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三章 공적(公敵) (4)
무당파(巫堂派) 현천도인(玄天道人), 곤륜파(崑崙派) 삼절검사(三絶劍士), 황보세가(皇甫世家) 황보궁(皇甫躬), 남해문(南海門) 육절필(六絶筆), 사천당문(四川唐門) 당소(唐蕭).
지난 한 달 동안 죽어간 정도 무인 명단이다.
사실 이들은 무림을 영도하는 무림 명숙이다. 각 문파의 원로이거나 장로다.
무림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섯 명은 죽음은 무림에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 혈마에 대한 공포심도 일으켰다.
이들보다 인지도가 낮은 고수들은 더 많이 죽었다.
급하게 올라온 보고만 봐도 거의 서른 명 넘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죽음의 특징은 마치 늑대 무리한테 당한 듯 전신이 마구 뜯겨 있다는 점이다.
검에 당해서 절명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신이 너무 난도질당했다. 살인자는 상대방이 절명한 후에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스무 번 넘게 검을 쳐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들의 죽음을 보면 ‘또 혈마에게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얼른 일어난다.
혈마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
더 충격적인 것은 천살단 책사 등여산이 호발귀와 함께 행동한다는 거다.
“내가 분명히 들었어. 호발귀! 죽여! 숨을 완전히 끊어놔야지! 이렇게 소리치더라니까.”
“등여산이 확실해? 그 여자가 그렇게 말을 사람이 아닌데? 등여산 안 봤지? 대단히 예쁘고 착해. 난 등여산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이 사람도 참! 등여산 그 여자, 호발귀라는 놈에게 겁탈당했잖아. 몸 빼앗기고 오갈 데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내 인생은 여기 걸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뭐.”
“참 세상에. 등여산도 그렇게 변하네.”
호발귀 곁에는 다른 사람도 있다. 음문촌 홀리라고 한다.
음문촌은 이백 년 전 혈마 사건 때 혈마를 보필하면서 온갖 악행을 주도했던 무리다.
무림은 등여산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홀리를 주시했다.
혈마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혈천방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음문촌이 혈천방보다 백 배는 악랄했다.
혈마 밑에 음문촌이 있고, 그 밑에 심부름하는 역할로 혈천방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 마디로 무림이 치를 떠는 혈천방은 겨우 심부름하는 종자(從者)에 불과했다.
음문촌이 이백 년 동안이나 멸절되지 않고 대를 이어왔다.
지금 호발귀 곁에는 홀리와 해자수만 머물고 있지만, 또 누가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들은 혈마 재현이라는 기치를 걸고 호발귀를 떠받든다.
호발귀 곁에 홀리가 있다는 사실에도 증명해주는 증인이 많다.
“그 여자 정말 악마야, 악마! 딱 봐도 악마야. 완전히 야만인처럼 생겨서 피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아이고! 난 꿈에 나타날까 봐 두렵다니까.”
“나도 봤어. 얼마나 사나운지 눈매가 쭉 찢어져서 요렇게 눈을 치뜨고 노려보더라니까.”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나왔어? 혈마를 보고도 용케 무사했네?”
“죽은 척했지. 곰도 죽은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잖아. 그 생각이 퍼뜩 난 거야.”
“혈마 같은 놈이 죽은 척한 걸 놔둬? 혈마 같은 놈들은 그런 거 당장 눈치챌 텐데?”
“내가 그냥 죽는 척만 했을 것 같아? 온몸에 피도 바르고, 시신도 올려놓고 별짓 다 했다니까. 자네도 나중에 혈마 놈 만나면 죽은 척해. 그게 최선이야. 이휴! 치 떨려.”
혈마와 홀리를 봤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또 다른 사람도 봤다고 한다.
멧돼지처럼 덩치가 큰 놈은 무지막지하게 칼을 휘두른다고 한다. 미친놈이 따로 없다고 한다. 칼 한 번 휘두르면 서너 명이 푹푹 나가떨어진단다.
또 여자는 독을 쓴다.
혈천방에서 독술을 쓰다가 너무 잔인해서 쫓겨났는데, 갈 곳이 없어서 혈마에게 붙었다고 한다.
혈천방에서조차 쫓겨날 정도로 독술이 잔인한 여자.
한 달 만에 혈마는 최악의 인간이 됐다.
혈마를 기분이 좋아도 사람을 죽이고, 나빠도 죽인다. 눈에 띄면 무조건 죽인다.
* * *
“어떻게 할까요?”
천원주 주당염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쯧! 결국…… 어쩔 수 없지. 준비한 대로 해야지.”
천살단주가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천원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체로 단주가 말하면 바로 복명했는데, 이번만은 침묵이다.
“이럴 줄 알았잖나.”
천살단주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면서 말했다.
“정말 그 아이를 버리실 생각이세요?”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버리지 않으면 어떡해?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고?”
“……”
“쯧! 그러게 진작 돌아왔어야지. 돌아오지 않은 건 그 아이야.”
“알겠습니다. 처리하겠습니다.”
천원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천살단은 먹이가 두 개다.
첫 번째 먹이는 혈천방이다. 혈천방을 먹고 산다. 혈천방과 싸우는 한 천살단의 존재 가치는 분명해진다.
두 번째 먹이는 정도 무림의 지지다.
정도 무림의 지지는 실질적인 힘이 된다. 그들이 가진 재화와 정보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기부금도 상당하다.
정도 무림의 도움을 바탕으로 천살단은 더 강한 문파가 된다.
정도 무림의 지지와 혈천방,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훌륭한 먹이다.
지난 한 달 동안 혈마에게 죽은 무인은 거의 서른 명이나 된다.
사실 그들의 숫자는 매우 적다. 그보다 더 많은 무인이 비무 혹은 결투라는 이름으로 죽는다.
그들이 혈마에게 죽었다는 게 문제다.
무림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은원관계로 얽혀 있다. 정도 무림은 정도라는 틀 속에서 교분을 쌓는다. 죽은 사람 중 인지도가 높은 다섯 명은 거의 모든 무인과 얽힌다.
모든 무인이 서너 사람만 건너면 죽은 사람과 연관된다.
이런 마당에 그들을 죽인 혈마와 등여산이 관계되었다. 천살단 책사가 얽혔다.
일이 매우 복잡미묘해졌다.
천살단은 이 살인 사건들이 호발귀가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른 명이 죽은 위치는 각기 다르다. 범위가 굉장히 넓다. 호발귀가 날개가 달려서 하늘을 날아다니지 않는 이상 이들 모두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음모는 호발귀 일행을 여럿으로 쪼갰다.
호발귀와 등여산, 홀리와 해자수, 도천패와 당홍으로 나눠놨다. 그들이 사방을 뿔뿔이 갈라져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말도 안 되는 음모다.
하지만 음모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또 어설프게 호발귀 결백을 증명하려고 했다가는 당장 다른 문제에 걸려든다. 그러면 흉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다.
흉수는 혈천방이다. 분명하다.
하지만 혈천방이 흉수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가 없다.
또 밝혀내도 문제다. 흉수가 혈천방이라는 게 밝혀지면, 이번에는 그러면 혈천방이 그토록 날뛰도록 천살단은 뭐 하고 있었냐는 질책이 들어온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호발귀가 누명을 쓰는 게 편하다.
무엇보다도 등여산이 호발귀와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단주가 말했다.
“그 아이 방 좀 뒤져봐.”
“방을요?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찾는 것은 없고. 일은 이렇게 됐지만, 그래도 그 아이 우리에게는 딸 같고 손녀 같은 아이가 아니었나. 천살단 시절을 기억할 만한 물건이 있을까 해서.”
“차라리 천살단 시절을 깨끗이 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냐. 뭐라도 하나 챙겨줘.”
천살단주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천원주는 등여산이 머물던 거처로 들어섰다.
주인 없는 방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방에 서류가 깔려 있고, 책도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떠나기 전까지 사용했던 붓은 빨아놓지 않아서 먹물이 엉켜 있었다.
등여산은 항상 지저분하게 늘어놓고 살았다.
시녀가 치우는 것조차 질색했다.
자신이 늘어놓은 대로 놓여 있어야 찾기가 쉽다며, 절대로 방 청소를 하지 못하게 했다.
가끔 주치균이 방을 치우기는 했다.
등여산도 그때만큼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주치균과 티격태격 다투기는 했지만 언제나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둘이 잘 어울리는가 싶었는데.
천원주는 방안을 천천히 걸었다.
등여산이 애착을 가질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섭선을 발견했다.
자신이 생일 선물로 준 보물이다. 부챗살이 한옥으로 만들어져서 쥐고 있기만 해도 서늘하다. 생일 선물로 주려고 작심하고 남만에서 구해온 귀한 물건이다.
하지만 섭선은 방안 한구석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먼지만 수북이 쌓여있다.
“계집애, 잘 쓰라니까.”
천원주는 섭선을 집어 들었다.
최르륵! 휘릭! 휘릭!
섭선을 펼쳐서 살살 부쳤다.
섭선에서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등여산은 미리 아프다고 했지만, 대다수 여인이 좋아하는 향 내음이다.
“휴우!”
천원주는 긴 한숨을 내쉬며 섭선을 접었다.
등여산이 천살단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은 섭선으로 정했다. 이것처럼 뚜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또 마지막 선물로 가장 적합하다.
그녀는 섭선을 화선지에 곱게 쌌다.
“밖에 누가 있니?”
“네. 검벽 부검주 정보랑입니다.”
밖에서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검벽 무인은 천살단주를 호위하는 게 임무다. 그런데 부검주가 기다리고 있다. 분명히 천살단주의 명을 받고 온 것이다. 그만큼 이번 일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부름 좀 해야겠네?”
“네. 말씀 들었습니다.”
역시 검벽 부검주는 천살단주에게 명을 받고 대기하는 중이다.
“책사는 산청(山淸)에 있어.”
“넷!”
“이거 가져가서 전해줘. 그리고 천살단 시절을 깨끗이 잊으라고 해. 건강해야 한다고 말해줘. 이건 내 사적인 부탁이야.”
“네! 알겠습니다!”
정보랑이 머리를 숙이면서 종이에 쌓인 것을 받았다.
천살단은 무림 전 문파에 통문을 돌렸다.
천살단은 책사 등여산을 파문한다.
사실, 책사는 이미 두 달 전에 파문되었다. 다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고 설득하는 중이었다.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책사는 천살단을 버리고 호발귀를 쫓아갔다.
책사가 천살단을 등지고 혈마를 쫓은 이유는 역시 겁탈당한 것이 컸다.
등여산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굴복당했다.
책사는 겁탈한 호발귀를 징계하기는커녕 오히려 혈겁에 참여하면서 정도의 기치를 등졌다.
이에 천살단은 모든 문파에 통보한다.
천살단은 책사가 변절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천살단주가 사임한다. 차기 천살단주는 호발귀 척살 이후에 선출할 것이며, 그동안 천살단은 천원주가 이끈다.
등여산의 사문인 태산파는 향후, 이십 년 동안 봉문할 것을 명령한다. 태산파 무인의 활동영역은 태산으로 한정하며, 태산을 벗어나는 즉시 추살한다.
등여산은 호발귀와 함께 공공의 적이다.
호발귀, 등여산, 홀리, 도천패, 당홍, 해자수를 무림 공적으로 선포한다.
모든 무인이 추살에 협조하라.
이런 내용의 통문이 강호 전 문파에 전달되었다.
천살단은 태산파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 태산파가 통문을 따를 이유도 없다.
하지만 천살단은 명을 어기면 추살한다고 기재했다.
말 그대로 천살단은 태산파를 거침없이 공격할 것이다. 태산을 벗어난 태산문도는 모두 죽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천살단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태산파는 상당히 곤란해진다.
천살단은 단주 사임이라는 초강경책을 내놨다.
천살단 단주는 선출로 뽑지 않는다. 일반 문파처럼 전임 단주가 후임 단주를 지목한다.
천살단주는 후임 단주를 지목하지 않았다.
임시 단주로 천원주를 지목했을 뿐, 정식 단주는 선출로 뽑겠다고 기재해놨다.
하지만 통문은 정상적으로 보인다.
책사를 파문하는 천살단의 분노와 실망감이 여실히 읽힌다.
무림은 이차 통문이 올 것도 예상했다.
천살단은 추살단을 편성할 것이다. 그리고 무림에도 협조 요청을 할 게 명확하다.
각 문파에서 한두 명씩만 고수를 파견해도 금방 오륙 백 명을 넘어선다.
무림 공적은 여섯 명.
다섯 명은 추살할 자신이 있는데, 혈마가 문제다. 혈마는 천살단이 책임져야 한다.
어쨌든 천살단은 이차 통문에서 명확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무림은 혈마가 날뛰고 있어도 차분히 대처했다. 천살단이 움직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