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三章 공적(公敵) (3)
해자수는 인문(忍門) 술사(術士)다.
자객, 살수와 술사가 다른 점은 술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미행, 잠복, 추격 등등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인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유명한 문파다.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확신했는데, 알고 보니 뒤쫓고 있었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언제 따라왔어? 어떻게 온 거야? 도대체 무슨 수법이야?
인문 술사는 사술과 방술(方術)을 총망라해서 구사한다.
은밀히 뒤쫓을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떤 짓도 다 한다.
호발귀는 해자수가 술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뒤를 밟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호발귀가 무인 출신이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도천패나 등여산은 아직도 해자수가 그저 발 빠르고 눈치 빠른 사람인 줄만 안다.
호발귀는 무인이기 이전에 배수다.
소매치기! 눈치 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어떤 쪽에서 살펴보면 배수의 움직임과 술사의 움직임이 비슷하기도 하다.
그래서 해자수에게 난데없이 귀무살을 공격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도초를 미행하라고 부탁하기도 한 것이다. 괜히 무턱대고 한 말이 아니다.
해자수는 토초를 미행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해자수가 미행하고자 해서 뒤쫓지 못할 사람은 없다.
‘하! 이런 곳에!’
혈천방 본방은 진령산맥(鎭嶺山脈)에 있었다.
본방 안쪽까지 따라가지는 못했다. 토초가 본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보고 물러섰다.
진령산맥 안쪽에 도읍이 세워져 있다.
족히 사오천 명은 머물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읍인데도, 인근 사람들은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만큼 혈천방은 용의주도하다.
‘들어가면 잡힌다!’
인문 술사의 직감이 작동했다.
상대는 자신처럼 기척을 전혀 흘리지 않고 숨어 있다. 대단히 뛰어난 경계망이다. 경계서는 무인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경계망이 좋다는 거다.
이런 곳은 들어가는 게 아니다.
‘됐어. 본방을 알았으니 된 거야.’
스르르릇!
해자수는 미련 없이 진령산맥을 빠져나왔다.
“내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니까. 어떻게 그런 놈하고 엮여서는. 앞으로도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말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하나?”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그냥 이대로 그냥 도망쳐버려? 아휴! 그럼 우리 아씨는 또 어떻게 하나. 내가 없으면 불쌍해서 어떻게 살아. 아이고! 아씨도 참 이상한 놈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해자수는 일부러 툴툴거렸다.
혈천방 본방을 찾았다는 희열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딴생각을 일으켰다.
혈천방 본방이 진령산맥에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다.
진령산맥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지극히 은밀한 곳에 세워져 있어도 모자랄 판에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곳에 세워졌다.
다만 본방 근처만은 사람 발길을 차단했다.
본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푯말이 세워져 있다. 안쪽은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사유지이니 출입을 금한다는, 정말 세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푯말이다.
입곡자사(入谷者死)와 같은 끔찍한 문구는 전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부 들어간 사람이 있겠지만,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저 본방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곧 사라진다.
혈천방은 자주 꼬리를 자르고 도주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꼬리 자르기를 한다.
본방이 사라지기 전에 호발귀를 불러올 생각이다. 설마 그 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
해자수는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제길!”
해자수는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 분위기가 이상하다. 너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새들이 울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소리를 억제했다. 그래서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게 걸려들었네. 어디서 잘못했지?’
해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초를 미행할 때까지는 아무런 탈도 없었다. 그러면 빠져나오는 길에 발각되었다.
누구에게 발각되었는지, 자신이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숲 전체에 무인이 쫙 깔려 있다. 포위까지 되어서 빠져나갈 곳이 없다.
“아이고! 내 이놈의 팔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해자수는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서 흙먼지를 딱딱 털었다.
“거 누군진 모르지만 나 항복! 항복이니까. 나와서 목을 치든 말든 마음대로 하셔. 뭐 이만큼 살았으면 많이 살았지 뭐. 내가 처자식이 있기를 해, 숨겨둔 재산이 있어? 아쉬울 게 전혀 없어요. 그러니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라니까.”
해자수는 허리춤에서 죽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그때,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어! 어!”
해자수는 깜짝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사내를 가리키기만 했다.
걸어오는 사내는 왼쪽 눈이 없다. 검은 안대로 왼쪽 눈을 가리고 다닌다.
안대 속으로 기다란 검상이 보인다.
왼쪽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칼자국이 깊이 패어 있다. 그 상처에 눈까지 잃어버렸다.
촌장이 두 번째 자식 이자(二子) 팽운(彭芸)이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가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아이고. 내가 음문촌에 가봤는데 거기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그래서 헛걸음만 잔뜩 하고는……”
“능청 떨지 마라.”
팽운이 싸늘하게 말했다.
“네놈이 토초 뒤를 밟은 거, 다 알고 있어.”
“아!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 뭐 미안! 이게 사람이 살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별짓을 다 하게 되더라고. 그럼 뭐야, 이제 나 목을 내놔야 하나?”
“능청 떨지 말라고 했다.”
팽운이 싸늘하게 말했다.
해자수는 어깨를 움츠리며 움찔거렸다. 누가 봐도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하다.
‘이거 아주 잘못 걸렸는데.’
해자수는 이자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자는 항상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멸시한다. 손속은 매우 잔인하다. 이자가 죽이기로 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자신을 노리고 왔으면 자신도 오늘 죽는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발버둥을 쳐도 필요 없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해자수는 그런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일찍 포기했다.
“그래도 혈천방에 몸담은 거보다는 은문춘이 낫지 않나? 나는 아무래도 음문촌이 나은 것 같아.”
“그래?”
“음문촌 사람들을 딱 봤을 때는 아! 이 사람들 정말 자유롭다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런데 혈천방은 아니야. 너무 살벌해. 촌장님이 왜 거길 가셨지?”
“홀리는 잘 있나?”
“아! 잘 있지 뭐. 아씨야. 뭐 솔직히 아씨 성격이 워낙 거칠 게 없어서 옆에 있는 사람이 피곤하지 아씨야 뭐.”
”토초 뒤를 밟으라고 시킨 게 홀리냐?“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뭐. 호발귀가 시켰던 아씨가 시켰던.”
해자수는 은근슬쩍 호발귀 말을 꺼냈다. 호발귀가 시켰다고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해자수는 음문촌 사람들에게 숨기는 게 없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았다. 지금 이렇게 적대관계로 만났지만 그래도 해자수에게는 이자가 반가웠다. 이상하게도 세상 사람들하고는 잘 맞지 않고 음문촌같이 궁벽한 산골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하고는 죽이 잘 맞았다.
해자수는 이런 인연을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산다.
이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다음에 또 토초를 미행하면 죽는다.”
“엥? 그럼 지금은 살려주는 거고?”
“방주가 호발귀를 불렀다. 그러니 본방이 발각되는 것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네 미행, 헛된 짓이었다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는 놔주기로 했다.”
“방주가 호발귀를? 이거 느낌이 쎄한데?”
“네 느낌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고. 하여간 다음에 또 토초 뒤를 밟을 때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알았어. 다시는 미행 같은 것 안 해. 에이 나도 양심이 있지. 어떻게 가족같이 지냈던 사람을 두 번이나 뒤를 밟나.”
“한 번은 괜찮고?”
“한 번도 안 되지. 그래서 안 하려고 했는데 에이 참. 내 입장도 좀 봐줘.”
“가라.”
이자가 뒤돌아서 걸어갔다.
이자가 누군가를 놔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녕 이런 적이 없었다.
해자수는 자신이 음문촌 사람들에게 정말 잘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같이 강퍅한 자가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정을 많이 쏟았었다.
“미행은 미안. 하지만 나도 선택을 했으니까 아씨 편을 들어야지. 호발귀가 음문촌을 공격한다는 거도 아니고 혈천방을 공격한다는데야 어쩔 수 없잖아.”
해자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자는 벌써 멀리 걸어가도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어쨌든 그것 역시 네가 한 선택이니까. 우리 인연은 끝났지. 다음에는 죽일 것이다.”
이자가 해자수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한마디 더 했다.
이자 말대로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정말 죽는다. 이자는 결코 두 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음문촌 사람 중 누구와 만나도 죽는다.
“휴우!”
해자수는 한숨을 쉬면서 신발을 신었다.
인연이라는 꺼풀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아!”
해자수는 걸음을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겠다.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니다. 혈천방에 술사들이 있다. 술사의 움직임은 술사만이 눈치챌 수 있다.
자신은 혈천방 깊숙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전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봤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도 발각되었다. 술사를 탐지할 수 있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진사(微震絲)!
미진사는 땅에 깔아놓는 가는 철사를 말한다.
사람이나 짐승이 건드리면 작은 떨림을 일으켜서 신호를 보내게 되는 장치다.
미진사는 술사들이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온 산에 미진사를 깔아놓을 수는 없다. 은자들이 숨을 만한 곳을 골라야 한다. 몸을 숨기기 적당한 곳에 살짝 깔아놓고 건드리기를 기다린다.
미진사는 그런 곳에만 한정적으로 설치한다.
혈천방에 술사가 있다면 충분히 발각될 수 있었다.
혈천방을 보자마자 들어가면 발각된다는 까닭 모를 경계심이 작동했는데, 그때 이미 들켰다.
“우리 말고 이 정도로 미진사를 깔아놓을 수 있는 놈들이라면…… 혹시 해월류(海月流)? 킥! 이거 재밌게 됐네?”
해자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해월류는 동영(東瀛) 인자(忍者)다. 동영에 사대 인종(忍宗) 중 해월류만 중원으로 넘어왔다. 혈마가 중원을 피로 물들일 때니까, 대략 이백여 년 전이다.
중원에 뿌리를 내린 해월류는 인문 술사들을 가차 없이 추격, 살해했다.
인문은 살상을 배제하는데, 해월류는 살상에도 탁월한 조예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만나기만 하면 백전백패다. 부딪치는 족족 죽어 나갔다.
당시, 삼백여 명이나 되며 인문 술사들은 완전히 박살 났다.
술사 대부분이 죽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두 명만이 은밀히 숨어서 단맥으로 대를 이었다.
벌써 이백 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일이지만, 관계자들은 잊지 못한다.
“해월류가 있었단 말이지? 그러면 이 싸움은 나도 전격적으로 가담해야겠는데? 더는 방관자가 될 수 없잖아. 하! 이거 집안싸움이 된 건가?”
해자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당시 해월류는 혈천방에 흡수, 통합된 듯하다.
그들의 뿌리가 혈천방에서 계속 내려오는 것 같다. 해월류라는 이름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 아니면 무슨 전(殿)이나 대(隊)로 형태가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외형상 변화는 있었겠지만, 속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해월류가 침입자를 발견하고 이자에게 말했다.
그런 면을 보면 혈천방에 흡수 통합된 것이 아니라 음문촌에 뿌리를 내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혈천방 사람이면 혈천방에 말해야지 왜 이자에게 말하겠나.
정말 그렇다면 음문촌 사람들은 자신만큼 뛰어난 술사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서 정보를 샀다. 정보를 받아들이던 곳이 두 군데였던 셈이다.
“하! 이거 배신감 느끼네. 정말 해월류가 음문촌에 뿌리내렸다면 이건 가만있지 못하지. 제길! 음문촌이야, 혈천방이야. 좌우지간 해월류가 있긴 있었어.”
해자수는 길을 재촉했다.
당장 홀리를 만나서 물어볼 생각이다. 홀리라면 사실대로 말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