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八章 이견(異見) (4)
도천패는 망연자실했다.
당홍과 등여산도 마찬가지다.
귀검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그가 이토록 빠른 줄은 몰랐다.
살단 총주가 귀검에게 죽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호발귀가 앞으로 나서서 잘린 도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잘린 부위를 살폈다.
“보검도 잘리네.”
호발귀가 남의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스릉!
귀검이 검을 집어넣었다.
도천패를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니다. 칼만 자르고는, 병기의 생명을 끝내고는 미련 없이 검을 거뒀다.
툭!
호발귀가 검편을 던져버렸다.
“귀검은 항상 싸움이 있는 곳만 나타나지. 여기 온 것은 날 목표로 한 것 같고, 싸울 생각인 것 같은데…… 그 전에 당신 나한테 말할 것 없어?”
호발귀가 귀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없다.”
귀검이 차갑게 말했다.
“없어? 당신이 말한 방주 초청. 그거 초청이 아니던데? 아예 잡아 죽이려고 작심했더라고?”
“후후후! 그러면 혈천방이 네가 고와서 초청했겠나. 초청에 응할 때는 그 정도는 생각했을 것이고. 네 말이 내게는 어린애 징징거리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맞아. 어린애 징징거리는 소리. 어쩌나 보려고 한 번 해봤어. 그런데 어쩐 일로? 정말 싸우게?”
“원정 건드리지 말고, 무인 대 무인으로 싸워볼 생각이 있나?”
“안돼!”
호발귀가 대답하기 전에 등여산이 먼저 소리쳤다.
원정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은 혈마 무공을 쓰지 말라는 거다. 혈마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귀검을 상대하나. 도천패를 일격에 무너트린 검이다.
호발귀가 등여산을 쳐다보며 웃었다.
“하하! 귀검이 조금 전에는 내 검이 이렇다 하고 맛만 보여준 거고, 진짜 검은 따로 있어. 나와 싸울 때는 진짜 검을 사용할 거야. 기회가 닿으면 단숨에 죽일 생각이거든.”
“그럼 더 안 돼! 그런 식으로 싸우지 마!”
호발귀는 등여산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귀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다경만 시간을 주지. 나한테 다른 무공이 있는데,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거든. 이 무공은 도대체가 펼치기 힘들어서 말이야. 되게 까다로워.”
귀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주니 내가 고맙지.”
귀검이 제 자리에 앉았다.
귀검은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편안하게 운공조식에 몰입했다.
앞에 적이 있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호발귀도 귀검 앞에 앉았다. 그도 역시 검을 풀어서 무릎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운공조식을 취했다. 주위에 귀무살이 잔뜩 숨어서 지켜보는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다경은 무척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라도 되는 듯 시간이 무척 느리게 흘러갔다.
원충 노인의 팔십일수를 사용한다.
단전 진기를 이끌어서 전신 경맥으로 휘돌렸다. 무심무실공의 운행도를 따른다.
오랜만에 본문 무공을 사용해 본다.
역천금령공은 생명에 가장 밀접한 기운을 사용한다. 그래서 여타 무공에 대한 이해도도 매우 높아진다. 한 번씩 혈마가 될 때마다 세상 이치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부분도 ‘이래서 이렇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다못해 나무가 서 있는 모습만 보고도 감정이 급격하게 끓어오를 때가 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땅속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한다. 잎을 펼치고 햇볕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명을 유지한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세상 사람은 나무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는지 다 안다. 하지만 호발귀는 나무가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다.
땅의 기운과 하늘이 기운이 나무로 밀집되는 모습을 본다.
수천, 수만 그루의 나무가 일제히 같은 작용을 한다. 산 전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격동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무공에 관한 생각도 달라진다.
원충 노인의 팔십일수는 혈마록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 매우 강력한 무공이다. 사실, 만류귀원(萬流歸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이 하나로 통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무공의 근원에 역천금령공이 있다.
역천금령공을 배제하고 무심무실공을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천금령공을 몰랐을 때라면 그럴 수 있지만, 원정 진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배제하지 못한다.
진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기를 배제하고 육신의 힘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진기는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원정 진기는 모든 힘에 반드시 쓰인다.
눈을 감고 무신무실공을 일으킨다.
막강한 진기가 일어난다. 더불어서 역천금령공도 따라서 일어나려고 들썩거린다.
역천금령공은 너무 강력하다.
무심무실공만 일으키려는데, 역천금령공이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나선다.
‘안 돼!’
역천금령공을 눌러 앉히고 무심무실공만 일으켰다.
눈을 감고 마음을 평정하게 하고 마음을 명경지수에 둔다. 물결이 잔잔해진다. 툭 터진 바다가 생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아주 좋다. 이곳에서 머문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는다. 고요함 속에 맑음을 유지한다.
좋다! 그럼 이제 세상에 나가볼까?
세상을 향한 문을 연다. 그러자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평온함 속에서 풀벌레 소리, 새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역시 여러 사람의 생기가 느껴진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역천금령공이 어느새 일어났다. 이대로 무공을 전개하면 역천금령공이 쏟아져 나간다. 생기격타가 이루어지며, 원정을 누르는 힘이 작용한다.
귀검은 검을 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무신무실공을 일으켰다.
혈마 무공을 죽이는 일이 정말 어렵다. 완전히 떼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기는 생기의 일부분이다. 생기가 코끼리라면 진기는 다리나 코 정도밖에 안 된다.
무심무실공을 일으키면 역천금령공이 저절로 따라서 일어난다.
원래가 하나인 것을, 진기가 생기의 부속물이었던 것을.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이 쏟아져 나가지 못하도록 꽉 눌러 잡는 데 만족했다.
더는 안 된다.
호발귀가 눈을 떴다.
쒜엑! 쒝! 쒝! 쒝! 쒜엑!
귀검과 호발귀는 마치 화살을 쏘아내듯이 검광을 떨쳐냈다.
검법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검을 쏘아낸다. 인간은 개입하지 않았다. 인간이 개입하면 어떤 식으로든 속도가 죽는다. 검이 저절로 튀어 나간다.
쒝! 쒝! 쒝!
귀검과 호발귀는 검초를 쓰지 않는다. 누가 빠른가!
쾌검을 펼치는 데는 많은 요소가 사용된다. 몸이 빨라야 한다, 손이 빨라야 한다, 눈이 빨라야 한다, 발이 빨라야 한다 등등 온갖 요소가 동원된다.
이런 공부를 모두 마친 사람들이 검을 쓴다.
쾌검이 전개되고, 피한다. 피하면서 검을 쓴다. 상대방도 피한다. 즉시 따라붙는데, 어느새 반격이 펼쳐진다. 공격하다가 말고 갑자기 수비로 전환한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인간의 빠름인가 인간의 검인가.
귀검은 괜히 귀검이 아니다. 귀검의 검에는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검을 이토록 가볍게 쓰는 경우는 처음 봤다.
그런데도 검은 무지하게 빠르고 강하다.
가벼운 검은 빠를 수는 있어도 강하기는 어려운데, 귀검은 검을 펼칠 때마다 우렛소리가 울린다.
귀검은 파지법이 특이하다.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검을 잡고 있지 않다. 어떤 때는 손가락을 쓰고, 어떤 때는 손바닥을, 그리고 손등까지 사용한다.
검이 손에 자석처럼 달라붙어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어느 경우든 종이를 잡듯이 가볍게 잡는다.
호발귀도 가볍다. 하지만 호발귀의 가벼움은 귀검과는 다르다.
호발귀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듯 매우 위태롭게 흐느적거린다. 마치 정신 차리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다. 당장 달려가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검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너 까딱하면 죽는다고.
한데, 호발귀는 귀검의 검을 모두 피해내고 있다.
흐느적거리면서, 그리고 역공까지 취한다. 슬쩍 날아가서 툭 치고 나온다.
싸움이 팽팽하다. 양쪽 모두 빨라서 승패를 점칠 수 없다.
“병주기식. 망기호흡. 몽, 몽중몽. 일층우일층적몽경. 허실교체지간,유인미실료……”
도천패가 무심무실공을 읊었다.
원래 와주는 도천패에게 팔십일수를 전수하지 않았다. 호발귀가 가르쳐주었다.
도천패는 호발귀의 움직임에서 무심무실공을 읽었다.
강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게 뭐야?”
당홍이 물었다.
“팔십일수.”
“원충 노인?”
“응. 저거, 우리 투심문 무공이야. 우리 투심문 무공이 저렇게 강했나? 저건 검문 검공이라도 해도 믿겠는데?”
도천패가 중얼거렸다.
“저런 무공을 놔두고 왜 대력금강도를 수련한 거야? 대력금강도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저건 일절(一節)이야. 굉장한 절학 같은데, 왜 수련하지 않았어?”
“후후후!”
도천패는 쓰게 웃었다.
와주가 자신을 거둬서 투심문 무공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투심문주로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금고지기를 맡긴 것이다.
원충 노인의 팔십일수는 문주에게 문주로 이어진다.
도천패는 당연히 배울 수 없는 무공이었다. 오히려 호발귀가 말해준 것이 비정상이다.
쒜엑! 쒝! 쒝! 쒝!
호발귀와 귀검은 순식간에 오백여 합을 교환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삼십 합을 교환할 시간에 두 사람은 열 배가 넘는 초수를 주고받았다.
쒜에엑! 쉐엑! 까앙!
그 많은 초수를 교환하는 동안 한 번도 검끼리 부딪친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검과 검이 부딪쳤다.
두 사람이 일부러 마주친 것이다.
검과 검이 마주쳐야만 쾌검이 멈춰진다. 검이 쏘아져 오면 피하고 반격하는 것이 당연해서 검을 멈출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면 즉시 쫓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출 필요가 있어서 검과 검을 충돌시켰다.
휘익! 휘이이익!
두 사람이 충돌하는 힘을 빌려서 뒤로 두 걸음씩 물러섰다.
“아주 빨라졌군.”
귀검이 먼저 말했다.
“덕분에. 전에 한 수 배운 게 있어서.”
“이 싸움, 내가 이겼다.”
“맞아. 생기격타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갔어. 실수.”
호발귀가 순순히 인정하면서 검을 거뒀다.
잠시 싸움을 멈춘 것이 아니고 아예 검을 거뒀다.
“내가 이겼으니 무지, 월도는 바라지 마라.”
“오늘만. 다음에는 줘야 해.”
“다음에도 넘겨주지 못한다. 놈들이 목숨을 내게 맡겼으니 나도 지켜줘야지.”
“그럼 우린 또 싸워야겠군.”
“언제든지. 이건 네 선택이다만 그때까지 원정 치지 않는 법을 배우면 좋고.”
“그걸 왜 배워야지 되는데! 보자 보자 하니까!”
도천패가 불쑥 나섰다.
호발귀가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러지. 할 수 있다면 해보지. 그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분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해보기는 하는데, 아마도 힘들 거야.”
귀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귀검은 무인 대 무인으로 싸우기를 바란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
자신보다 빠른 자가 나와주기를 바란다.
역천금령공은 반칙이다. 무인이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을 베는 것도 반칙이다.
귀검의 기준은 그렇다.
귀검은 무인으로써 최고의 검을 가졌다. 그 검을 누군가 꺾어주기를 바란다. 그 대상이 호발귀여도 무방하다. 도천패이거나 자신의 수하여도 상관없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내 사부, 여기 있나? 혈천방주는 여기 있다고 하던데?”
“모른다.”
스릉!
귀검이 검을 꽂았다.
“내 수하들은 항시 내가 데리고 있을 것이니까, 원정을 치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언제든지 와라.”
귀검이 뒤돌아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