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十一章 본색(本色) (3)
혈마가 나타났다. 자기 스스로 위치를 드러냈다.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다.
호발귀는 퉁기듯이 일어섰다.
아직도 운공하는 사람은 없다. 해자수가 나타나서 혈마 말을 꺼낼 때부터 이미 움직일 준비를 끝냈다.
호발귀가 말했다.
“난 당분간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데, 앞을 막아줬으면 해.”
호발귀 말이 끝나자마자 도천패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들기면서 말했다.
“알았어. 내가 이래 봬도 보위 아니냐. 지금부터 보위 역할 톡톡히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하지마. 최선을 다해서 막아볼게.”
당홍도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신형을 쏘아냈다.
호발귀가 무공을 펼치지 않으려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 알고 있지만, 이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홀리가 등여산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가자. 우리 할 말이 많잖아. 가면서 해.”
쒜에에엑!
홀리가 신형을 쏘아내자 등여산은 엉겁결에 같이 신형을 날렸다.
호발귀가 해자수를 쳐다봤다.
해자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곧바로 뒤따라갔다.
호발귀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등여산을 보내는 것이 맞다. 그녀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천살단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한데 그러자니 가슴이 아프다.
등여산을 좋아한다.
이제는 마음을 확실히 알겠다. 등여산을 연모한다.
그렇다면 홀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마음은 온통 등여산에게 쏠려 있으면서 홀리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못된 짓이다. 홀리 말대로 ‘나쁜 놈’이다.
홀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
자신이 혈마가 되면 무림이 초토화된다.
그러니 대의를 생각하면 당연히 홀리가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은 등여산이 옆에 있어 줬으면 한다. 그녀를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져있다는 것을 두 여인도 안다. 그러므로 서로 서먹서먹했다.
그래서 자진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혈마가 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면 굳이 홀리에게 죽음을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 또 혈마가 죽는 과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홀리에게 아픈 상처를 준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자진할 방법을 찾으면 홀리를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 너무 이기적이다.
그러면 홀리는 뭐가 되나? 어쩔 수 없으니 옆에 있어라. 방법을 찾으면 보내주겠다?
정말 치사한 생각이다.
‘방법을 찾으면’이 아니라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한다.
호발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계속 미적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또 두 여인과 함께 혈마를 추격한다.
‘빨리 결정해야 해. 어떻게 되든.’
쒜엑!
호발귀는 신형을 쏘아냈다.
해자수는 용케도 혈마가 쓸고 간 마을을 찾아냈다.
‘혈마 호발귀’를 중얼거리던 중년 부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혈마가 쫓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했다.
“여기까지는 찾아냈는데,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 있어야지. 세상이 오죽 넓어?”
모두 주위를 둘러봤다.
해자수 말이 맞는다. 혈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방도가 전혀 없다.
산으로 갔을 수도 있고, 논으로 갔을 수도 있다. 길을 따라서 갔을 수도 있다. 사방이 갈 곳이다. 혈마가 마을을 피바다로 만든 것은 알겠는데, 혈마를 추격할 단서가 뚝 끊겼으니.
“내가 앞장설까?”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찾을 수 있겠어?”
“대충. 나 같으면 여기로 갔을 거야.”
홀리가 산 옆에 있는 작은 길을 가리켰다.
산 옆에 있는 길은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농부들이 농로에 들어가기 위해서 만든 길이다. 당연히 길폭도 좁다. 한 사람이 걸으면 빠듯하다.
“아씨가 말한다면 틀림없지. 음문촌 사람은 음문촌 사람이 제일 잘 알잖아.”
해자수가 홀리를 거들었다.
사실, 해자수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모두 그녀가 말한 길을 눈으로 훑는 중이다.
홀리 말대로 도주하기 딱 좋은 길이다.
음문촌 사람들은 자기들만 아는 도주 방법이 있다. 또 추격방법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해 놓은 추격방법, 도주 방법이 있다.
음문촌은 수십 년에 걸쳐서 이 방법들을 체계화시켰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행동할 수 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도주도 하고, 추격도 한다. 그러면 거의 목적을 이룬다.
“이 길로 가면 뒤를 살필 수 있어. 도주하면서 쫓아오는 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보여. 가! 이 사람에게 말할 필요 없어. 이 길이 확실해.”
등여산이 홀리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혈마의 살해 현장을 잡았다.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다. 멀리서부터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서 이맛살을 찌푸릴 정도다.
“이쪽으로!”
홀리가 재빨리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이곳 마을은 수색하지 않는다.
분명히 마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혈마가 작심하고 죽였으니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혈마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지는 잘 알고 있다. 신이 와도 살릴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죽인다.
“난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아씨, 내가 쫓아갈 수 있게 흔적 좀 남기면서.”
해자수가 말했다.
“알았어. 빨리 쫓아와.”
쉐에에엑!
홀리가 신형을 쏘아냈다.
피비린내가 확실히 맡아진다. 죽은 자의 몸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흘러내린다.
죽은 자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 죽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길어야 일다경(一茶頃)이다. 그렇다면 혈마가 바로 코앞에 있다.
바로 따라붙어야 한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쒜에에엑!
홀리는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고 신형을 쏘아냈다.
해자수는 홀리를 따라서 움직이려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토초가 본격적으로 호발귀에게 혈마 누명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산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쒜에엑!
해자수는 빠르게 마을을 휘돌았다.
죽은 자는 쳐다보지 않는다. 혈마에게 검을 맞고도 살아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아예 검을 맞지 않은 사람, 토초가 살려준 사람을 찾는다.
‘이럴 줄 알았지!’
해자수는 한집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찾았다.
노파가 죽은 노인을 끌어안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앉아서 망연자실하게 넋을 놓은 채 허공만 쳐다본다.
쒜에엑!
해자수는 즉시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그리고 일부러 발소리를 흘리면서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해자수는 노인의 상태부터 살폈다.
노인은 죽었다. 손도 대기 전에 죽은 걸 알겠다. 알고 있으면 노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노인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죽였어. 괴물이. 다 죽였어. 괴물.”
노파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혹시…… 괴물을 데려온 여자가 몹시 우락부락하진 않았어요? 팔 하나도 없고.”
끄덕! 끄덕!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혈마를 뭐라고 부릅디까?”
“호…… 호발귀.”
노파가 호발귀를 거론했다.
예상이 맞았다. 토초는 본격적으로 호발귀에게 혈마 누명을 씌우고 있다.
“아! 할머니가 잘못 아셨네. 그 여자가 호발귀라는 사람에게 팔을 잘렸거든요. 그러니까 호발귀라면 이를 가는 거예요. 혈마가 호발귀가 아니라.”
해자수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노파는 다 듣고 있다.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듣고 있다.
“할머니, 여기서 나갑시다. 여기 있으면 큰일 나. 어쩌려고 그래. 혈마가 다시 올 수도 있는데.”
해자수는 노파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하지만 노파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주저앉으면서 노인을 끌어안았다.
“다 죽었어. 이제 다 죽었어.”
해자수는 노파를 놓고 주위를 돌아봤다.
노파가 왜 일어서지 않는지 알겠다.
혈마는 노인만 죽인 게 아니다. 노파의 자녀로 보이는 사람들도 죽였다. 손자 손녀도 죽였다. 정말 일가족을 모두 죽였다.
“어휴! 사정은 딱한데, 난 토초를 추격해야 해서. 다른 데서 또 이런 일을 저지르면 안 되니까. 사람이 올 때까지 여기 계시오. 다른 데 가지 말고.”
해자수는 당부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노파는 다른 사람이 물으면 토초가 살인했다고 말할 것이다.
누명이란 것은 처음부터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누명을 썼다가 벗겨내는 것은 정말 힘들다.
‘에휴! 혈마를 빨리 잡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쒜에엑!
해자수는 홀리가 남긴 흔적을 쫓아서 신형을 쏘아냈다.
홀리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몰라. 길이 너무 많아.”
홀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음문촌 추격방법에도 한계가 있다. 음문촌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도주하는지 알지만…… 사방이 넓은 논이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럼 내가 해볼까?”
당홍이 품에서 작은 대롱을 꺼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대롱에 든 물을 입에 부었다. 그리고 사방을 향해 물뿌리개로 뿌리듯 확 뿜었다.
파아아앗!
입에 든 물이 뿌연 수증기가 되어서 사방에 뿌려졌다.
“웃!”
앞에 있던 홀리가 도천패가 급히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당홍이 뿌린 액체는 식초다. 아주 강해서 살짝 냄새만 맡았는데도 비위가 틀어진다.
‘고초(高醋)!’
매우 강한 식초를 고초라고 한다.
하지만 고초를 당홍처럼 사용하려면 보통 성질로는 안 된다. 초가 아주 강하도록 특별히 제조한 살인적인 식초일 것이다.
잠시 후, 한쪽 땅에서 붉은 반점이 드러났다.
“이쪽으로 갔네.”
당홍이 말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호로병을 꺼내 입을 헹구는 중이었다.
고초는 피에 반응한다. 붉은 반점은 누군가가 피를 흘렸다는 뜻이다.
혈마의 검에서 흘러내린 피일 수도 있다. 토초의 잘린 팔에서 뿌려진 혈흔일 지도 모른다.
토초는 상처를 치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피는 흐르고 있다. 아주 소량이라도 땅에 뿌려진다.
“괜찮아?”
도천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당홍을 쳐다봤다.
“뭐가?”
“입. 이 정도 고초면 입이 다 탔을 텐데.”
“걱정돼?”
“그럼 걱정되지 안 돼!”
“호호호! 걱정하지 마. 내가 당홍이야. 당홍.”
“아! 아무래도 나 여자 잘못 골랐나 봐.”
도천패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호호호! 늦었어. 이제는 아무리 후회해도 무를 수 없거든. 그냥 이번 생은 틀렸구나 하고 살아. 뭐해? 빨리 가야지. 기껏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당홍이 도천패의 등을 찰싹 후려쳤다.
당홍은 두 번 더 고초를 뿌렸다.
땅에서 붉은색 반점이 여지없이 생겼다.
종이나 식물에 묻은 피는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땅에 묻은 피는 여간해서는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붉은 반점이 드러났다는 것은 피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 따라잡았어.”
당홍이 말했다.
“바로 이 앞에 있어.”
홀리가 눈살을 좁히며 말했다.
그들은 마을을 지켜봤다.
마을에서는 피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아직 혈마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나와 당매가 혈마를 맡을 테니까……”
“혈마는 내가 맡아.”
호발귀가 도천패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모두 혈마 상대가 안 돼. 혈마는 오직 나만 맡을 수 있어. 홀리, 나와 같이 가. 이건 계약 때문이 아니고, 부탁하는 거야.”
호발귀가 홀리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등여산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직 홀리만 쳐다봤다.