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三章 공적(公敵) (5)
“칙륵강은 음산 기슭, 아하! 음산 기슭! 하늘은 천막처럼 사방을 덮는다. 아하! 사방을 덮는다!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아득하고, 바람이 불자 풀이 넘어져 소와 양이 보인다. 아하! 풀이 넘어져 소와 양이 보인다.”
해자수가 노래를 부르며 걸어왔다.
“참 팔자 좋네.”
도천패가 해자수 앞에 불쑥 나타나며 말했다.
“아이쿠! 깜짝이야! 아, 거 사람이 나타나면 나타난다고 말을 하고 나타나야 놀라지를 않지!”
해자수가 툭 쏘면서도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자수 뒤를 이어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먼 길, 고생했습니다.”
호발귀가 웃으면서 반겼다.
“그럼, 그럼. 나 고생 무지무지 많이 했지. 정말로 고생했다니까. 까딱했으면 죽을 뻔했다고.”
해자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토초는 잡았어요?”
“잡았지. 너, 나 알고 보낸 거잖아. 사람이 왜 그래? 알았지. 알았지! 넌 알고 있었지?”
호발귀가 활짝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혈천방 진령산맥에 있어. 진령산맥! 산 한 가운데 버젓이 그냥 아주 큰 성을 이루고 살더라고. 어떻게 그렇게 사는지 몰라.”
해자수가 고개를 내둘렀다.
“진령산맥요?”
등여산이 되물었다.
그녀는 어느새 진령산맥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해자수가 등여산을 보자마자 퍼뜩 생각나는 게 있는지 부랴부랴 품을 뒤졌다.
“참! 그게…… 그냥 그게…… 지금 진령산맥이 문제가 아니고, 이거 이거.”
해자수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등여산에게 주었다.
등여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서 읽었다. 홀리와 당홍이 궁금해서 어깨 너머로 같이 읽었다.
“엇! 이것들이!”
홀리가 종이를 읽다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소리를 빽 질렀다.
“종말 이거 너무 하네.”
당홍도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해자수가 등여산에게 건넨 것은 천살단이 무림 문파에 통보한 통문이다. 그가 가져온 것은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다. 하지만 원본에서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이 필사에서 가져왔다.
“어때? 깜짝 놀랐지?”
해자수가 말했다.
깜짝 놀란 정도가 아니다. 분해서 길길이 날뛸 지경이다.
호발귀 일행은 혈마가 중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살인을 저지른 일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건 분명히 혈천방 짓이다.
양수겸장이라고 할까? 혈마를 통해서 호발귀를 치는 한편, 호발귀가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을 팠다.
완벽한 누명이다.
이제 호발귀는 꼼짝없이 혈마가 되었다.
혈천방에는 가짜 혈마가 있다. 지금부터는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살인조차도 호발귀 짓으로 둔갑한다.
“단주님이 사임을…… 나 때문에.”
등여산이 통문을 읽고 망연히 말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천살단주가 단주직을 내려놓고 사임한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책사가 완전히 겁탈당한 여자가 돼버렸잖아. 이렇게 되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무림에 얼굴을 들고 다녀? 사람을 어떻게 이 모양으로 만드나? 이거 정말 천살단에서 작성한 거 맞아?”
당홍이 해자수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홍은 여섯 명이 무림 공적으로 낙인찍힌 사실은 거론도 하지 않았다. 오직 천살단이 등여산을 겁탈당한 여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왜 나한테 그래! 난 그냥 베껴서 온 것뿐이야! 내가 이걸 썼어?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천살단에서 보낸 통문은 거의 기정사실화된다.
등여산은 앞으로 평생 겁탈당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한다. 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사실이 아니라고 판정되어도 지금 강호에 돌려진 통문 내용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너 이제 꼼짝없이 책사를 책임져야겠네. 호발귀! 차라리 지금 책사를 겁탈하지 그래? 뭘 했어야 누명을 써도 억울하지나 않지.”
홀리가 말했다.
“다들 무림 공적이 됐는데, 이건 괜찮아? 앞으로는 눈에 띄기만 하면 모두 죽이려고 달려들 건데. 그런데 나는 왜 여기 끼였나 몰라.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잖아?”
해자수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긴. 내가 잡은 멧돼지 뜯어 먹었잖아.”
도천패가 해자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겨우 그걸로 무림 공적?”
“그럼 나는? 멧돼지 잡은 죄로 무림 공적?”
도천패와 해자수가 티격태격했다.
무림 공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화가 덜 난다. 이 부분보다는 호발귀가 혈마가 되었다는 데 더 화가 난다. 또 그 부분보다는 등여산이 이상한 여자가 된 게 기막히다.
등여산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무림 공적이 되면 추살단이 꾸려져. 추살단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귀찮아. 지금 당장 진령산맥으로 가야 해. 되도록 빨리 일도 마치고, 사부도 구해. 그리고 바로 은거해. 이 함정에서 벗어나는 건 그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또 혈마가 되면?”
홀리가 말했다.
“지금 이대로도 어차피 혈마 위험은 벗어나지 못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적으로 움직이자는 게 내 생각이야.”
등여산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오다가 묘한 소리를 또 들었어. 혈천방주가 호발귀를 초청했다는…… 뭐 그런 소리를 들었거든.”
“초청? 나를?”
호발귀가 어이없어서 해자수를 쳐다봤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고……”
해자수는 이자와 만난 일을 말했다. 이자가 한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았다.
“혈천방주는 널 잡을 자신이 있어.”
등여산이 호발귀를 보며 말했다.
“자신이야 누구나 있지.”
호발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니, 가볍게 생각하지 마. 정말 잡을 자신이 있어. 그러니까 안방으로 부르는 거야.”
등여산이 신중하게 말했다.
“아저씨 말대로라면 조만간 누군가 올 거야. 우리가 진령산맥으로 찾아가지 않아도 사람이 와. 우리가 그 초청을 받아들이면 함정에 빠지는 거야.”
“책사 의견은 뭔데?”
“어려운 문제이긴 한데…… 아무래도 돌파해보는 게 어떨까 해. 함정에 빠지는 건 확실하지만,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니까.”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혈천방으로 가다 보면 저쪽 사람과 만나겠지.”
호발귀가 먼저 일어섰다.
“아씨!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해월류! 아는 거 있어요, 없어요?”
“그게 뭔데?”
“정말 몰라요?”
“모른다니까! 해월류가 뭔데?”
해자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홀리를 쳐다봤다.
“왜 눈을 희번덕거리고 그래! 해월류가 뭔데!”
“정말 해월류, 몰라요?”
“모른다니까! 해월류가 뭐야?”
홀리는 정말로 해월류를 몰랐다.
그렇다면 해월류와 음문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해월류는 혈천방에서 생존했다. 한데 혈천방 해월류가 왜 이자와 연관되었을까? 술사 탐지 사실을 왜 혈천방에 알리지 않고 음문촌에 말했지?
해자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 이거 상당히 복잡하네. 이거 내 머리로는 풀 수 없어. 백날 고민해 봐야 아무것도 안 나와.”
해자수는 해월류에 관한 사실을 등여산에게 말했다.
등여산은 통문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해자수의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었다.
“지금 당장은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생각해볼게요. 분명히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분명히 무슨 연관이 있지?”
“네. 생각해볼게요.”
“그래. 그리고 그거…… 통문 문제. 너무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마.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더라고. 그저 어디서 똥개가 짖는구나 하고 잊어버려.”
“호호! 네.”
등여산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도천패가 일행들보다 대여섯 걸음 앞서 나갔다.
무림 공적으로 낙인찍혔으니 이제부터는 항시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공격해 와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기습, 암습 등등 모든 것이 통용된다.
산길을 더듬어 가던 도천패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호발귀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산길 나무 밑동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일행을 향해 걸어왔다.
“기습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정면 대결이야? 뜻밖인데?”
스릉!
도천패가 대도를 뽑았다.
그때, 등여산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괜찮아요.”
“오랜만이에요.”
등여산이 사내를 반갑게 맞이했다.
“혈마와 같이 지낸다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군. 저놈 밤 기술이 꽤 좋은가 봐? 겁탈당하고도 쫓아다니는 걸 보면.”
검벽 부검주 정보랑이 거칠게 말했다.
정보랑의 검벽주 주치균의 수하였다.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등여산을 존중했고, 항상 조심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멸시하는 눈초리다.
정보랑은 통문 내용을 믿고 있다.
“후유!”
등여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던 주치균이 겁탈을 믿고 있다. 하물며 정보랑인들 오죽할까.
“저와 말 섞기도 싫으신 것 같네요. 어쩐 일이세요?”
“천원주님 심부름이다. 최소한 천살단 기억만은 간직하라고 이걸 보내셨다.”
정보랑이 종이에 쌓인 물건을 내밀었다.
등여산이 종이를 풀자 옥으로 만든 섭선이 나왔다. 천원주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건데, 필요 없어서 어느 구석엔가 처박아 놓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훗!”
등여산이 섭선을 보며 웃었다.
“이걸 주시면서 다른 말씀만 안 하셨어요?”
“공적으로는 천살단 시절은 깨끗이 잊어라. 사적인 부탁도 하셨다. 건강해라.”
순간, 등여산이 설화팔보(雪花八步)를 펼쳐서 쾌속하게 물러섰다. 바로 그 순간!
쒜엑!
방금 등여산이 서 있던 자리에 검광(劍光)이 터졌다.
부검주 정보랑의 무공은 등여산도 잘 안다. 주치균의 지도를 받아서 백인백팔투(白刃百八鬪)에 뛰어나다. 근접전에서는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고수다.
정보랑은 순식간에 백인백팔투를 십여 초나 쏟아냈다. 물러서는 등여산을 바짝 따라붙으면서 필사적으로 검초를 날렸다. 반드시 등여산을 죽이고 말겠다는 신념이 담겨 있는 검이다.
“죽엇!”
정보랑은 등여산이 불의의 기습을 피해내자, 크게 일갈을 내지르면서 검초를 펼쳤다.
그때, 정보랑을 우람한 사내가 가로막았다.
슈웃!
정보랑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거대한 칼날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물러섰다.
“생쥐 같은 놈! 감이 암습을!”
쒜에에에엑!
도천패가 신형을 날리기 전에 파공음부터 터졌다. 온 세상이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거대한 울림이다.
천공반선, 대도를 머리 위에서 빙글 휘돌린다. 일기감하, 단숨에 아래를 향해 내리친다.
쩌억!
공기가 거칠게 찢어졌다.
“안 돼!”
등여산이 깜짝 놀라서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천패는 몹시 분노했다.
천살단이 등여산에게 이상한 누명을 씌운 것도 분했고,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 암습을 가한 것도 분했다.
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족속들이 있나!
도천패는 전력을 다해서 대력도강을 떨쳐냈다. 등여산이 고함을 내질렀지만, 중도에서 거둘 수 없을 만큼 전신 진력이 모두 담긴 분노의 칼이다.
정보랑이 얼떨결에 팔을 들어 올렸다.
미처 장검을 뽑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자, 단검으로라도 막아볼 생각이었다.
쩍!
대도는 팔을 단숨에 잘랐다. 그리고 이어서 정보랑의 머리도 갈라버렸다.
“아!”
등여산은 탄식했다.
검벽 부검주는 오직 검주의 지시만 받는다. 검주가 공석인 지금은 단주의 명령을 쫓는다. 명령이 없었다면 절대로 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검조차 뽑지 않았다.
단주가 암살 명령을 내렸다.
암살 같은 일을 검벽 부검주에게 시켰다는 것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다.
등여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정말 천살단과 인연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나마 천원주가 목숨을 살려주었다.
건강하라! 반대로 말하면 조심하라는 뜻이다.
천원주는 마지막 선물을 보낼 때부터 이것이 암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경고를 해준 것이다.
‘고마워요. 천원주님.’
등여산은 천원주의 고뇌를 읽었다.
등여산이 눈을 뜨며 말했다.
“이제 홀가분해졌어. 정말 편안해졌어. 고민 같은 것도 없고. 가.”
등여산이 호발귀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