 사정없이 목을 내리쳤다.

쒜에에엑!

검이 혈마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순간,

“헉!”

검을 쳐내던 등여산이 오히려 큰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몸에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진기가 흩어졌다. 마치 산공독(散功毒)에 중독되었을 때처럼 힘이 빠졌다. 검을 든 손에서 힘이 빠지고, 다리도 맥이 풀렸다.

혈마가 호발귀처럼 생기격타를 펼쳤다.

혈마의 타격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끈다. 단전을 진동시켜서 진기를 흩트린다. 그리고 곧바로 원정을 후려친다. 원정이 흩어지게 해서 폐인을 만든다. 그때,

쒜에에엑! 퍼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혈마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뚝 떨어졌다.

스읏!

호발귀의 손이 명문혈에 닿았다.

“안 돼! 생기격타, 인제 그만해! 위험해!”

“이대로 놔두면 등매, 폐인이 돼. 혈마의 생기격타는 독이야. 독 중에 극독!”

츠으으읏!

생기격타가 이루어졌다.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등여산의 몸에 든 독기가 순식간에 빨려 나갔다.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한두 호흡을 할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운기조식은 다음에. 빨리!”

호발귀가 등여산을 재촉했다.

“우선 좀 쉬고! 지금 위험한 상태잖아!”

“안 돼. 혈마가 이미 깨어나기 시작했어. 우릴 찾아냈고, 공격할 거야. 이건 염력(念力)과 흡사해서 기운만 찾아내면 공격할 수 있어. 빨리 처리해야 해.”

호발귀가 급히 다음 굴로 들어갔다.

호발귀는 혈마 네 명을 간단하게 죽였다.

등여산은 검도 댈 수 없었던 혈마인데, 호발귀에게는 순순히 목을 맡기는 듯 보였다.

혈마 네 명을 찾아냈고, 네 명을 죽였다.

동굴에 다른 사람은 없다. 혈마가 죽자 모든 기운이 전부 소멸하였다.

“왜 여기를 비어났을까?”

“모두 대청에 모여 있을 거야. 널 잡으려고. 지금쯤 우리가 대청을 습격했어야 맞거든. 그런데 괜찮아?”

“아니. 쉬어야겠어. 여기 음문촌 본거지야. 저들이 오면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최대한 막아볼게.”

어림없는 소리다. 등여산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음문촌 사람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달리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호발귀는 동굴 한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등매, 사람이 오면……”

“풋! 걱정하지 마. 죽여줄게. 넌 어떻게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에게 죽여달라는 부탁만 해?”

“그러게.”

“널 혈마로 넘기지는 않아. 안심해.”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고래를 옆으로 툭 떨궜다.

정말 죽었다.

지금 모습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바보일 것이다.

‘어떡해. 음고도 없는데. 꼭 깨어나야 해.’

등여산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