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154화 (154/500)

第三十一章 본색(本色) (4)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호발귀는 분명히 안다.

터엉! 텅! 텅! 텅!

원정이 거칠게 울린다.

역천금령공이 일어났다. 호발귀가 일으키지 않았는데, 원정 스스로가 깨어났다.

역천금령공은 아주 강력한 상대가 도전해온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래서 원정 자리를 울려서 육신에게 경고를 해주고 있다. 싸울 준비를 하라고 한다.

터엉! 텅!

호발귀는 원정의 울림을 주시했다.

원정 자리가 이 정도로 강력하게 울릴 정도라면 상대는 보나 마나 혈마다.

혈마가 마을에 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역천금령공의 울림이 예전과 다르다. 처음에는 그저 혈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터엉! 터엉! 텅!

몇 번이고 주의를 기울여 봤는데, 역시 이상하다.

울림은 왼쪽과 오른쪽에서 번갈아 울린다. 원정 전체가 진동하는 게 아니라 양쪽에서 번갈아 울린다.

울리는 횟수는 일정치 않다. 지금은 왼쪽에서 두 번 울리고 오른쪽으로 넘어갔다. 오른쪽에서 세 번 울린 후에 다시 왼쪽으로…… 이번에는 한 번만 울리고 오른쪽으로 넘어간다.

좌우에서 번갈아 울린다는 점이 예전과 다르다. 울림 횟수가 일정치 않다는 점도 이상하다.

‘두 명이다! 아니, 어쩌면 두 명이 이상인지도 몰라.’

역천금령공은 혈마의 진기만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원정이 이쪽저쪽에서 울린다는 것은 혈마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호발귀도 원정이 이토록 거칠게 울리는 것은 처음이라서 무슨 내용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전부 처음 가보는 길이다.

누가 해본 적도 없고, 말해주지도 않았고, 혈마록에 적혀 있지도 않았다.

역천금령공이 혈마의 생기를 파악했다. 생기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혈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생기를 드러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생기를 무기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혈천방은 어떻게 혈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혈마를 만들어냈다는 말은 생기를 탐지하고 무기로 만들었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떤 식으로 생기를 읽어냈을까? 좀처럼 읽기 힘든데.

혈천방은 생기가 오염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염된 생기를 가진 사람이 혈마가 된다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생기를 사용하면 혈마가 된다고만 생각한다.

매우 간단한 사고다.

그런 의미에서 혈마후는 매우 소중한 존재다.

혈마후는 미치광이가 된 혈마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해준다. 혈마가 칼이라면 혈마후는 손잡이다.

혈마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렇다면 저 마을은…… 함정이다!

마을에는 혈마만 여러 명 있는 게 아니다. 토초를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무인이 잠복해 있다.

만약, 누군가가 토초를 공격하면 혈천방은 전력을 다해서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혈마가 나서기 전에 혈천방 무인들이 먼저 나서서 보호한다.

호발귀는 자신이 느낀 점을 그대로 말했다.

혈마가 두 명 이상이다. 그러니 싸움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다. 일단 혈마는 자신이 맡겠다. 주변을 부탁한다.

그리고 다른 말도 했다.

“토초는 건드리지 마. 이번에는 놓아줘.”

“토초를 놓아준다고?”

당홍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토초를 공격하면 혈천방이 전력을 다해서 반격할 겁니다. 그럼 희생이 커져요. 혈마가 두 명만 아니더라도 토초를 놓아주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놓아주죠.”

“으음!”

모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토초가 혈마후이니 혈천방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안다. 토초가 없으면 혈마를 부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지금 놓아주면 혈마가 몇 명이나 더 생길지 알지 못한다.

참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호발귀가 놓아주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놓아줄 수밖에.

그만큼 마을 상황이 어려운 것이다. 토초를 놓아주더라도 매복이 강력해서 무척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한다.

“홀리.”

“알았어. 같이 가.”

홀리는 호발귀가 자신을 부르자마자 대뜸 나섰다.

호발귀가 무공을 쓰는 곳에 홀리를 데려가는 이유,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조심…… 해.”

등여산이 들릴 듯 말듯 살짝 중얼거렸다.

원래는 크게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호발귀가 산에서 내려가고 있다. 그래서 그만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알았어. 조심할게.’

호발귀는 등여산의 말을 들었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등여산은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닌데. 통통 튀는 게 매력인 여자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할 말을 못 하게 된 거지?

타타타탁!

홀리가 호발귀 뒤를 바짝 쫓아왔다.

그녀는 호발귀가 무엇 때문에 같이 가자고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둘이 있는 게 좋았다.

어차피 호발귀와 오랜 시간 같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백년해로는 꿈도 꾸지 않는다. 호발귀는 얼마 있지 않아서 떠나갈 것이다.

그는 혈마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죽든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어서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죽던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과 영영 작별을 고할 것이다.

그러니 호발귀가 멀쩡한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매시간이 천금처럼 귀하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남자한테 넋이 빠져서는.’

홀리가 호발귀 옆에 바짝 붙으면서 말했다.

“책사가 그렇게 좋아?”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언제?”

“……!”

“언제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어? 난 금시초문인데? 그게 뭐 말 못 할 거라고 그래? 말해 봐. 책사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

호발귀는 홀리를 쳐다볼 뿐 말하지 않았다.

“예뻐서?”

“……”

“책사 참 예쁘지. 그리고 마음도 고와. 그렇지?”

“착하지.”

“그 말이 그 말이고. 그런데 나도 예쁘긴 한데. 이 정도면 꽤 예쁜 축에 속하지 않아?”

“예뻐.”

“그래? 그럼 착하기만 하면 되는 거네? 나도 잘 찾아보면 착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착해.”

“피잇! 입에 발린 소리.”

“아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착해. 바보같이 착한 면이 있어. 그래, 바보같이 착해.”

홀리는 호발귀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이 남자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말 속에 듬뿍 담겨 나왔다.

“책사가 좋으면 좋다고 표현해. 이러다가 마음에 있는 사람도 놓친다. 나는 나고 책사는 책사고. 나 때문에 책사를 멀리하지 마. 어차피 나하고는 계약관계잖아.”

“하하! 입에 발린 소리.”

“알았어? 호호! 내 마음은 내 마음인 거고, 그냥 무시해. 나 원래 이런 여자잖아. 무시하고. 책사하고 아름다운 시간 가져. 매시간을 아껴서.”

“나중에 얘기하자.”

“너는 항상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더라. 나중에 결심하자. 나중에 얘기하자. 그렇게 나중나중 하다가 영영 이별할 수가 있어.”

“충고야?”

“그래. 충고야.”

“충고 명심하지.”

“그래서 나도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둘만의 시간을 최대한 즐기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지?”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봤다.

홀리가 옆으로 바싹 붙으면서 팔짱을 꼈다.

“많은 건 안 바래. 이 정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우리.”

그녀가 팔짱을 끼고 활짝 웃었다.

“참 좋다. 이게 싸우러 가는 길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호발귀는 입만 벙긋거릴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을은 무인들로 가득 차 있다.

“히유! 이 살기. 우릴 죽이려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홀리가 마을을 쳐다보며 말했다.

혈천방은 일부러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면 피비린내가 번질 것이고, 호발귀가 미리 알아차릴 것을 우려해서다. 그러면 함정에 걸려들지 않을지도 몰라서.

아무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매복이 발각되는 경우도 예상한다.

그래서 마음 사람들을 꽁꽁 묶어놓았다. 매복 안으로 걸어오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이다.

무인들은 숨죽인 채 집 안에 숨어 있다.

“매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혈마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거는 너무 지독하네. 도대체 누가 숨어 있는 거야? 귀무살은 아닌 것 같지?”

혈천방에서 어떤 자들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살기 하나만큼은 귀무살을 능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매복 안으로 들어선 자들을 끝장내겠다는 결의가 읽힌다.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주시했다.

터엉! 텅! 텅! 텅!

마을로 들어서자 원정이 자리를 잡았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경고를 보낸다.

혈마가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는데, 같이 뭉쳐 있다.

호발귀가 모습을 드러내자 합공을 취할 생각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토초를 놓아주기로 했지만, 죽인다고 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태세던데. 죽일 수 있겠어?”

호발귀가 물었다.

“근친 간에 살상 말하는 거지? 그것참 어려운 문제이긴 해.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 어려운 문제일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정떨어질지 모르겠는데, 우리 음문촌 사람들한테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야.”

“그래?”

“이해하기 어렵지? 그냥 그런가 보다 해. 죽일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죽일 수 있으면 죽일게.”

홀리가 말했다.

음문촌 사람들에게는 형제를 죽이는 것이 간단한 문제인 것 같다. 그래도 낳은 배는 다르지만 모두 한 핏줄인데. 같이 웃고 떠들면서 자랐을 텐데.

호발귀는 홀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이거 이상한데?”

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는 마을 전체에 칼날 수천 개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살기가 너무 지독해서 오늘 참 힘들게 싸우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다.

그런데 마을로 들어서자 살기가 줄어든다.

걸음을 옮길수록, 마을 깊이 들어설 때마다 살기가 점점 소멸하는 게 느껴진다.

숨어 있는 무인들, 당장은 싸울 뜻이 없다!

“이거 왜 이러지? 이것들이 미쳤나?”

“잠시뿐이야.”

호발귀가 말했다.

“혈마와 싸움이 일어나면 진정이 풀려. 그때는 악착같이 달려들 테니까, 단단히 조심해.”

“벌써 쓰기 시작한 거야?”

홀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생기는 진기와 달라서 사용하는 게 보이지 않는다. 동작이나 흔적으로도 알 수 없다.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벌써 생기를 밖으로 내보내서 저들의 생기를 짓눌렀다. 싸우고자 하는 투기, 죽이고자 하는 살기 등등 온갖 기운을 다독였다.

저들은 살인 명령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싸우고 싶지 않다. 잠시 명령을 무시하고 있다.

“어쩌려고! 그건 혈마와 싸울 때만 사용해도 위험한데!”

“혈마와 싸우기 전에 힘부터 빼는 것도 안 좋아. 귀찮기도 하고. 그리고 이 정도는 괜찮아.”

호발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다. 호발귀는 홀리를 생각해서 매복자들을 짓눌렀다. 홀리가 힘들게 싸우는 것이 싫은 것이다. 비록 말로는 여러 말을 하고 있지만, 홀리는 호발귀의 마음이 느껴졌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홀리가 문득 말했다.

“왜?”

“가능성이 없는데도 자꾸 희망을 주잖아. 무슨 말인지는 나중에 말해. 너, 나중에 말하는 거 좋아하잖아.”

“후후! 그 말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말 나중에 말해야겠다. 홀리, 여기서 기다려줘. 그리고…… 알지? 나 정말 혈마로 만들면 안 돼. 반드시 죽여.”

호발귀가 대문도 없고 빗장 하나면 눕혀져 있는 집 앞에서 말했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혈마가 두 명 이상이라며? 정말 괜찮아?”

“역천금령공을 조금 강하게 펼쳐야 해. 그래서 나도 몰라. 네 부탁, 알지?”

‘나쁜 자식!’

호발귀가 뒤돌아섰다.

순간, 홀리가 집안으로 들어서려는 호발귀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급하게 말했다.

“나, 무섭다.”

‘이 여자!’

호발귀는 담담한 눈길로 홀리를 쳐다봤다.

“혈마가 안 되도록 악착같이 버텨볼게. 우리 다음에 말하기로 한 것도 있고.”

“그래. 나 너 꼭 살릴게.”

홀리가 잡고 있던 옷소매를 놓았다.

호발귀는 흰 이가 드러나도록 씩 웃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