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七章 첫 날 (2)
혈천방에는 고수가 득실거린다.
혈천방주나 음문촌 사내들 같은 초절정 고수도 십여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혈천방주가 대기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만큼 방주는 이번 일을 확신했다. 혈마 네 명만 희생시키면 음문촌 사람들이 호발귀를 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불안한 면이 있었다면 고수들을 움직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제 싸움이 시작됐으니 고수들이 나설 것이다.
쒜에엑! 쒜에에엑!
귓가에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등여산은 정신없이 치달렸다.
어디가 어딘지는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적진 한복판이지 않나. 무조건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달렸다. 집이 없는 곳, 건물이 없는 곳, 대로와 아닌 곳, 산이라고 해도 잔가지가 잘리거나 땅에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은 무조건 피했다.
상당히 먼 거리를 치달린 것 같다.
호발귀는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안다. 호발귀가 죽었다.
호발귀는 스스로 구혼음소를 걸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자진 명령을 내렸다.
토초가 구혼음소를 걸었을 때, 호발귀는 저항했다. 그래서 검을 찔렀다. 하지만 자신이 걸었을 때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가 거는 구혼음소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등여산은 구혼음소를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청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음률이 끊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그 순간, 호발귀는 다시 혈마가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호발귀는 깨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음률이 중단되었는데도 더 깊은 잠속으로 함몰되었다.
오면서 했던 것처럼 본인 스스로 구혼음소를 걸어서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호발귀는 생명의 기운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 아니, 이미 다 빠져나갔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생기가 돌아왔을 텐데,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생기격타를 할 때 비해서 이번 혈기는 매우 강렬하다. 오염된 생기를 쏟아내도 육신에 뭔가 조금은 남아있어야 다시 생기를 끌어들이는데, 이번에는 한 점 남김없이 모두 쏟아내 버렸다.
이대로 가면 호발귀는 죽는다. 아니, 벌써 죽었다.
등여산은 달리고 또 달렸다.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허름한 산신각을 발견해냈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서 절을 하면 꽉 찰 것 같은 매우 좁은 산신각이다.
산신각 안에는 산신인 듯싶은 할아버지 목상이 놓여 있었다.
목상 앞에 제단이 있고, 제기가 있다. 음식은 올려져 있지 않고 먼지만 수북하다.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된 산신각이다.
그녀는 재빨리 주위부터 살폈다.
진기를 이끌어 두 귀를 활짝 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람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여 있나? 섞여 있지 않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혈천방에서는 그녀를 쫓아올 정도로 빠른 사람이 없었다. 정말로 강한 고수들이 움직이지 않은 덕분에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되었다.
‘됐어.’
주위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등여산은 재빨리 호발귀의 맥문부터 잡았다. 맥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목동맥에 손을 대봤다. 목동맥도 뛰지 않는다. 호발귀는 완벽하게 죽은 상태다.
그런데 이런 상태,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다.
혈천방으로 오는 동안에 몇 번이고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생기격타 후에는 늘 있었던 일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죽을 수 있지?”
“죽은 건 아니잖아. 곧 깨어날 테니까…… 가사 상태?”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거야? 구혼음소가 정말 혈마 무공의 천적인가?”
“몰라.”
“언니, 독문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는 예는 없었지?”
“없었지.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 있기는 할 거야. 다만 내 견식이 짧아서 알지 못하는 거지.”
“언니가 모르면 없는 거지, 뭐.”
혈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홀리도 호발귀가 완벽하게 죽는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의원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독의의 진전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당홍도 호발귀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모두 같은 말만 할 뿐이다.
완전히 죽은 자가 되살아날 수 있나? 되살아날 수 있다. 호발귀가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설명할 수 있나?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무슨 헛소리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호발귀는 굉장한 모순을 가진 채 존재한다. 혈마 무공은 무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움직인다.
단지 맥문을 잡아보고 맥이 없으면 숨이 끊어졌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등여산은 두 손에 진기를 모았다.
이력음유지가 일어났다. 손가락에 진기가 운집되어서 강철처럼 곤두섰다.
스읏!
손가락을 호발귀의 양쪽 관자놀이에 대고 힘껏 찔렀다.
퍼억!
이력음유지가 터졌다. 호발귀의 관자놀이를 뚫어버릴 듯이 지력이 강하게 뻗어나갔다.
터엉!
그녀가 쳐낸 진기는 다시 돌아왔다.
죽은 자는 진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경맥이 멈추기 때문에 진기 흐름도 끊어진다.
진기를 아무리 밀어 넣어도 밖으로 튕겨 나온다.
진기가 일촌(一寸)도 들어가지 못했다.
‘살았어!’
등여산은 이력음유지가 튕겨 나온 현상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다.
등여산이 쳐낸 이력음유지 속에는 바위도 뚫을 만큼 강력한 진기가 담겨 있었다. 싸움할 때처럼, 사람을 공격할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법을 쳐냈다.
호발귀가 죽은 상태라면 관자놀이가 뚫렸다.
물론 호발귀가 보통 사람이었어도 역시 관자놀이에서 뇌수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혼절하거나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일절 저항하지 못한다.
호발귀의 죽음은 혈기와 연동한다. 지금도 몸속에 혈기가 남아있다면 틀림없이 이력음유지에 저항한다.
호발귀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타격해 보면 된다. 진기를 주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죽은 사람이든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든 무조건 밀어낸다. 오직 타격해 보는 것만이 정답이다.
등여산은 이 방법을 오래전에 생각했다.
하지만 시험해 볼 필요는 없었다.
호발귀가 스스로 깨어났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가 가사 상태에 빠져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지금, 매우 급한 상태에 직면하자 당장 그 생각부터 났다.
등여산은 매우 위험한 방법을 펼쳤다. 자칫 관자놀이가 뚫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극단의 방법이다.
시험해보니 호발귀가 살았다.
그럼 지금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호발귀를 깨울 수 있나.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은데.
“일어나봐.”
퍼엉!
등여산은 주먹에 진기를 모아서 심장 부위를 두들겼다.
퍼엉! 퍼엉! 퍼엉!
강력한 타격이 심장에 전해질 것이고, 죽었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심장 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전처럼 호발귀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느냐, 아니면 억지로 깨우느냐.
호발귀 상태는 누구도 모른다.
겉모습은 분명히 죽었다. 사실은 속도 죽었다. 오장육부가 모두 죽었다.
심장도 뛰지 않는다. 뇌는? 뇌도 움직이지 않을까?
혈마 네 명을 죽이면서 호발귀가 어느 정도나 타격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알 방법이 전혀 없다.
등여산은 원정이 회복되지 못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혈천방주는 방내 고수들조차 대기시키지 않을 정도로 호발귀 생포를 확신했다.
그만큼 호발귀에게 가한 충격이 크다.
호발귀라면 혈마 네 명이 죽이면서 일어난 혈기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기격타를 하고 구혼음소를 펼쳐왔다.
한데, 마지막에 촌장 자식들이 피운 향이 마음에 걸린다.
호발귀는 향 내음을 맡자마자 비틀거렸다.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오직 호발귀만 영향을 받았다.
아주 좋지 않은 타격, 그 후에 펼쳐진 구혼음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라면……’
등여산은 홀리가 떠나면서 은밀히 넘겨준 옥병을 꺼냈다.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아주 작고 앙증맞은 옥병이다.
- 음고야. 이걸 복용시키면 여자에 환장한 미친개가 돼. 그 자극이 너무 커서 원정이 흔들릴 거야. 깨어난다는 거지.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음고를 복용하면 성욕이 멈추질 않고 일어난다.
음고는 고충(蠱蟲)이다. 당홍의 독고와 비슷한 고충이지만 하는 짓은 전혀 다르다.
독고는 번식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숙주를 마비시키고, 살과 피를 파먹는다. 충분히 먹은 후에는 둘로 갈라진다. 음양이 없고, 몸이 쪼개진다.
독고는 계속 번식한다.
독고 한 마리가 사람을 먹어 치우는 데는 한 시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독고는 소멸한다.
독고는 위험하지만, 처리 방법이 존재한다. 그래서 암살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음고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음고는 사람으로 치면 욕심쟁이? 정신병자? 음기에 환장한 벌레다.
음고는 계속해서 음기를 취한다.
일단, 숙주의 몸에 있는 음기부터 빨아먹는다. 그 후에는 숙주를 죽이지 않고 외부에서 음기를 얻도록 만든다. 숙주 몸에 틀어박혀서 계속 음기를 갈취한다.
원래는 동물 교배 목적으로 찾아낸 발정체인데, 효과가 너무 지랄 같았다.
암컷과 수컷 둘 다 죽을 때까지 교배가 끝나지 않았다.
교배가 시작되면 수컷이 괴물로 변해버린다. 힘이 굉장히 강해진다. 그래서 억지로 암컷을 빼낼 수도 없었다. 교배가 아니라 폭행이 되어버렸다.
음악한 자들이 여인을 겁탈하기 위해서 춘약을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음고만큼은 손도 대지 않는다.
음고는 여인에게 말 못 할 고통을 안긴다.
애정을 가지고 행하는 부부 관계는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음기를 갈취하는 행위는 굉장히 포악하다. 사랑은 없고, 음기를 갈취하는 행위만 존재한다.
홀리는 호발귀를 노예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음고를 선택했다. 호발귀를 일깨우고, 구혼음소만 읊으면 끝난다.
등여산은 옥병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음고를 사용하면 어차피 호발귀에게 자진 명령을 내려야 한다. 좋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해서 일부로 죽어있는 사람을 깨우고, 다시 죽으라고 말해야 한다.
더욱 확실하게 죽일 생각인가?
등여산은 옥병을 호발귀 입에 대고 음고를 흘려 넣었다.
호발귀를 깨운다. 그에게 자진 명령을 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다.
솔직히 그녀는 기적을 믿었다.
호발귀가 어떻게든 정신만 차리면 혈마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기적이 생기면 오죽 좋을까.
오직 그 생각만 했다.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면, 호발귀가 혈마가 되면 그때 자진 명령을 내리면 된다.
홀리는 호발귀와 같이 죽을 생각이었다.
등여산도 같은 생각이다. 어차피 호발귀가 죽으면 그녀 역시 살 생각이 없다.
스르륵!
옥병 속에서 하얀 물이 흘러 들어갔다.
고충이라고 해서 벌레로만 생각했는데, 물이다. 물속에 녹아있는 듯하다.
등여산은 호발귀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너무 귀엽다. 아무리 봐도 혈마로 보이지 않는다.
일다경쯤 지나자 호발귀의 안색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일어났다.
음고가 일으킨 작용인 것은 분명한데, 호발귀가 살아난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죽은 시신이 부패하듯이, 음고가 육체 속에서 일으키는 작용일지도 모른다.
“깨어나. 그리고…… 제발 기적을 보여줘. 멀쩡하게 깨어날 거지? 혈마만 되지 마. 다른 건 용서해줄게.”
등여산은 호발귀 귀에 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