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二章 구혼음소 (5)
“자!”
홀리가 서신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뭔데?”
“구혼음소. 모두 천이백팔 자야. 외워봐. 아! 다른 기대는 하지 마. 지금 이건 혈마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네 기억력이 워낙 좋다고 해서 시험해보는 거야.”
호발귀는 무심히 서신을 받아들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모르겠다. 이게 정말 글자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다.
혈마록도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낯설었다.
장진 스님이 해독해 주지 않았다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뜻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구혼음소는 혈마록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는다.
“이걸 외우라고?”
“응.”
“무조건?”
“무조건. 다 외웠으면 말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볼 거야.”
말은 홀리가 했지만, 다른 준비는 등여산이 했다.
등여산이 향 한 자루를 땅에 꽂고 불붙일 준비를 마쳤다.
“저거 다 탈 동안에 외워야 하는 건가?”
“맞아.”
“이거 혹시 내기야?”
“좌우지간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향 한 자루가 다 탈 때까지 이걸 외우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원망을 들을 거야. 또 타기 전에 외워도 원망을 듣겠지? 알아서 해.”
“난 무조건 원망을 듣는 거잖아?”
“불붙여?”
이번에는 등여산이 말했다.
“아니, 책사까지! 나한테 왜들 이러지?”
“그동안 네가 우리 속 많이 썩였잖아. 그러니 이번에는 네가 속 좀 썩어봐. 불붙일까?”
홀리가 말했다.
등여산이 땅에 꽂은 향은 장향(長香)이다. 끝까지 타는 데 반 시진 정도 걸린다.
솔잎과 강황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향이 청아하다.
등여산이 아침 운공을 할 때 절반을 꺾어서 단향(短香)으로 사용하는 것을 봤다.
단향이 타는 시간은 사분지 일 시진이다.
“나 아직 저녁도 안 먹었는데……”
“자. 먹으면서 외워. 배고프면 안 되지.”
도천패가 잘 익은 멧돼지 고기를 듬뿍 떼어서 손에 쥐여 주었다.
“보위까지? 끄응!”
호발귀는 멧돼지 고시를 손에 들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기를 씹으면서 말했다.
“좋아. 해보지 뭐. 불붙여.”
구혼음소!
오랜만에 편한 곳에 신경을 써본다.
비급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기가 어떻고, 역천금령공이 어떻고 하는 부분도 아니다. 이상한 글자를 외우는 것이 고작이다.
구혼음소는 처음 보는 괴상한 그림이다.
혈마록을 외울 때도 낯설었지만, 구혼음소는 훨씬 복잡한 도형처럼 보인다.
‘훗! 세상에 혈마록 말고 이런 글자가 또 있었네.’
호발귀는 서신을 위아래 구분을 해서 펼쳤다.
홀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홀리가 말해줬기 때문에 안다.
마치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간신히 위아래만 구분한 모양새다.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글자를 어떻게 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다. 혈마록을 외우듯이 그림으로 찍어서 각인시키면 된다.
호발귀는 손에 들린 고기를 씹어먹으면서 구혼음소를 들여다봤다.
항상 이런 일만 하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죽이는 일이 아니라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렇게 장난이나 하면서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구혼음소를 한 자 한 자 외웠다.
혈마록을 외우듯이 글자를 그림으로 찍어서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글자를 외운 후에는 반드시 확인하다. 확실히 외웠는지 살핀다.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그래서 외웠다는 확신이 들면 거침없이 치워버린다.
혈마록을 외울 때는 비급을 태웠었다.
구혼음소는 종이 한 장에 적혀 있어서 태우지 못한다. 대신 종이를 접었다.
향을 쳐다봤다.
백 자 정도를 외웠는데 십 분의 일 정도 타들어 갔다.
아무래도 향이 다 타기 전까지 구혼음소를 외우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호발귀는 구혼음소에 집중했다.
손에 들린 고기를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손에 고기가 들린 것도 잊어버렸다.
주변을 모두 잊고 글자 속에 몰입되었다.
“무서운 집중이네. 저런 식으로 혈마록을 외운 거야?”
당홍이 감탄했다.
“정말 굉장하네요. 저런 집중은 처음 봐요. 저만한 집중력으로 학문을 했다면 벌써 대학사가 되고도 남았겠어요.”
등여산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 웃고 떠든다. 상당히 시끄럽다. 하지만 호발귀는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서신만 있는 줄 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이 짙어갔다.
모닥불이 흘리는 빛은 호발귀가 보고 있는 서신을 간신히 비춰줄 뿐이다.
그래도 호발귀는 답답해하지 않았다. 서신을 읽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듯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서신을 향해 얼굴을 바싹 들이밀지도 않았다.
“우리 투심문이 말이야. 아무나 받아들이고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정말 똑똑하지 않으면 안 받는다니까. 내가 그 첫 번째 대상이었잖아. 나도 이 머리가……”
“됐어요. 됐어.”
당홍이 도천패의 말문을 막았다.
향 한 자루가 다 탔다.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외우지 못했다. 반 시진이 지났는데, 여전히 서신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호발귀는 서신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호흡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두 눈만 반짝반짝 빛을 쏟아냈다.
“내가 이겼지? 자! 돈들 내! 이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반 시진에 외운다는 건 어림없다니까.”
홀리가 손을 내밀었다.
등여산이 전낭에서 스무 냥을 꺼내 건넸다.
“쩝!”
도천패도 군말 없이 돈을 내주었다.
당홍은 어깨를 으쓱 그렸다.
“나 돈 없어. 나중에 갚을게.”
“언니 꼭 갚아야 해!”
“걱정하지 마. 안 떼어먹어.”
“문주 놈! 다 끝났어. 이리 와서 고기나 뜯어. 그렇게 머리 좋다면서 그걸 못 외우냐!”
도천패는 핀잔을 주었다.
사람들이 다시 모닥불에 모여앉았다.
내기는 홀리가 이기면서 끝났다. 그러니 다시 잠시 중단했던 저녁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호발귀는 구혼음소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구혼음소를 읽기 전, 혈마록은 각각 다른 무공을 형성한 채 존재했다.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가 양극단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귀화미요공과 마영심도가 대치하고 구뢰마권과 소요귀명검법이 대치하며, 혈천도법과 무정삼절이 대치한다.
역천금령공 쪽 무공과 이령귀화 쪽 무공이 대치한다.
처음 원정을 이령귀화에게 맡겼다. 역천금령공을 외부로 발출해서 무공을 사용했다.
그 결과, 혈기가 들끓었다. 혈마가 될 뻔했다.
간신히 깨달음을 얻어서 역천금령공으로 원정, 생기를 보호했다. 그리고 이령귀화를 본신 진기로 삼아서 무공을 펼쳤다. 모든 무공의 바탕에 이령귀화가 깔렸다.
그 결과, 혈기가 안정되었다.
그래서 이제 됐다 싶었는데, 다시금 혈기가 들끓는다.
이게 호발귀의 현재 상태다.
그런데 구혼음소를 읽자, 느닷없이 무공 여덟 개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모든 무공이 하나로 버무려졌다.
가장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대치한 무공은 혈천도법과 무정삼절이다.
두 무공이 제일 먼저 희석되었다.
혈천도법과 무정삼절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이 나타났다.
호발귀는 ‘무엇’의 실체를 잡지 못했다. 도법도 아니고 검법도 아니다. 신공도 아니다. 손발을 어떻게 놀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어떤 무공이 탄생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무공이 사라지고, 전혀 낯선 무공이 생겼다.
호발귀가 펼칠 수 없는 무공이다.
무공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펼쳐야 한지 전혀 모르겠다. 마치 구혼음소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무공이 존재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무공인지는 모르겠다.
‘이거 혈마록이다!’
호발귀는 구혼음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잘못된 거 같아.”
등여산이 호발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잘못될 리 없는데, 왜 저러지?”
홀리도 호발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호발귀는 손에 다 식어버린 멧돼지 고기를 든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호발귀는 숨도 쉬지 않는다.
마혈이 제압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비정상이다.
정신을 잃거나 몸이 굳은 것은 아니다. 구혼음소를 쳐다보는 눈만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구혼음소, 어떤 내용이야?”
등여산이 홀리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혈마후가 되는 주문이라는 것밖에는.”
홀리가 당연한 대답을 했다.
구혼음소 천이백팔 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각 글자가 어떤 소리로 불리기는 한다. 하지만 소리에 뜻은 없다. 동물들의 신음과 흡사하다. 소리 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어떤 뜻인지 구분되지는 않는다.
구혼음소는 신호 체계다. 음률이다.
글자마다 강약이 있고, 높낮이가 있다. 글자 사이에는 길고 짧은 간격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물려서 박자가 된다.
이 박자가 딱 들어맞아서 정확한 신호를 보내야만 혈마를 강타할 수 있다.
그러니 구혼음소는 세상에 얼마든지 내놔도 무방하다.
박자를 모른다면 일자무식 농부에게 사서삼경을 내주는 것과 진배없다. 사서삼경은 나중에라도 글을 배우면 뜻을 파악할 수 있지만, 구혼음소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박자까지 아는 방법은 없다.
박자는 철저히 구전(口傳)한다.
실제로 음문촌 사람들에게 구혼음소 글자는 비밀이 아니다. 거의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읽을 수도 없고, 박자는 생각하지도 못하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실제로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
홀리도 구혼음소를 익힐 때 땅에 그리기도 하고 조각으로 새기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온갖 짓을 다 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을 가져봤자 필요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무런 염려 없이 구혼음소를 내민 것이다. 단순한 재밋거리로 내기를 한 것이다.
“뭔가 찾은 것 같지?”
“구혼음소를 해독했다는 거야?”
“혈마록도 해독했어.”
“아냐, 이건 말이 안 돼. 구혼음소에는 뜻이 없어. 구혼음소는 박자란 말이야!”
홀리가 어처구니없어서 등여산을 쳐다봤다.
“좌우지간 뭔가 찾은 것 같은데.”
등여산이 호발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당홍이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난 이거…… 느낌이 좋지 않아. 구혼음소는 혈마를 노예로 만드는 주문이라며? 호발귀가 뭔가를 찾았다면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저거 바로 치워버릴까?”
당홍이 서신을 가리켰다.
홀리와 등여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서신을 치우는 게 좋은지, 치우지 않는 게 좋은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구혼음소가 혈마에게는 아주 좋지 않은 주문이라는 것이다.
“일단 치울까?”
홀리가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등여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발귀가 구혼음소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고 해도 좋지 않을 게 뻔했다.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천패가 재빨리 신형을 날려서 서신을 가로챘다.
쒜에엑!
순간, 호발귀가 움찔거렸다.
서신이 치워지자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호발귀는 눈이 뻑뻑한지 잠시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휴우!”
호발귀는 긴 한숨도 토해냈다.
일단 겉모습은 정상이다. 이성을 잃는다거나, 혈기가 치밀지는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홀리가 재빨리 다가가서 물었다.
호발귀가 말했다.
“구혼음소 다 외웠는데, 누가 이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