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四章 초대(招待) (2)
이백 년 전, 혈마가 무림을 초토화했다.
무기만 지니고 있으면 무조건 죽였다. 주인의 검을 들고 있던 하인도 병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죽였다. 목인(木人)을 상대로 권각을 단련해도 죽였다.
무림은 혈마를 죽이기 함정을 설치했다. 협공을 가했다. 기문 진학도 동원했다. 각종 암기도 사용해봤고, 산에 몰아넣은 후에 산불도 질러봤다.
혈마는 불사신처럼 살아났다.
혈마가 무인들의 씨를 말리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때, 기적적으로 혈마가 죽었다.
혈마가 왜 죽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많은 추론이 말해졌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이유가 없는데 죽었다.
그 후, 무림은 혈마 같은 자가 또 나타날 것에 대비해서 극히 강한 무공을 창안했다.
무림 최고수 이십 인이 모여서 혈마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연구했다. 혈마가 펼친 모든 무공을 참고했다. 혈마에게 죽은 사람들의 사인도 분석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건곤구혼검(乾坤拘魂劍)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혼령을 낚아챌 수 있다는 광오한 절공이다.
건곤구혼검은 탄생부터가 마학(魔學)이다.
건곤구혼검이 완성되자, 무림 최고수 이십 인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상잔을 벌였다. 아니, 건곤구혼검을 오직 자신만의 절기로 삼고 싶어 했다.
최고수 스무 명은 상잔(相殘)했다.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건곤구혼검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팔 열 십육 단에 있는 비급이 건곤구혼검이다.
주치균은 검법이라면 중원 최강 검법을 수련했다. 검신 구학봉의 비사칠초는 모두가 선망하는 절학이다.
비사칠초 덕분에 젊은 주치균은 단숨에 천살단 검벽주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함을 느낀다. 비사칠초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패배해도 절망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절학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마에게만은 언제나 좌절한다.
혈마를 만나면 비사칠초를 사부만큼 능숙하게 구사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데 그런 고민을 건곤구혼검이 말끔히 씻어주었다.
건곤구혼검을 펼치자 단숨에 진기가 극한으로 치닫는다.
비사칠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함이 일어나면서 전신을 자르르 울린다.
‘이건 정말 강하다!’
검초를 전개하자마자 당장 강하다는 느낌이 피부로 전해졌다.
비사칠초도 충분히 강하다. 자신이 오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제 위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수련하면 사부 못지않게 검초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건곤구혼검은 전혀 다르다.
이제 막 검초를 알았는데도 마치 사오십 년은 수련한 듯 능숙하게 펼쳐진다.
또한, 건곤구혼검은 사부가 없어도 수련할 수 있다. 각줄 마다 주석을 자세히 달아놨다. 진기 흐름부터 검초가 전개되는 흐름까지 어린애 가르치듯 적어놨다.
건곤구혼검은 삼 초밖에 없다. 하지만 비급이 무려 스물일곱 권에 이른다.
무공 하나가 단(段)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주치균은 비급 스물일곱 권을 십 일에 걸쳐서 외웠다. 그리고 마공관을 나왔다.
원래 마공관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다. 비급에 관계된 일을 할 때만 잠시 들어왔다가 나간다. 누구도 일다경 이상 머물지 못하도록 규정화되어 있다.
마공을 습득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한다.
주치균이 십 일 동안이나 마공관에 머문 것은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니다.
주치균은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건곤구혼검을 수련했다.
건곤구혼검은 혈마를 상대하기 위해서 창안된 검법이다. 이 검법만 수련하면 혈마는 반드시 잡힌다.
서둘 필요가 없다.
혈마를 잡을 수 있는 무공은 건곤구혼검뿐이니, 어차피 혈마는 자신 몫이다.
건곤구혼검은 아주 큰 단점도 있다.
건곤구혼검이 마공관에 소장된 것은 살인을 머금고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건곤구혼검은 주인을 파괴시킨다.
진기를 칠 성 이상으로 운기해서 검초를 펼치면 오장육부가 쑥 빨려 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기력이 탈진해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그만큼 파괴력, 살상력도 강하다.
하지만 칠 성 이상으로 검초를 계속 펼쳤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생각이 퍼뜩 일어난다.
살단주 미도회랑 오택골은 건곤구혼검의 마성을 파악했다.
빌어먹을 마공!
정공이 아니다. 단순한 패공도 아니다. 성격이 마공에 가까운 검공이다.
건곤구혼검은 자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련할 때도 삼 성 이상은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기재되어 있다.
쉿! 스륵! 쉬이이익!
주치균은 일 성의 힘만으로, 거의 진기를 운기하지 않고 손가락 힘만으로 건곤구혼검을 펼쳤다. 그런데도 비사칠초를 전력으로 펼쳤을 때처럼 파공음이 거칠게 일어난다.
그때, 검벽 부검주 임명강이 나타나 포권했다.
“검주님, 잠시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신지요?”
검벽 무인들에게 주치균은 여전히 검벽주였다.
주치균은 정보랑의 시신을 봤다.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원래 큰 칼에 맞아 죽은 시신은 참혹한 법이다. 아무래도 칼이 크기 때문에 갈라지는 부위도 많다. 뼈도 상하고, 장기도 상한다. 처참하다.
그런 점을 익히 알고 봤는데도 정보랑의 시신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정보랑을 가른 칼에서 분노가 느껴진다.
단순히 적이기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다. 아예 ‘지옥으로 꺼져버려라!’ 하는 심정으로 칼을 썼다.
“도천패라고?”
“네.”
“대력도강을 쓰는 놈?”
“맞습니다.”
“죽일 놈이 또 하나 생겼군.”
주치균이 차게 중얼거렸다.
“검벽을 동원할까 합니다. 하지만 단주님 안위도 문제라서, 저라도 나설 수 있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정보랑이 당했어. 신중해야 해.”
“이놈 시신이 섞기 전에 도천패의 시신을 제상에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검주, 도와주십시오.”
임명강이 한쪽 무릎을 꿇고 도움을 호소했다.
현재 정보랑은 주치균의 수하가 아니다. 정보랑은 검벽 부검주이고, 주치균은 살단 충주다.
엄연히 소속이 다르다.
소속?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주치균은 부검주들에게 백인백팔투를 가르칠 만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정보랑이나 임명강은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다.
“혈마도 죽고, 도천패도 죽는다. 모두 다 죽인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정보랑이 어쩌다가 도천패에게 죽은 거야? 검벽이란 놈이 단주 곁을 떠나?”
주치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벽은 늘 단주를 호위한다. 단주가 뒷간을 가면 뒷간까지 따라붙는다. 현재 단주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지만, 설혹 단주가 정사를 벌일 때조차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
검벽은 단주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자, 그림자다.
검벽이 단주 곁을 떠날 때는 죽었을 때와 단주에게서 비밀 명령을 하달받았을 때뿐이다.
임명강이 말했다.
“단주님께서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임명강은 자초지종을 말했다. 천원주가 책사 방에서 섭선을 찾았고, 천살단에서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기억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해서 보냈다고.
“그 심부름을 정보랑이 했는데,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그래. 그렇군.”
주치균이 피식 웃었다.
검벽은 단주를 보필하다 보니 크고 작은 비밀을 많이 알게 된다. 물론 검벽은 입이 무겁다. 죽는 순간까지 티끌만 한 비밀도 누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밀 자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주가 보내는 마지막 선물은 죽음이다.
단주가 등여산을 죽이려고 했다. 정보랑은 등여산 암살에 이용된 듯하다. 하지만 등여산을 죽이지 못했고, 도천패라는 자에게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일의 자초지종이 확 보인다.
공격은 이쪽에서 먼저 시작했다. 등여산은 잘 방어했다.
하지만 주치균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살단과 등여산 사이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천살단이 죽음을 내렸으면 등여산은 말없이 받아야 한다. 적어도 천살단 책사 위치에 있었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까지 거부해?
주치균이 차게, 아주 차게 말했다.
“호발귀, 등여산, 도천패. 모두 죽는다. 내가 직접 죽인다. 너는 단주님을 잘 보필해. 정보랑 장례는 치러라. 검벽 무인답게 깨끗이 태워버려.”
주치균은 검대로 돌아와서 검을 골랐다.
건곤구혼검을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느낌이다.
검대에서 제일 왼쪽에 놓인 검을 집었다.
탈혼검(奪魂劍)이다. 왕부에 있을 때부터 애용하던 검이며, 실전에서도 자주 사용했다.
검날이 갈지 않아도 날카롭다.
대도 같은 강병, 중병과 부딪쳐도 날이 나가지 않는다.
당대 제일의 도검장(刀劍匠) 석충(釋充)이 만든 검으로 제련 기간만 사 년이 걸렸다.
스읏! 휘리릭!
검을 뽑아서 가볍게 휘둘러봤다.
탈혼검은 언제나 자신감을 안겨준다. 검을 쥐고만 있어도 누구든 벨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스읏! 파아앗!
건곤구혼검 제일초 뇌전사락(雷電斜落)을 구사했다. 진기는 이성 정도 집중시켜서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 그런데,
“응?”
주치균은 탈혼검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처음으로 탈혼검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검신이 뇌전사락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진다. 강하기만 할 뿐, 탄성이 부족하다.
“이런 검이었군.”
용맹하다고 생각했던 장군에게서 소심한 면을 봤을 때와 비슷한 실망감이 일어났다.
주치균은 탈혼검을 검대에 툭 던졌다.
탈혼검의 실체를 알았으니 앞으로 다시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검을 집었다.
혈한검(血恨劍)이다.
천살단에 몸을 의탁했을 때, 단주가 직접 내준 검이다.
날카롭기로는 천하제일,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혈한검을 받았을 때, 시험 삼아서 소머리를 잘랐다. 살과 뼈가 단숨에 잘렸다. 베는 감촉이 기름 위를 흐르는 듯 매끄러웠다.
휘릭! 휙!
검을 휘둘러봤다. 역시 날카롭다. 혈한검의 파공음은 강하거나 날카롭지 않다. 여인의 치맛자락 소리처럼 가볍고 은은하다. 사악! 하는 소리가 매우 즐겁게 들린다.
스으읏! 파라라라락!
건곤구혼검 제이초 비성오점(飛星五點)을 찍었다.
검이 오각형을 그리면서 흐른다. 검이 다른 방향으로 꺾이는 순간, 툭 하고 점을 찍는다.
비성오점을 찍으면 상대방은 오체분시가 된다.
머리와 두 손과 두 다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떨어진다. 한순간에 잘려나간다.
쒜에에엑! 투투툭!
혈한검이 비성오점을 찍으면서 흘렀다. 하지만 주치균은 끝까지 검초를 펼치지 못하고 중간에서 거둬버렸다.
검이 너무 무겁고 투박하다.
비성삼점까지는 찍었는데, 그 뒤를 잇지 못한다. 방향이 명쾌하게 전화하지 못하고 일그러지면서 휘돈다. 끝까지 검초를 전개하면 검신이 비틀릴 것이다.
“후후! 단주님도 참…… 검 같은 검을 주셨어야지.”
툭!
혈한검을 검대에 던졌다.
주치균은 검대에서 검을 하나씩 점검해 갔다.
보검이라며 아끼던 검들을 모두 점검했다. 여섯 자루를 휘둘러봤고, 모두 던져버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묵사검이 눈에 들어왔다.
등여산이 묵사검을 선물했을 때, 주치균은 모든 검을 하위로 밀어버리고 묵사검을 최상위에 두었다.
그 검이 주치균의 얼굴에 칼자국을 새겨놨다. 그리고 등여산은 묵사검을 휘두른 자의 품에 안겨서 마냥 행복해한다. 천살단은 깨끗이 잊은 채.
주치균은 묵사검을 집었다.
“네놈은 어떤지 보자.”
쉬잇! 휘리릭!
다른 검들처럼 가볍게 휘둘러 봤다.
역시 명검이다. 다른 검들처럼 손에 찰싹 달라붙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좋다.
스읏! 휘리릭!
건곤구혼검 제일초 뇌전사락이 펼쳐졌다. 단숨에 쑥 그어진다. 곧이어서 제이초 비성오검을 펼쳤다. 마지막 오점째는 힘에 부치는 듯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제삼초 적화단류(赤火斷流)!”
적화단류가 닿는 곳에 보검 용화검(龍華劍)이 있었다.
주치균의 보검 여섯 자루 중 하나이며, 기대에 못 미쳐서 던져버린 검이다.
쒜에에엑! 퍼억!
묵사검이 용화검을 쳤다. 용화검이 무처럼 깨끗이 잘려나갔다.
주치균은 멍한 표정으로 묵사검을 쳐다봤다.
등여산은 알까? 자신이 선물한 묵사검이 자신의 연인 혈마를 죽이고, 그녀의 심장까지 후벼 파게 될 것이라는 걸.
“좋군.”
주치균이 묵사검을 허리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