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二章 구혼음소 (4)
“어떻게 된 거야?”
홀리가 대뜸 물었다.
“아무것도. 그냥 나는 가만히만 있었어.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여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혈기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해. 말해봐. 처음부터. 어떻게 된 건지.”
홀리가 눈빛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등여산은 홀리가 호발귀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안다. 호발귀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여자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결코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었을 때, 자신은 목숨을 걸었다.
그때 홀리도 목숨을 걸었다.
만약 일이 계속 진행되어서 자신이 호발귀에게 죽고, 호발귀가 귀색무에 중독됐다면, 홀리는 틀림없이 혈마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자진했을 것이다.
홀리는 결코 혼자 살 여자가 아니다.
그래서 호발귀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꽉 껴안고 놓지 않았던 일, 그리고 불쑥 깨어난 일, 자신이 한 일이라거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준 것뿐.
홀리는 이야기를 다 듣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것뿐이야?”
“정말이야.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촌음명이 정말 효과에 있나? 그것 때문에 호발귀가 깨어났나? 영향을 준 건 그것뿐인데.”
“전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잘 모르겠어. 효과를 봤다는 느낌이 안 들었어.”
홀리가 등여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 머리 좋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데.”
“천살단 책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좋아. 네 머리를 믿고, 지금부터 구결 하나 가르쳐 줄게. 외워.”
“구결?”
“음률이야. 중간에 한 박자라도 틀리면 안 돼. 모두 천이백팔 개밖에 안 되니까, 반 시진이면 되지?”
홀리는 천이백팔 개를 외우는 데 삼 년이 걸렸다.
“구결이라는 혹시 구혼음소?”
“역시 책사는 머리가 좋다니까. 이건 음문촌 여자들만 아는 건데, 내가 특별히 선심 썼다. 나한테 배운 후에 호발귀가 혈마가 되거든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해.”
등여산은 홀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홀리가 어떤 마음에서 구혼음소를 전수하려는지 짐작한다. 자신에게 귀색혼령대법을 알려주고 떠나려는 것이다. 호발귀를 포기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구혼음소는 배울게.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그만큼 호발귀에게 안전장치가 되니까. 배울게. 배우는데 떠날 생각은 하지 마.”
“장난해? 너 아니면 나, 둘 중 한 명은 포기해야 해. 잘 알면서. 왜? 내가 불쌍해?”
“아니. 천하에 홀리를 불쌍하게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럼 뭐야? 괜히 하는 말이야? 웃기지 말고, 간다고 할 때 보내. 내가 사악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감당할 수나 있어?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감당할게.”
홀리가 등여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네가 가서 호발귀가 혈마로 변하지 않는다면 보내줄게. 아니, 내가 가라고 등 떠밀게.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호발귀, 언젠가는 혈마가 돼.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
홀리는 인상만 찡그렸다.
등여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끼리 내가 좋다, 네가 좋다고 말하는 게 웃긴 거지. 우리 끝은 확실히 좋지 않을 거야. 차라리 호발귀를 떠나는 게 끝이 좋아.”
“그렇다고 사내 하나를 둘이 가질 수도 없잖아.”
“네가 갖는다는 게…… 그거라면 네가 해도 좋아.”
“뭐?”
“난 네가 등 떠밀어도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가라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난 너도 옆에 있었으면 해.”
등여산은 순전히 호발귀를 위해서 양보하고 있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었을 때,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때, 홀리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을 테니까.
등여산은 오직 호발귀의 죽음을 위해서 연인까지 양보하는 것이다.
“넌 참 재수 없는 계집애야.”
“그렇지?”
“참! 너 호발귀에게 겁탈당했다며?”
“그 말을 믿어?”
“아니. 안 믿어.”
“그때도 지금처럼 혈마가 되었는데, 살수를 피하다가 옷이 찢어졌어. 그때는 촌음명이 통했는데.”
“그때도 널 알아봤어?”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확실히 호발귀 마음에 있네. 축하. 내가 가고 안 가고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구혼음소를 배워. 자, 지금부터 읊을 테니까 음률을 잘 들어.”
“지금 바로?”
“바로 하지 뭐. 미룰 거 있어? 타악 투 파.”
홀리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주문을 외워나갔다.
호발귀는 낯선 생기를 탐지했다.
이상한 것은 모두 낯선 생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천패, 당홍, 홀리, 등여산은 호발귀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각기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들은 잠자면서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탐지한다.
누군가가 이들을 미행하려면 적어도 삼십 장 이상 거리를 벌려야만 발각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위에 퍼져있는 생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히 생기가 들끓고 있어. 공격할 의사는 없고, 감시가 목적인 것 같은데. 음! 포위.’
푸른 기운이 사방에 깔려 있다.
천만다행이다. 이들이 따라붙지 않았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한다.
‘이렇게 따라붙어 주니 정말 다행이지.’
호발귀는 해자수에게 갔다.
“이 근처에 토초가 있어요.”
“토초가? 그 애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그렇게 당하고도. 이번에는 또 어떻게 당하려고 그럴까.”
해자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혈마는? 혈마도 있고?”
“아니, 혈마는 없어요.”
“혈마도 없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한 거 아냐? 뭔 여자 간덩이가 이렇게 커? 왜 자꾸 이런 짓을 하지? 자꾸 선을 넘는 걸 보면 죽을 때가 다 됐나 봐.”
“내가 토초를 드러낼 겁니다.”
“그래야겠지. 근처에 있는 걸 알면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그럼 토초가 도주할 텐데, 미행을 해줘요.”
“뭐? 안 돼! 안 돼! 내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어. 차라리 직접 따라붙는 게 어때?”
“보다시피 난 만인 앞에 드러나 있잖아요. 내가 사라지면 혈천방이 당장 활동 중지할 겁니다. 그럼 토초를 따라붙는다고 한들 본방을 알아내지는 못해요.”
“나는 안 되는데……”
해자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북북 긁었다.
“다른 사람은 안 될까?”
해자수는 토초를 미행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해자수는 음문촌 사람들 모두와 안면이 있다. 홀리를 쫓아서 음문촌에 등을 돌렸지만, 아는 사람들까지 해코지하는 것은 마뜩잖을 것이다.
“우리 중에 미행을 제일 잘하셔서 부탁드렸습니다. 곤란하시다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호발귀가 일어섰다.
“쩝! 누가 곤란하대? 무공이 딸리니까 중간에 발각될까 봐 그렇지. 뭐 어떻게 한번 해보지 뭐. 내 무공으로는 토초를 따라붙는 게 여간 힘겨운 게 아닌데.”
“그럼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술이나 단단히 사. 내가 진짜 엄한 데 따라다니면서 고생이 많다. 에구!”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정말 크게 한 번 내죠. 우리 투심문 돈은 많잖아요.”
“염병! 돈 많다고 하면서 돈 쓰는 꼴을 못 봤네. 말로만 돈 많다고 하지 말고 돌아오면 정말 한턱 내. 여자들 빼고 남자들끼리만 한잔하자고. 저것들 기가 워낙 세야지.”
해자수가 엉덩이를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등여산은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한다. 어떤 요리를 해도 모두 태워 먹는다. 도천패가 멧돼지를 잡아 왔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손도 못 대고 있다.
“에휴! 내가 미친다. 당번을 정하면 뭘 하나.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지. 저리 비켜. 곱디고우신 분은 그냥 만들어주는 음식이나 받아드셔.”
“죄송해요.”
등여산이 얼굴을 붉혔다.
“혹시 이거 술책 아냐? 음식 안 하려고 꾀부리는 거지?”
당홍이 등여산을 쏘아봤다.
“옆에서 배울게요.”
“지금 배워서 언제 써먹게. 고기는 떠줘야지! 나보고 가죽까지 벗기라고!”
당홍이 도천패를 향해 소리쳤다.
“하! 난 잡아 오는 데까지만…… 알았어. 하면 되지 뭐.”
도천패가 구시렁거리면서 작은 칼을 잡았다.
“호발귀는?”
“그러게? 그러고 보니 문주놈이 안 보이네? 홀리하고…… 아닌데? 홀리는 저기 있는데?”
도천패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홀리는 한쪽에서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다. 일단 음률은 나중에 배우고 주문부터 알려주고 있다.
“혼자 할 일이 있대요.”
“혼자? 하! 문주놈이 혼자 뭔가 한다고 하면 겁부터 더럭 난다니까.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할지.”
그때다. 환청인지 모르겠는데, 바람결에 사람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악!
매우 짧고 강렬한 비명이다.
“이거 비명이지?”
당홍이 도천패를 보며 말했다.
도천패는 대답 대신 등여산을 쳐다봤다.
“주위에 혈천방 무인들이 깔린 모양이에요. 토초도 함께. 무인들은 치우고, 토초는 드러낸다고.”
등여산이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난 아무것도 몰랐지? 나만 몰랐나?”
“나도 몰랐는데?”
당홍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보위님은 사냥 나가시고, 언니는 잠자고. 그리고 이건 별일이 아니니까 말 안 했어요. 우린 저녁이나 먹고 있으면 돼요. 식사 시간에는 맞춰서 온다고 했는데.”
커억!
또 비명이 들려왔다.
확실히 사람 비명이 맞다. 잘못 듣지 않았다. 주위에 꽤 많은 무인이 퍼져있는 듯하다.
“제길! 사냥할 때도 몰랐는데.”
도천패가 투덜거리면서 멧돼지 가죽을 벗겼다.
“혈천방에 추격, 잠입, 고문. 이런 것들만 특별히 배운 자들이 있어요. 형전(刑殿) 소속 무인들인데, 아마 그 자들인 것 같아요. 그럼 모를 수 있어요.”
홀리가 글을 적으면서 말했다.
천살단 십육비자와 같은 부류의 무인들이다.
“그럼 마을에 매복해 있던 무인도 형전 무인들인가? 귀무살은 분명히 아니었는데.”
“아마 그럴걸요?”
홀리가 글을 다 썼는지 세필을 대롱에 넣었다.
그녀가 다가와 등여산에서 종이를 내밀었다.
“자. 천이백팔 자밖에 안 돼. 천자문에서 조금 넘어. 오늘 밤 안으로 다 외울 수 있지?”
“넌 내가 호발귀로 보이니?”
“무슨 말이야?”
“호발귀, 혈마록을 하룻밤 새에 외웠잖아.”
등여산 대신 도천패가 말했다.
“혈마록을 하룻밤에? 그게 가능한가? 혈마록 여덟 권이나 되잖아? 그걸 다 외워?”
홀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외운 건 내가 확인했어. 천살단에 잡혀 왔을 때, 일 권을 적어줬거든. 확인해 봤는데, 한 글자도 안 틀렸어.”
“가만. 그럼 이따가 이거 호발귀에게 외워보라고 할까? 우리 내기할까? 혈마록을 밤새 외웠다면…… 내기는 ‘한 시진 안에 외운다.’로 하고, 난 외운다는 것에 열 냥.”
“한 시진이면 너무 길어. 반 시진. 열 냥 받고 열 냥 더.”
등여산이 말했다.
“그 정도로 자신 있어?”
“문주놈이 다른 건 몰라도 무공하고 뭐 외우는 데는 탁월하지. 나도 반 시진에 스무 냥.”
도천패가 끼어들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난 지아비 따라서.”
당홍도 웃으면서 말했다.
“뭐야? 그럼 나 혼자 전부 뒤집어쓰는 거야? 나 돈 없어. 왜 이래, 다들!”
“내기는 네가 먼저 하자고 했잖아. 스무 냥 벌면 옷이나 사 입어야겠다. 이 옷은 너무 오래 입었어.”
등여산이 홀리를 약 올렸다.
홀리는 자신이 적은 구혼음소를 보면서 할 말을 잃어다.
‘말도 안 돼. 난 이거 외우는 데 삼 년 걸렸는데.’
속으로는 할 말이 많았다. 물론 자신은 음률까지 터득하느라고 오래 걸렸다. 등여산에게 구혼음소를 알려주고 있지만, 그녀가 언제 다 배울지 까마득하다.
그런데 호발귀가 반 시진 만에 외운다고?
‘역시 혈마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그 정도 머리가 있으니까 혈마가 되지.’
아악!
멀리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