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二章 구혼음소 (2)
등여산은 호발귀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왔다.
호발귀가 꽉 껴안은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신형을 날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호발귀는 움직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등여산은 묵직한 돌덩이를 껴안고 움직인 듯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긴 숨부터 토해냈다.
“하악!”
숨을 크게 쏟아냈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호발귀가 너무 세게 껴안았다.
엄밀히 말하면 애정 표현으로 안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맹수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고 있듯이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다.
가슴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었다.
등여산은 사내와 껴안아 본 경험이 없다. 이것이 첫 경험인데, 좋은 상황이 아니다.
“후유!”
등여산은 큰 숨을 내쉬며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혼몽한 상태다. 그런데도 저항하지 않는다. 등여산을 죽일 생각도 없다. 그녀를 꼭 껴안고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등여산은 산에 들어와서도 호발귀를 떼어놓지 못했다.
호발귀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촌음명은 사용하지 않았다.
‘계속 뇌를 가격해야 제정신으로 돌아올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정상으로 돌아오게끔 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가 벌어질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 여기 앉아.”
등여산이 호발귀는 넓은 바위에 앉혔다.
호발귀는 바위에 앉아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꼭 껴안고 거친 숨만 쉬었다.
“하악! 학! 끄으윽!”
숨소리가 매우 거칠다. 짐승이 먹이를 잡아놓고 진이 빠져서 헐떡이는 숨소리 같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호발귀가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전히 정신이 똑 떨어진 상태가 아니다. 혈기에 침범당해서 살기를 무한정 뿜어내고 있다. 지금도 혈마가 되기 위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귓가에 들리는 거친 짐승의 울부짖음이 그 증거다.
등여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이 호발귀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안다.
호발귀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껴안고 있을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한다. 언제 어느 때 살수를 써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등여산은 호발귀가 무섭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꽉 껴안고 있는 것이 좋기도 했다.
등여산이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태산파 출신이잖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에서 자랐거든. 겨울이 되면 온 산이 하얀 눈으로 뒤덮이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꼭 하얀 솜을 깔아놓은 것 같았어. 그래서 솜처럼 푹신 거릴 줄 알고 벌렁 드러누웠다고 추워서 죽는 줄 알았잖아.”
“끄르르륵!”
호발귀는 변한 게 없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건 짐승 소리만 흘린다.
“겨울 산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밖에서 보면 되게 좋아 보이지만, 까딱 잘못하면 죽어. 정말 무서워. 눈사태라도 한번 나면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그녀가 겪어왔던 경험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생각해 보니 호발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절거린다. 남들은 늘 하는 이야기들인데, 뭐가 바쁘다고 이런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나중에 우리 태산 한 번 가보자. 정말 좋아.”
* * *
염원이라는 말이 있다.
최후의 순간이 닥쳐도 이것만은 반드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있다.
강렬하게 원하는 것!
염원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호발귀의 염원은 등여산이 웃는 것이다.
원래 등여산은 맑고 밝은 여자다. 활기차서 말괄량이에 속하는 여자다.
그런데 자신과 만난 후부터 웃지 않는다. 매일 우울하다. 매일 심각하고, 매 순간 고민한다. 두 눈에는 항시 염려가 가득 차 있다.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등여산의 웃음을 다시 찾아주고 싶다.
그게 염원이다.
등여산을 연모한다거나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바로 그 마음이 연모였다.
십자탈명을 전개하는 순간 슬픈 미소를 봤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가슴은 찢어지고 있다. 슬픈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씁쓸한 웃음, 웃는 듯 마는 듯 살짝 웃는 옅은 웃음.
요즘 들어서 등여산에게서 자주 보는 웃음이다.
‘등여산!’
이 웃음을 흩트려 놓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밝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슬픈지 모르겠지만, 걱정 같은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활짝 웃으면 안 될까?
호발귀는 웃음을 흘리는 사람이 등여산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호발귀 눈에 들어온 것은 웃음이었고, 그 웃음은 가슴 깊은 곳에서 등여산을 지켜주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끌어냈다.
‘등여산!’
호발귀는 등여산을 봤다.
염원이 일어나는 순간 환각인지 환상인지 모르겠지만 등여산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
순간, 검초를 비틀었다.
혈마가 내지른 혈천도법은 중간에서 변형되지 않는다. 토초를 일으키면 초식이 끝날 때까지 한순간에 진기가 흐른다. 그러니 결코 중간에서 멈출 수 없다.
그런데 어떤 힘이 일어났는지 혈천도법까지 비틀었다.
슈우웃!
검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지나갔다.
여인의 어깨에서 확 튀어 오르는 핏방울도 봤다. 물방울처럼 생긴 빨간 방울이 곱게 튀어 올랐다.
‘지켜야 해!’
호발귀는 검을 놓고 여인을 껴안았다.
한순간, 혈마의 살기가 밀려났다. 강력하게 일어난 염원이 살기를 밀어냈다.
하지만 혈기는 곧 반격을 시작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혈기와 염원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호발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녀의 웃음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호해야 할 동체를 껴안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이 작은 동체,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살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품에서 놓치는 순간, 이 동체는 갈기갈기 찢긴다.
귓가에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무슨 말은 하는지 모르겠는데, 등여산의 음성인 것만은 확실하다.
펑펑!
단전이 격타당했다. 그리고 이상한 진기가 밀려왔다. 독맥을 타고 위로 솟구쳐서 뇌를 강타한다.
호발귀는 뇌를 강타한 진기가 촌음명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사실, 촌음명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늘로 변한 진기가 뇌를 격타 했지만, 역천금령공은 이미 뇌를 강력한 막으로 덮어씌운 후였다. 그러니 아무리 가격해도 뇌가 충격받는 일은 없다.
역천금령공이 만든 진기 방어막은 강력하다.
사실, 호발귀를 곤란하게 만든 것은 촌음명이 아니다. 등여산의 속삭이는 음성이다.
세상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마음과 염원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부딪쳤다.
심마(心魔)가 크게 일어났다.
그 순간, 가슴이 진탕되면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촌음명에 타격당해서 피를 토해낸 것이 아니다. 심마를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혈기와 염원의 대치는 꽤 길게 이어졌다.
혈기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역천금령공이 거칠게 일어난다. 이령귀화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갈 것처럼 들끓는다. 손은 연신 구뢰마권을 터트리려고 한다.
반면에 염원은 실체가 없다.
염원은 오직 생각이다. 등여산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것, 그녀에게 웃음을 찾아주고 싶다는 말도 안 될 만큼 간단한 생각이다.
여인의 음성이 잔잔하게 들려왔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틀림없이 등여산의 음성이다. 그녀의 음성이 다른 때와 다르게 매우 편안하다.
‘웃게 해줘야지. 웃게 해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잖아. 부귀영화는 주지 못해도 마음은 편안하게 해줘야지. 이런 거는 할 수 있어.’
호발귀는 작은 동체를 더 힘있게 껴안았다.
* * *
제일 먼저 여인의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여인을 꼭 껴안고 있는 자신도 발견했다.
“엇!”
호발귀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등여산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이 풀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때, 등여산이 호발귀를 꼭 껴안았다.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등여산이 꼭 안긴 채 파르르 떨었다.
호발귀는 떨어지지 못하고 등여산을 안았다.
“정말 돌아온 거야?”
등여산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호발귀를 쳐다보는 것이 두려운 듯 보지도 못한 채 묻기만 했다.
“혈마…… 가 됐었구나.”
“혈마가 된 것도 몰라?”
“……”
호발귀는 대답하지 못했다.
역천금령공이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다. 머리가 띵! 울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한순간에 정신을 놓았다.
혈마 한 명을 죽인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후는 기억에 없다.
“됐어. 생각하지마. 돌아왔으니까 된 거야.”
등여산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서 호발귀를 쳐다봤다.
“여기는?”
“산이야. 안전해.”
호발귀는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산으로 온 것은 이해한다. 한데 산이 너무 멀쩡하다. 자신이 때려 부수지 않았다. 나무도 베지 않았고, 바위도 건드리지 않았다. 전혀 손대지 않았다.
혈마가 산에서 광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혈마에서 벗어났지? 호발귀는 그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등여산은 어리둥절해 하는 호발귀는 보면서 말했다.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전혀 기억이 안 나네.”
“날 죽이려고 했던 것도?”
“그랬…… 나? 미안. 아! 미안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그러니까 내가 미쳤을 때는 내 앞에 나서지 말라니까 왜 나섰어! 나섰으니까 죽을 뻔했지!”
호발귀가 등여산을 힐책했다.
“그런데 날 알아봤어.”
“뭐?”
“혈마가 날 알아보고 검을 멈췄다고. 십자탈명을 전개하다가 뚝 멈췄어. 더는 혈기에 빠지지도 않았고,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전혀 난폭하지 않았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내 앞에 나서지 마. 어떻게 변하게 될지 장담하지 못해.”
“그래서 지금 말하려고.”
“뭘?”
“너, 좋아해.”
호발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등여산을 꼭 껴안고 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호발귀는 다시 떨어지려고 했다.
등여산은 이번에도 호발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네 옆에 홀리가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나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너 좋아해. 네가 혈마가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살고 싶지 않았어.”
“내 옆에 있으면……”
“쉿!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마. 언젠가는 혈마가 되겠지만, 그때까지 옆에 있을게.”
등여산은 호발귀가 지금 이대로 은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발귀는 은퇴하지 못한다. 친구들 복수는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부가 혈천방에 잡혀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싸울 일이 꽤 많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나,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밀어내지 마.”
“넌 천살단 책사, 난 한낱 배수. 너무 차이가 나는데?”
“넌 혈마, 난 천살단에서도 쫓겨난 책사. 너무 차이가 크게 난다. 그렇지?”
호발귀는 등여산을 힘주어 껴안았다.
“반나절쯤 돼. 네게 안겨있었던 게.”
“그렇게 오래?”
“난 다 기억하는데, 넌 억울하겠다. 기억에 없어서. 옴짝달싹 못 하도록 꼭 껴안았는데, 남자와 같이 있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
등여산이 호발귀 품에 안겨들었다.
호발귀는 등여산을 쳐다봤다.
너무 예뻐서 계속 쳐다봤다.
그러다가 살며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코에…… 입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